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지평호 탑승
급히 귀가한 복만이마저도 출항에 반대하고 나섰다.
“아니 대관절 형님이 왜 그 험한 원양어선을 탑니까? 예전이야 아무 기반이 없었으니 그렇다 쳐도 이제는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형님이 가고 나면 누가 회사를 운영합니까?”
“뭍에서 할 일이야. 철득이 형님이랑 안 선생에, 기철이도 있고. 광필이가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미 대충 적어 둔 게 있으니 가이드라인대로만 하면 돼.”
사정이 바뀌었으니 이제 고생할 필요가 없는 논리였지만, 그 말에 복만이가 다시 말했다.
“형님아! 그거는 너무 낙관적인 말이지요. 사장이 괜히 사장인가 돌발 상황이 터지면? 형님 없이 무슨 중요한 결정을 내린단 말인가.”
“맞습니다. 이대로만 가도 돈 버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미료 사업도 이제 막 궤도에 들어가는 참인데. 사장님이 잘못되면 어떡합니까?”
안연복의 걱정 어린 말에 어머니도 동조했다.
“그래. 이 어미도 좀 걱정이 되는구나. 이제 어느 정도 사업들이 궤도에 올랐는데, 그 위험한 곳에 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
“어머니, 저는 적당히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고,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조건 대양으로 나가 봐야 합니다.”
90년대 이후의 미래가 전자나 IT산업이 있다면 이 시대의 최고의 최첨단 사업은 바로 원양어업이었다. 이 시절의 바다 개척은 황금의 땅이요. 지팡구라고 할 수 있었다.
“작은 부자는 부지런하면 된다고 했지만. 큰 부자는 운에 달렸다 했습니다. 저는 대양에서 그 운을 잡아 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돈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지 않니?”
“제가 언제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하는 거 보셨습니까?”
원양어업은 강태준으로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있는 분야다. 전생에 반평생을 바친 직업이니만큼 자기의 장기 분야나 다를 바 없지 않나. 지금까지의 사업들과 비교해 봐도 수익성이나 장래성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비교 우위를 저버리는 건 바보짓이다.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어머니가 결국 한발 물러섰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말거라. 다치지는 말아야 한다.”
“예.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난 뒤, 며칠 후 이택근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 항사, 양 선장이 남항에서 보자는군. 아무래도 간단한 테스트도 겸할 생각으로 한번 보자는 거 같아.”
“빠르군요. 필요한 준비물이 있습니까?”
“수습 기간 중 어로에 필요한 비품이나 공용구는 회사에서 지급하네. 다만 개인별 속옷과 생필품은 회사에서 지급되지 않으니, 혹 모자라지 않게 준비하는 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강태준은 출발 전 부둣가 어구점에서 장화와 담배, 비상약과 각종 생필품을 샀다. 대략적인 준비를 끝내고 아침 일찍 부둣가로 나와 보자 새벽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조금 쌀쌀하네.’
추위에 오재갑이 입김으로 손을 녹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강태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래였다면 관절이 시렸을 고통이었겠지만 젊은 지금은 적당한 수준의 자극이랄까.
칼바람이 부는 바다에 유빙을 헤치고 다니던 북해를 떠올리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바다의 환영식을 만끽하고 있던 즈음, 부두 한복판에 선 채 방한복을 입은 양재문 선장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이군. 후배님. 이 상무님께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 같은 엘리트가 이런 험한 일에 지원해 주다니 정말 고맙군.”
“저야말로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작업 중이었는지 옷에는 얼룩이 묻어 있고, 은은한 기름 냄새가 풍긴다. 아마도 밤샘으로 작업을 했을지도. 하지만 출항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표정은 활력에 차 있었다.
“실무 수습은 오후부터야. 사실 승선할 선박부터 보여 주러 불렀다네. 우리 배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예. 신문으로는 대충 봤지만요.”
“그래서 소개해 주려고 불렀다네. 자, 바로 이거야.”
“이거 원, 생각보다 굉장히 크네요.”
처음 지평호를 본 오재갑이 입을 딱 벌렸다. 남항은 내항 면적이 협소하지만 소형 선박들의 내왕이 잦고, 남해안 일대를 운행하는 정기 여객선들의 통행로이기도 한 곳.
10톤급 목선도 많지 않던 시절. 230톤급 철선은 소인국 앞의 거인처럼 웅장해 보였다.
갑판 위는 한창 미끼 선적 작업으로 분주했다. 미끼 상자를 싣고 온 대형 트럭이 두 대나 줄지어 서 있었는데, 대기하던 선원들은 컨베이어 벨트처럼 두 줄로 늘어서 릴레이식으로 이를 어창으로 싣고 있었다.
브리지로 올라간 강태준은 배 안을 구경할 기회를 가졌다.
“따로 가르칠 시간 같은 건 없으니 항해 기간, 선박의 주요 설비와 기능과 운용에 대하여 숙지하도록 하지
“수산대에서 보던 실습선과 구조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게다가 맨 아래층에 기관실이라니. 애초부터 운항 중 침수나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은 선박 같습니다.”
“하하. 앞뒤가 수밀격벽으로 구획되어 있으니 안전은 걱정할 필요 없어. 기관실에 물 들어갈 정도 되면 어차피 다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나. 게다가 이건 시험 조업선으로 제작된 선박이라 잡다한 기능이 많아. 믿거나 말거나지만 미국에서도 이것보다 좋은 성능을 가진 어선은 드물다는군. 어지간한 배는 명함도 못 내밀지.”
말투에서부터 자신감이 뚝뚝 묻어나는 양재문. 그도 그럴 것이 이 지평호라는 배는 순수 건조비만 무려 49만 달러가 넘게 든 선박이다.
냉동 냉장 설비는 물론 무선 방향탐지기와 어군탐지기, 측심기 등 최첨단 설비들을 고루 갖춘 이 배는 원시적인 목선이 대부분인 시대 기술적인 감흥을 주기 충분했던 것.
그렇게 조타실을 구경하던 오재갑이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와, 이건 뭐 하는 기곕니까?”
“그건 무선 방향탐지기(라디오 컴퍼스)라고 부르지. 운행 중인 배 위에서 무선 표지로부터 오는 신호 전파를 받고, 그 지점의 위치나 방향을 탐지하는 장치인데 매우 중요한 설비지.”
강태준이 대신 답하자 오재갑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기 보이는 인양 장치는 어디 사용되는 것입니까?
“그건 그물이나 통발 인양하는 양승기야.”
“그럼 기관실 상부에 있는 오프닝 구멍은 갑판실과 연결되는 건가요?”
“응. 채광과 건조용이지. 뭐 기관 수리 시 장비 이동이 용이하도록 기관실 개구가 있어야 하니까 말이야.”
강태준의 막힘없는 답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양재문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해무부 국장도 잘 모르던 설비인데 자네는 잘 아는군.”
“해무부 국장이 선박 장비를 몰라요? 그건 좀 심각한데…….”
“하하. 사실 상공부 수산국 관료 중 장비 용도가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사실 나조차도 모르는 것투성이였네.”
“그 정도입니까?”
오재갑이 은근히 존경심 어린 눈으로 강태준을 돌아보자 양재문이 어깨를 으쓱댔다.
“뭐, 공부를 많이 한 거 같으니 한결 걱정을 덜겠군. 다만 이 배를 탔으니 평소 행실에도 주의해야 할 거야. 대통령님께서 직접 배 이름까지 붙여 주신 덕에 쓸데없는 관심 가진 사람들이 좀 많거든. 재수 없게 기사라도 뜨면 그때는 감당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니 어깨가 무거워지는군요.”
“뭐 자네들이야 하던 대로만 하면 되니 큰 부담 갖지 말게. 아. 거기 자이로 컴퍼스는 동쪽으로 2도가량 오차가 있더군. 근해 조업을 하는 경우에는 큰 문제는 없겠지만, 대양에 나가면 자칫 잘못하는 사이 항로가 틀어질 확률이 높으니 주의하시게나.”
“그거 명심하겠습니다.”
양재문이 다시 말했다.
“아무튼, 우리 배에 탔으니 대충 느낌이 오겠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라고 보나?”
“설비랑 배도 최고급에 관리 상태도 무난해 보이니 운용이 문제겠죠. 아무래도 승선원들의 조업 연습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결국 참치잡이나 연승과 투승이란 기본적인 방식은 똑같으니까요.”
“빙고, 자네 말대로일세. 사실 그동안 어구를 못 구해서 근해 조업도 못 나갔거든. 일단 대양으로 나가기 전에 몸풀기 정도는 해 봐야 할 거 아닌가.”
“몸풀기라. 목표가 뭡니까 그럼?”
“선박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해 보려면 상어잡이가 적당하지 않겠나. 마침 제사 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곧 연말이니 제사상 올릴 돔배기가 부족해질 때지.”
상어가 보호 어종이 되어 조업이 중지된 90년대 들기 전에는 상어 조업이 횡행했다. 특히 경북 용당에서는 제사상에 상어 산적이 없으면 안 될 만큼 상어고기를 즐겨 먹을 정도.
회갑이나 혼례 같은 행상 때 접빈 음식으로 올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재갑 역시 그쪽 사람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돔배기라 군침이 도는군요.”
“오. 먹어 보았나?”
“물론입죠. 안동의 헛제삿밥엔 상어고기가 꼭 들어 있지 않습니까. 쫄깃한 식감에 비린내도 없어 맛이 좋더군요.”
“뭘 좀 아는 사람이군. 그거 별미지. 꼬치에 꿰서 석쇠에 구워 먹으면 그냥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니까.”
“하하. 다들 미식가들이시군요. 근데 지금이 11월이니, 상어를 잡으려면 조업 시기가 좀 빠듯하군요. 상어는 6월부터 12월까지가 성수기 아닙니까?”
“맞네. 정월부터 5월까지는 재미를 못 보지. 그래서 출항을 좀 서둘러야 했네.”
“출어할 곳은 어딥니까? 제주도 서쪽? 아니면 대마도 인근?”
“아니 그쪽은 좀 그래. 저번에 허탕을 치기도 했고, 유자망협회 쪽과 트러블이 좀 있어서. 이번에는 독도 쪽으로 가 볼 예정일세.”
“독도요?”
“그래. 대화퇴어장에서 조업하려고 하네. 아직은 오징어 철이 아닌가. 먹잇감이 풍부한 지역이니 그쪽은 뭔가 있겠지
“대화퇴 쪽이라…… 확실히 거기라면 허탕 칠 확률은 줄어들겠군요.”
독도섬과 일본 사이 동해 중앙부 해저에 해령이 연속되는 부근이 있고 그 서단에 대화퇴라는 지형이 있다. 이 퇴(堆)라는 지형은 바다 한가운데 편편하게 솟은 고원을 지칭하는데 주변보다 수심이 얕고 영양이 풍부해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다.
“암튼 다소 여유 있으니, 그전까지 태준이 자넨 조타 설비와 보기 장치에 관해 대략이라도 숙지해 놓게나. 재갑이 자네는 일단 하역용 장비와 정박용, 구명설비 위주로 보고 많이 다른 것 같아도 실제 기능은 같으니 눈에 익숙해지면 좀 편하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강태준과 오재갑은 선상 위를 돌며 설비의 기능과 운용법에 대해 숙지하는 시간을 가졌다. 3시가 가까워지자, 선원들은 하나둘 갑판 위로 올라왔다. 사무처 과장이 인원 파악을 하고 식사에 앞서 선원들과 안면을 틀 시간이었다. 식당 앞에 모인 20명의 표정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새 식구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선장인 양재문이 손바닥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자, 소개하겠다. 이번 항차부터 2등 항해사를 맡게 될 강태준이다. 이쪽은 3등 항해사인 오재갑이고.”
강태준이 먼저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강태준입니다. 수산대 어로학과 졸업반이고, 이번에 갑 2종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특기는 바둑과 영어회화, 댄스도 좀 할 줄 압니다. 외국인 미녀를 꼬시고 싶으면 제게 통역 부탁하면 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해서 영광이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오재갑입니다. 수산대 어로학과 3학년이고요. 실습 항해사지만 3대 항사에서 수료를 마쳤습니다. 특기는 따로 없지만 나름 소설가를 꿈꾸던 사람이라 글쓰기는 자신 있습니다. 고교 시절엔 연애편지 대필도 자주 했으니 혹 편지 쓸 때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쇼. 앞으로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둘의 소개가 끝나자 박수를 치는 양재문. 선원들도 뒤따라 박수를 쳤다.
미리 멘트를 준비한 보람이 있는지 경계심 넘치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