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75화 (75/361)

75화 황천 항해

야전병원으로 실려 간 모건 씨는 곧장 치료에 돌입했다. 지평호는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물렀지만 기대와 달리 모건의 상태는 악화되기만 했다. 문병을 위해 찾아간 간부들은 의사로부터 모건 씨의 병이 위중하니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말만 듣고 물러나야 했다.

“디스크가 재발해서 움직일 수 없다는군요. 여기서 배를 타는 건 자살행위라고.”

“그럼 어쩌라는 건가?”

“일단 모건 씨는 여기서 하선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아, 사장님이 뒷골 잡으시겠군.”

한숨을 푹푹 쉬던 양재문은 말없이 담배만 태웠다. 지금쯤 선주는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투자금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출항하고 20일이 지나서도 고기 한 마리를 잡기는커녕 환자가 생겼다며 항구만 들락이고 있다니.

“선장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네. 일단 전문부터 보내지요.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불의의 사고로 모건 씨를 하선하여 치료를 위해 귀국시키기로 하였음. 저희 지평호 선원들은 참치조업을 예정대로 수행코자 하오니 수락 바람. 이상 무.>

선주로부터의 답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도착했다.

<수고, 귀선의 요청을 허락한다. 전 선원이 합심하여 좋은 결과를 얻어 내시기 바람.>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빈 배로는 귀국하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에 다소 주춤했던 선원들도 힘을 얻었다. 한숨 자고 일어난 양 선장도 한결 기운이 돋은 듯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심 사장님께서 조업을 계속하라 격려하시더군.”

“하지만 여기서는 계속 조업을 해도 소용없을 텐데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나?”

“장소를 바꿔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강태준의 제안에 선장도 귀를 쫑긋했다.

“어디로?”

“선수를 남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지금 같은 날에 남중국해 인근이나 필리핀 근해는 아무래도 어장 형성이 안 되니까요.”

“맞습니다. 그쪽이 그나마 나을 겁니다.”

오재갑 역시 동의하자, 심기일전한 지평호는 7월 24일 다시 가오슝 항을 뒤로하고 다시 출어했다.

이번에는 선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수를 아예 남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이틀을 달린 후 지평호는 아열대 해역을 지났다. 열대 해역에 도달하자 공기부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제비처럼 날쌘 물고기가 은빛 지느러미를 빛내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바닷물을 박차고 날아오른 은빛 생선이 꽁지를 흔들며 멀리 도망치고 있는 게 보였다. 손으로 햇빛을 가린 오재갑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날치 떼군요. 크기가 실하네요. 제주도에서 잡히는 놈들의 두 배는 될 것 같은데요.”

“먹잇감이 많다면 큰 고기도 많겠죠. 여기서 한번 투승 줄을 내려 봅시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갑판장의 성화에 해역을 살피던 양 선장은 주낙을 펼치기로 정했다. 허나 주낙을 100바스켓가량 깔았지만 결과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몇 번의 투승에도 불구, 잡어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올라오지 않자 답답해진 양재문이 담배를 태웠다.

“에라이, 또 물방이네.”

“아무래도 이 지역에는 참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남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럼 그물을 깔아 보는 건 어떤가? 지평호는 애초에 시험 조업선이니 그물도 쓸 수 있지 않아?”

“죄송합니다만 선장님, 선망식 조업을 하려면 어군몰이를 할 만한 보조선이 있어야 합니다. 한 척뿐인 지평호로서는 오로지 연승식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끙. 나도 알아.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리지.”

강태준이 풀 죽은 선장을 웃는 낯으로 달랬다.

“실망하지 마십쇼. 고기잡이란 게 다 때가 있는 거죠. 오늘은 물때가 좋지 않았을 뿐입니다.”

“자네 말이 맞아.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지. 설마 한 마리도 못 잡겠나. 계속해 보자고.”

기운을 찾은 선장이 정신을 바로잡자 사기가 조금 올랐다. 선원들 역시 아직은 기가 살았는지, 여전히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 한랭전선이 접근해 비가 심하게 내렸고 바다도 퍽 거칠어 양승 작업이 지연되었다. 해상 작업이 지연되면서 사람들은 얼굴에 빛을 잃어 갔다.

그렇게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주낙을 까는 투승이 계속되었다. 지평호에서는 고기가 입질을 할 여유를 주기 위해 두어 시간 휴식을 취했다 양승을 하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몇 주 새 선원들의 손바닥에는 금세 굳은살이 돋아났다. 젓가락이 흘러도 모를 만큼 손의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작업 강도는 극한이었다.

새벽 2시부터 계속된 양승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조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아니, 어떻게 한 마리도 못 잡을 수가 있지?’

튜나는커녕 고등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쯤 되자 침착함을 견지하던 양 선장도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사정이 아니었다. 명색이 원양어선을 지휘한다는 인간이 튜나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우스갯감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렇게 남행을 계속하는 동안 배는 이틀에서 사흘 간격으로 투승을 계속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사이 배는 남하를 계속하여 하이난다오를 넘어, 난사군도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여전히 단 한 마리의 튜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쯤 되자 몸이 달아오른 선장은 선원들을 닦달하기 바빴다.

“안 되겠어. 이번에는 역순으로 걷이를 해 보자고.”

허나 그날의 결과도 최악이었다. 고생을 하고도 새끼상어 한 마리 걸려들지 않자, 선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며칠 새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간 선원들의 몸엔 크고 작은 상처가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해수 부식을 막기 위한 용도로 주낙에 입힌 콜타르 때문인지 목덜미의 피부가 벗겨져 얼룩덜룩해진 선원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뜨거운 햇빛에 벗겨진 살갗은 그 쓰라림이 이루 말할 데가 없을 정도였다.

갑판장인 염일우가 참다못해 볼멘소리를 했다.

“선장님, 선원들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벌써 일주일째 조업을 강행하지 않았습니까? 우린 기계가 아니잖습니까. 선원들도 쉬어야 합니다.”

“예. 선장님. 이러다 큰 사고가 날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연료유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강태준의 말에 선장의 이마가 주름이 파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양 선장이 기관사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기관사, 연료가 어느 정도 남았지?”

“딸딸 긁으면 한 일주일은 돌릴 수 있을 겁니다.”

눈치를 보는 기관장의 답변에 선장의 인상은 더욱 나빠졌다. 오재갑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출항 전에 기름을 가득 채우지 않았습니까? 꽉 채우면 최소 3달은 운행 가능한 걸로 아는데요.”

“그게 출항할 때 절반도 채우지 않았으니까. 젠장 야단났군. 비상 선용금조차 한 푼 없는데.”

“선용금이 전혀 없다니 그럼 어떡합니까?”

“일단 전보를 쳐 봐야지. 태준이 자네 말대로 그냥 태평양 쪽으로 갈 걸 그랬어.”

양 선장이 머쓱하게 웃었다. 태동산업이 대책 없이 나온 것은 어장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고기는 잡아낼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가로 소요될 부대 비용은 잡은 고기를 팔아 충당하면 된다고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만 없는 법.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간이었다. 강태준이 의기소침한 양재문 선장을 달랬다.

“지난 이야기는 해서 뭐 하겠습니다. 일단 기름부터 채워야겠네요. 표류선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죠.”

“그럼, 가장 가까운 항구는 어디지?”

“해도상으로는 싱가포르 쪽입니다.”

“또 사장님께 아쉬운 소리를 해야겠구먼.”

양 선장은 다시 푸념하듯 한숨을 쉬었다. 고기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한 상황에서 싱가포르 입항해 선용금을 수배 바란다는 전보를 쳐야 한다 생각하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조업 실적을 고려하면 이 근방에서의 조업은 도저히 답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쪽에는 플랑크톤이 풍부해서 어황이 더 좋다고 합니다.”

“싱가포르 해협으로 쭉 내려가는 걸로 하자고. 항구까지의 항해는 김 항해사가 맡게. 견시 잘하고. 난 머리가 아파서 좀 쉬겠네,”

“예.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십시오.”

선원들 역시 지칠 대로 지친 만큼 휴식이 필요한 상태. 당직을 제외하고는 내일의 잠까지도 미리 자 두겠다는 듯 저녁 일찍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강태준 역시 그간 김정욱 몫까지 혹사한 관계로 피곤하기 짝이 없었기에 침실에 드는 즉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사이 지평호는 칠흑빛 바다 위를 쿵쿵거리며 마구 내달렸다.

쿵쿵쿵…….

꿈결 속에서인가. 귀청으로 연속적인 기관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강태준이 허우적거렸지만,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자, 해수면 위로 어슴푸레한 빛이 보이고.

순간 누군가 뒤에서 다리를 붙잡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란 강태준이 자리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발에 해먹 줄이 엉켜 있었다.

“헉헉…… 재수 없게.”

잠에서 깨었지만 긴장해서일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찝찝한 기분에 환복을 마친 강태준이 잡친 기분도 환기할 겸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바람이 브리지 위에는 오재갑이 우두커니 선 채 망을 보고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바람 좀 쐬러. 선객이 있었군.”

“간만에 나오니 잠자리가 불편해서 말이죠. 바다 내음을 맡으니 좀 낫네요.”

“나도 그래. 선실은 오래 있어도 익숙하지가 않아서. 몸이 영 찌뿌둥하구먼.”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해무가 짙게 끼어 있고, 뱃전 아래 손을 내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하얀 물거품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짙은 안개의 여파인지 눈앞이 흐려지자, 모자를 고쳐 쓴 강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계가 잘 안 잡히는데? 제대로 가는 거 맞나?”

“그러게요. 형님. 저기 꺼끄무레한 것 좀 보십시오. 시꺼먼 게 여기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육안으로는 제대로 안 보이는데. 쌍안경 좀 줘 보게.”

해무가 낀 바다라 그런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선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언가 시꺼먼 물체가 어른거리고 있지 않은가.

시야에 잡힌 물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강태준은 등골이 쭈뼛 섰다.

큼직한 돌섬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마스트의 희미한 불빛에 사태를 감지한 강태준이 다급히 부르짖었다.

“3항사, 기관실, 기관실에 연락해서 당장 엔진 걸라 해!! 어서!”

“무슨 일입니까?”

“전방에 장애물이 있다. 잘못하면 충돌한다. 시간이 없어!!”

“네?! 넷!”

배는 해류에 따라 그대로 흘러내려 가는 중 이대로라면 충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대경한 오재갑이 기관실로 뛰어 내려가자 소란이 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기관사가 잠에서 깨기 무섭게 요란하게 부저가 울린다. 이윽고 슉 퉁퉁퉁! 하고 엔진이 걸리는 소리에 뛰쳐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 선잠을 자다 깬 선원들이 정신없는 와중에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전방 500m 앞에 돌섬이 보입니다.”

“돌섬 돌섬이라고? 미친 이런!”

배는 이제 암석의 바로 가까이 접근 중이다. 귓바퀴로 바위에 부딪혀 비말을 일으키는 물보라와 파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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