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발해 원양
아니꼽다는 표정이 역력한 시선에 견디다 못한 기자가 꼬리를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기사를 쓰려면 제대로 쓰십시오. 우리 지평호 선원들은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 맞서 싸운 전력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깟 장애물이 두렵겠습니까! 우리 선원 일동은 이번 참치 조업을 성공시켜 국가의 명예를 넓히고 해양 영토를 개척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저희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강태준의 패기 넘치는 연설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짝짝 소리가 전염되듯 퍼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 격양된 선원들이 지평호의 이름을 연호했다.
“지평호! 파이팅!”
“파이팅!!”
영문을 모르는 미군들이 어안이 벙벙해 하는 사이, 통역관이 진땀을 빼며 다시 설명을 이었다. 연설이 끝난 후, 초청객들이 모인 강당에서는 성대한 피로연이 열렸다. 준비된 요리는 이번에 근해에서 잡은 생선 요리를 테마로 했다.
큼직한 상어가 메인 디쉬로 장식된 가운데, 어묵탕에 문어 숙회, 전복 갈비찜, 광어, 방어, 도미로 만든 사시미에 성게 알을 얹은 초밥과 훈제 연어, 물회, 게장과 새우튀김, 대구살로 만든 카나페, 그리고 샥스핀 수프가 나왔다.
함께 참석한 복만이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도 당연지사였다.
“어이쿠 형님, 밥상이 으리으리하구만요.”
“출어 전 마지막 만찬이지. 안 요리사가 신경을 많이 썼네.”
“이야, 아침 굶고 온 게 정답이었군요. 간만에 기름칠 좀 하겠네요. 광필 형, 이참에 누가 많이 먹는지 내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복만이의 말에 광필이가 가소롭다는 듯이 물었다.
“훗, 나에게 먹는 걸로 도발이라니. 그래서 내가 받을 상품은?”
“저번에 말씀하신 파카 만년필 하나 구해 드리죠. 대신 제가 이기면 저번에 보여 주신 송아지 가죽잠바는 제 겁니다.”
“그 도전. 내 받아 주지.”
“무르기 없깁니다. 그럼 1차로 갈비찜부터 시작하죠.”
벨트를 풀며 전투 준비를 하는 광필이에게 고기를 쌓아 올린 복만이.
둘의 행동을 한심하게 보던 강태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휴 꼴통 새끼들. 어른이 돼 가지고 체통 머리 없이.”
“저러다 배탈이나 나 봐야 정신 차리지요.”
맞장구치는 오재갑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춘삼이 니도 많이 먹어라.”
“이렇게 좋은 자리에 초대되는 게 저뿐이라니. 동생들도 같이 왔다면 좋았을 텐데요.”
함께 온 춘삼이가 아쉬운 표정을 짓자 강태준이 기특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나중에 따로 사 줄 테니 걱정 마라. 따로 보냈어.”
“정말요?”
“그래. 녀석.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양껏 먹어라.”
생선 요리를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메뉴도 준비되었다. 불에 약간 그을려 구운 소고기 타다끼에 육회, 오일 파스타에 치킨 샐러드는 물론 짜장과 짬뽕, 미군을 통해 구한 신선한 과일과 디저트도 한가득. 식사를 음미하던 그때 어디선가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 소리에 주의가 쏠린 강태준이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생, 오랜만이야.”
“박 여사님, 오셨군요.”
착 달라붙는 보랏빛 드레스에 숄을 걸친 박원숙은 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관능적인 느낌의 드레스에 주변의 사람들이 은근슬쩍 눈길을 보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님. 어째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
“아부는. 동생이 먼 길 떠난다는데 안 올 수 있나? 아까는 좀 멋있더라. 내 한마디 할까 했는데 속이 시원해지더라고”
“하하. 솔직히 좀 욱해서요. 너무 팩트를 날려 버린 게 아닌지, 좀 걱정됩니다…….”
“아 김신제 그 인간은 별로 신경 쓰지 마. 강약약강이 확실한 캐릭터니 너한테 묵사발이 났으니 고개 들기 힘들걸. 마침 나도 그쪽에 빚진 것이 있었는데 잘되었어. 이번에 반미주의자로 찍혔으니 미군 기지 출입도 통제될 테고, 아마 당분간 기자질 좀 어려울 거야.”
“왜요?”
“뭐 빨갱이인지 아닌지 조사가 필요하지 않겠어. 단순한 반미라면 모르겠지만 북괴 사주를 받고 간첩질이나 하는 놈일지도 모르잖아. 아무튼 조사해 보면 다 나오겠지.”
눈빛부터가 번뜩이는 것이 제대로 건수를 만났다는 표정이다.
“솔직히 걱정했는데 감사합니다.”
“상부상조해야지. 나도 이번에 샥스핀 판매로 재미 좀 봤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동생. 그럼 나는 이만.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
할 말을 마친 그녀가 눈을 찡긋하곤 몸을 돌렸다. 박원숙이 군인들이 모인 장소로 사라졌을 무렵, 광필이가 말했다.
“이거 이거. 미군에 제대로 찍혔으면 인생 한번 피곤해지겠네요. 홍역 좀 치르겠습니다.”
“그러게 김신제 기자에 유감을 가지신 분이 꽤 많았나 보군.”
조사 결과가 어떻든 지금 같은 시기 윗선에 찍히는 것은 좋지 않다. 매카시즘 광풍이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알러지 반응은 현재진행형이었으니.
속으로 조용히 묵념을 마친 강태준을 보며 광필이가 물었다.
“근데 그 병신은 대체 누가 초청한 겁니까? 심 사장이 불렀을 리는 없는데.”
“발해일보 소속으로 참가했더군. 기자단 중에서 끼어서 들어와서 걸러내지 못했어.”
“발해일보라면 발해출판에서 나온 일간지 아닙니까? 굳이 그쪽에서 출어식에 태클을 걸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자 강태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발해 쪽에서 원양어업에 좀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야. 이억수 사장이 요새 해무청 관계자들과 물밑에서 접촉하고 있다더구먼.”
“이억수가 말입니까?”
“일종의 선점 효과를 노린 거지. 이번에도 자기가 먼저 출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더라고. 심 사장이 워낙 여기저기 뿌린 약이 많아서 수포가 됐지만.”
“경쟁자라니. 지평호의 출어가 눈엣가시일 법도 하군요.”
“그러니까 이번에 잘해야지. 혹여 실패하면 죽 쒀서 개 줄 수도 있을 테니.”
조업 성공이 공급 계약의 전제조건인 만큼, 혹여 조업이 실패할 경우, 밴 캠프 사에서 대안을 선택할 소지가 다분한 것. 아마 그 빈틈을 노릴 확률이 매우 높다.
때마침 저쪽에서 강태준을 발견한 양재문 과장이 아는 척을 했다.
“여기 있었군. 강 항해사. 아까부터 찾았지 뭔가? 인사드리게나. 여기는 태동산업 심익태 사장님이시네. 사장님을 뵙는 건 처음이지?”
땅딸막하지만 다부지게 생긴 심 사장이 인사를 건넸다. 호의가 가득한 눈이었다.
“배포가 대단해 보이는 친구군. 역시나 양 과장이 보는 눈이 있어.”
“과찬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준입니다.”
“이번 만찬도 사실 자네가 기획한 거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호평이 자자하네.”
“그게 어디 제 덕이겠습니까? 주위에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인맥도 실력의 일부지. 암튼 덕분에 입이 호사하는구먼.”
“그러게 말일세. 꼭 결혼식 피로연에 온 기분이더군.”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
땅딸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거슬리기까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주친 얼굴에 강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발해원양 이억수였다. 머리가 희끗해진 것을 빼면 미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강태준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원래부터 노안이었군. 머리털은 원래가 가발이었나?’
생각해 보니 항상 스타일이 똑같았지. 가르마 비율까지. 완벽하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유전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유난히 넓어 보이는 이마에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때, 부록같이 딸려온 이억기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간만입니다. 선배님. 아까 연설 멋지더군요. 아예 정치를 해도 되겠더이다.”
“그러게. 심 사장 자넨 어디서 이런 인재를 뽑았나 몰라.”
“제가 뽑지 않았지요. 스스로 굴러들어 온 거죠.”
“그러게 원래 난 사람은 스스로 길을 찾는 법이지. 하지만 자네가 아까 연설했던 2항사인가? 나 발해출판 이억수일세.”
“아. 예. 저는 강태준…… 어!”
강태준이 짤막하게 인사를 하는 척하며 들고 있던 포도주를 앞으로 쏟았다.
촥 뿌려진 포도주가 앞섶을 적시자 생쥐 꼴이 되어 버린 이억수.
포도주가 뚝뚝 떨어지는 장면에 강태준이 어쩔 줄 모르는 척 허둥지둥했다.
“어이쿠, 죄송, 죄송합니다. 이걸 어쩝니까?”
“허허, 이까짓 것. 괜찮네. 빨면 되지.”
뚝뚝 떨어지는 셔츠를 닦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이억수.
강태준이 옷을 털어 주려 하자 이억기가 인상을 쓰며 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뭐 하는 짓입니까. 이게?”
“미안하이…… 내 실수로…….”
“지금 장난합니까? 이건 전적으로 고의적인.”
“거 그만하시죠. 선배님. 실수라지 않습니까?”
“뭐? 이 자식이…….”
오재갑이 앞으로 나서자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된 이억기. 욱한 이억기가 달려들기 직전 광필이가 옆에서 눈을 부라린다. 움찔한 이억기가 뒤로 물러서자. 이억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분위기는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가운데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앞으로 나선 심 사장이 손수 옷을 닦아 주며 능글맞게 웃음을 지었다.
“이거 참, 유감스러운 사태이긴 하지만 붉은색이 은근 잘 어울리는군요. 이 사장님. 이왕이면 셔츠를 바꿔 보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편이 더 젊게 보일 거 같은데?”
“하하. 패션에는 자신이 없어서. 그 말씀은 참고하지. 그나저나 이거 이야기라도 해 볼까 했더니. 공교롭게 되었군. 옷이 이 모양이니. 참…….”
태연히 말을 넘긴 이억수가 접시에 위의 홍어 한 점을 집어먹었다.
잠시 후 찡그린 표정을 한 그가 입김을 후 불었다.
“크, 이거 코가 뻥 뚫리는군. 구린내는 좀 나지만. 나중에 기회 있으면 또 보자고. 조업 성공을 비네.”
“실례했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깍듯이 대답하는 강태준. 그 순간, 돌아서는 이억수의 얼굴에 살기가 이는 것을 강태준은 놓치지 않았다. 심 사장이 쯧쯧거리며 말했다.
“썩어 빠진 놈이, 대범한 척하기는. 간 보러 온 주제에. 암튼 고맙네. 한결 속이 풀리는군.”
“하하. 무슨 말씀을. 저건 전적으로 실수였습니다.”
“그 실수 자주 했으면 좋겠군. 암튼 자네들만 믿겠네. 저 자식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자고.”
다음 날 각 일간지에는 일제히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장도 오른 지평호, 출어식 성대. 한국 최초의 태평양 출어.
- 2개월 동안 200톤, 15만 달러 외화 획득 목표!
다음날 새벽, 날씨는 선선했다. 출항의 돛을 끌어올린 지평호 앞에 강태준과 선원 가족들은 기항에 앞서 마지막으로 인사할 시간을 가졌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 앞에서 가족들은 이산가족처럼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마중 나온 어머니 역시 감정이 북받치는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뭣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조심해라.”
“걱정 마십시오. 근데 복만이랑 광필이는 어딨습니까??”
둘만 쏙 빠진 모습에 강태준이 두리번거리자 춘삼이가 멋쩍은 듯 고개를 저었다.
“어제 너무 많이 먹었는지 크게 배탈이 났답니다. 화장실서 못 나옵니다.”
“에그 미련한 것들. 춘삼아, 어머니, 잘 부탁한다.”
“네네.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십쇼.”
고개를 돌린 강태준이 남은 인원들과 인사를 했다. 살이 붙어 이젠 제법 사람 꼴이 된 노기철 옆엔 요리사인 안연복이 대기 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