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64화 (64/361)

64화 인사 청탁

“독고 이사님! 오셨습니까?”

나타난 상대는 조업지원부 이사인 독고진이었다. 구원투수를 본 듯한 직원의 표정에 독고진이 앞으로 나섰다.

“미안하지만, 자네들처럼 무경력자는 쓸 수 없네. 최소한 상어 투승 정도는 해 봤어야지.”

“경력이야 쌓으면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일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이번 조업은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일세. 인재를 키워서 쓸 만큼 한가롭지 않아.”

“생각을 바꿀 수는 없겠습니까?”

“전혀?”

“저희도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요.”

몇 번을 다시 찾아갔지만 독고진은 완강하기 짝이 없었다. 면전에다 문전박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원론만을 되풀이하기를 수십 번.

아무리 부탁해도 꿈쩍도 하지 않자 오재갑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무슨 말이 통해야지. 고집이 쇠심줄이구만요.”

“독고진 그 인간과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거 같군.”

“그럼 어떡합니까?”

“방법을 바꿔야겠지. 독고 이사가 설득이 안 되면 더 윗선을 노려야지.”

“네 누구 말입니까?”

“한 분. 우리한테 호감을 가지신 분이 있지 않나? 태동 쪽 고문이시기도 하고. 우리 스승님이시기도 한.”

결심을 굳힌 강태준 일행은 곧장 김재덕 교수를 찾아갔다. 이번에 어로학과 학과장을 맡은 김재덕 교수는 평소처럼 사무실에 처박힌 채 서류 더미를 보는 중이었다. 새로 도착한 은근히 반겼다.

“오, 자네들이 나를 다 찾아오다니, 이거 영광이군.”

“예전부터 자주 연락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일전 일은 아주 감사했습니다.”

“뭐 감사 인사가 무척 빠르구먼. 난 더 늦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찌 되었든 자네가 이렇게 무사히 졸업반이 돼서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야.”

살짝 비꼬는 말투에 강태준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뭐. 자네한테 인사 들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으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그보다 무슨 일인가. 내게 이유 없이 찾아올 학생은 아닐 테고,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데 말이야.”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원양어선 지평호에 승선할 기회를 갖고 싶어서요. 교수님께서 정부와 선주협회에 지인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번 선처 좀 부탁할까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원양어선에 타겠다고?”

“예. 저희도 지평호에 승선하여 튜나 조업에 실무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강태준은 승선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향후 원양어업의 발전 방향과 향후 어떤 방식으로 고기를 잡을 것인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등등.

방문 이유를 경청하던 김 교수의 표정이 조금 온화해졌다.

“흠. 젊은이의 혈기로만 치부하기에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구먼. 다만 이번 일은 여러모로 좀 걸리는 부분이 많아서 나도 확답을 주기 어렵군.”

“어떻게든 안 되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양재문 선장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흐음…… 이런 일로 인사 청탁을 넣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아. 태동산업 입장에서는 사운을 걸고 있으니 양 부장 입장에서도 거절이 부담될 테고. 무엇보다 자네들은 실무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 아닌가. 승선자 구인 조건이 유경험자 우선 채용이라, 아무리 학업성적이 좋아도 추천서를 넣기엔 좀 하자가 많아 보이는군.

그렇게까지 딱 잘라 말하자 강태준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오재갑이 다시 한마디 하려 했지만 강태준이 막았다.

“아무래도 저희 욕심이 과했군요,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살펴 가시게나.”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기침 소리와 함께 김 교수의 말이 들려왔다.

“크흠, 잠시 내 깜빡했군. 공교롭게도 지금 태동산업 본사서 파견된 이택근 상무가 부산의 황금장 여관에 묵고 있다는군. 이번 채용 건과 관련해 전권을 가진 사람인데 유솜(USOM)과 협의할 사항이 남아서 말이야. 청탁이 통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담배 정도는 사양하지 않으니 말보루라도 한 보루 사가는 게 좋을 걸세.”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는 무슨. 그럼 건투를 비네.”

이 정도 팁을 주었으면 대충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이 잡힌다. 강태준은 다음날 일찍 황금장 여관을 찾았다. 몇 차례 걸친 간청 끝에 이택근과 면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 이 이른 시간에 날 만나러 왔다니 누군가?”

“안녕하십니까. 수산학과 4학년 강태준입니다.”

“오재갑입니다.

“이른 아침 뵙자고 청하여 죄송합니다. 이건 작은 성의이오니, 먼저 이거부터…….”

담배를 본 이택근이 반색하며 말했다.

“오, 오오, 센스 있군 자네. 마침 담배가 다 떨어졌는데 고맙군.”

성냥으로 담배를 붙인 남자가 흰 연기를 뿜어내자 짜증이 어렸던 표정이 사라졌다.

“휴우…… 이 맛이지. 니코틴에 쩐 뇌세포가 하나씩 죽어 가는 느낌. 이거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감각이 아니겠나.”

“그래서인가 몰리에르는 담배를 가리켜 신사의 정열이라고 말했죠.”

“거 명언이군. 재갑이라 했나. 자네는. 한 대 안 할 텐가?”

여느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지 못할 법도 했지만. 오재갑은 단칼에 사양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담배를 배우지 못해서 피지 못하는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유감이군. 뭐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니까. 흐음. 그래 강태준 군. 여기는 왜 찾아왔나. 어로학과의 자존심이 찾아올 때는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설마 절 아십니까?”

“허허, 강태준을 모르면 간첩이지. 수산대의 명물 아닌가. 듣기로 명왕호를 걸고 시합을 했다지. 양재문 선장 말로는 실력이 꽤 뛰어난 후배 녀석이라고 하던데?”

“알아주셔서 영광이군요. 그런 칭찬을 받다니.”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니 자긍심을 가져도 좋네. 그건 그렇고, 그보다 이 이른 아침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시시껄렁한 사유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본론을 원하는 이택근의 눈에 강태준이 나섰다.

“사실 지평호에 타고 싶습니다.”

“음, 항해사로 말인가? 자네들이 그럴 역량은 있고?”

“그건 팩트로 말씀드리는 것이 더 빠를 거 같군요.”

학교에서 떼 온 서류를 준비한 강태준이 그에게 내밀었다. 서류에 적힌 성적표와 추천서였다. 자리에 앉은 채 이택근이 서류를 끝까지 읽었다.

“성적이 아주 준수하군, 둘 다. 특히 실습 성적은 아주 예술이구만.”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네. 자네 같은 에이스들이 이런 모험을 하려는 이유가 뭔가? 이 정도 성적이면 어업조합이나 웬만한 선사 같은 곳에서 알아서 모셔 갈 텐데. 앞길 창창한 친구가 탄탄대로를 놔두고 굳이 험로를 갈 이유가 없잖은가?”

실제로 이 정도 성적의 코스라면 여느 선박회사를 가더라도 임원을 다는 정도는 어렵지 않은 만큼 큰 메리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태준은 이미 모범답안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옛날에 저희 집안은 가업으로 멸치 어장을 해 왔지요. 아버지께서는 사업상 재간이 뛰어나셨지만, 전쟁이라는 불가항력 덕에 어장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아버지께서는 죽는 날까지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셨지요. 그래서 전 그 후 부친 빈소에서 멸치 어장을 되찾고 다시 집안을 재건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망한 집안을 재건하겠다라, 목적의식이 확고해서 좋군. 하지만 부모라면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망망대해에 나가는 모습을 과연 바라실까?”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성공을 원한다면 죽을 각오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투자에서 그런 격언이 있지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 높은 이득을 얻으려면 높은 위험을 감수하라고요.”

“그래서 자네가 얻을 이득은?”

“경력이죠. 지금은 원양어선이 한 척뿐이지만 곧 제2, 제3의 지평호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원양어선 승선 경력 있는 선장들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선장직 정도야 충분히 달 수 있어.”

“기회는 있을 때 잡으라고 배웠습니다. 인생의 같은 기회가 다시 오진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바라는 건 단지 선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가 되려는 거지요.”

이 무슨 무모한 자신감인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햇병아리가 지껄이기엔 심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택근은 그 패기에 입술이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허허, 이 친구. 이거 야심이 보통이 아니구먼.”

“뭐 여기 재갑이 역시 똘기라면 지지 않지요. 바다에 나가려고 한국대도 포기한 친구니까요.”

“오 그래?”

눈빛이 달라진 이택근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호의였다. 오재갑이 앞으로 나섰다.

“무급이라도 좋습니다. 배에 태워만 주십시오.”

“정말로 무료 봉사라도 할 참인가?”

“네. 항해 중 사고가 나더라도 전적으로 저희 책임으로 하지요. 회사에 부담을 지게 하지 않겠습니다.”

“둘 다 별종이군. 제정신들이 아니야.”

잠시 침묵하던 이택근이 다시 담배를 태웠다.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떠보듯 말을 이었다.

“이번 조업은 초행길이고, 그만큼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몰라. 나도 조업이 성공하길 바라지만 바다란 그렇게 온화한 존재가 아니지. 자칫 잘못하면 시체도 없이 수중고혼이 될 수도 있다네.”

“뱃놈이 바다에서 죽는 걸 두려워해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습니까?

말없이 담배만 태우는 이택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 분. 다 탄 꽁초를 털어 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 심 사장님께 말씀을 올려 보겠네. 대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원망하지 말아야 하네.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서를 써야 할 텐데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이택근으로부터 해당 사안을 보고받은 심 사장은 즉시 반색하며 크게 반겼다.

“아니 그런 용감한 청년들이 있나? 당장 합류시키도록.”

“하지만 사장님. 패기만 넘칠 뿐, 아직 경험 없는 애송이들입니다.”

“애송이는 무슨. 어로학을 전공한 학생 아닌가? 최소 5학기는 넘게 있었으니 그 정도면 실습도 해 봤을 테고, 짬은 좀 적어도 어지간한 어부들보다 낫지.”

“하지만 이번 조업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테랑들입니다. 하지만 재갑이나 태준이나 직급으로 치면 최소 간부 후보생이고요. 졸업도 안 한 녀석들에 항해사 자격을 주는 건 형평성 문제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선내에 불협화음이 날 수도 있습니다.”

흔히 기수가 꼬인다는 말처럼 위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을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어리다 못해 솜털이 보송한 녀석들이 과연 베테랑들을 컨트롤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심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장기적으로 보게. 차후에 대어가 될 인재가 자발적으로 우리 회사로 굴러들어 온 거야. 그리고 앞으로 몇 달 정도는 실습할 텐데 뭐가 문젠가. 생각보다 기대 이하라면 적당한 수준에서 핑계를 대고 하차시키면 될 뿐. 애초에 승선계약서에 그런 조항을 넣는다면 상관없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논의는 그쯤에서 고만하지. 알았다면 그 청년들을 당장 승선시키도록 하게.”

가까스로 허락을 받은 둘이었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반대가 상당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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