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원양어업의 태동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광필이가 떨떠름한 투로 중얼거렸다.
“야. 아재, 아재 거리는 것도 그렇고. 저거 나 멕이는 거지?”
“그러게, 애가 보통내기가 아닌뎁쇼.”
“조막만 한 게 아주 맹랑하네. 형님 거 임자 만났소.”
“이제 어떡하나. 형. 이제 집에서 빤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자제해야겄네.”
“에이. 스벌. 귀찮게.”
부산으로 귀가 후에 점례를 맞은 어머니는 무척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어머, 네가 점례구나. 전보 잘 받았다. 아주 귀엽게 생겼구나.”
“감사해유.”
“한 번쯤 딸이 생겼으면 좋겠다 생각했더니 이참에 잘 되었구나. 우리 옷부터 사러 갈까?”
“네? 옷이유? 아휴. 지는 괜찮아유.”
“그럼 못 쓴다. 우리 집 가족이 되었으니, 집안 격에 맞춰야지. 그렇게 저고리 차림으로 학교 다닐 수야 없지 않니. 학용품이랑 가방이랑 준비할 게 많구나. 머리도 손질해야 하고.”
“그런가유?”
“그래. 이참에 이 아줌마랑 이쁜 구두도 사자꾸나.”
적적하던 터에 마음 둘 아이가 추가되자 어머니는 한결 표정이 좋아졌다.
여자애 하나에 칙칙했던 집안 분위기도 꽤 완화된 것. 점례는 애초에 혼자 할아버지 일을 도울 만큼 억척스러운 면이 있다 보니 눈치가 빨랐다. 화원을 가꾸거나 집 안 청소도 곧잘 돕는 모습에 이쁨을 받게 된 건 당연지사. 덕배를 비롯한 아이들도 비슷한 또래가 추가되니 한결 편해진 모양이었다.
“점례 누나가 와서 집안이 좀 좋아진 거 같아.”
“응, 나두. 광필이 형이 웃통 벗거나 난닝구 바람으로 안 쏘다녀서 좋아.”
그간 알게 모르게 광필이 눈치를 보았던 아이들 입장에서는 실로 든든한 우군이 추가된 셈. 그런 똑순이의 설교에 꼼짝 못 하는 광필이를 훔쳐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사이 1차로 생산된 옹기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훨씬 튼튼하고 좋은 품질에 안연복은 몹시도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옹기만 바꿨는데 이 정도 수율이라니. 진작에 바꿀 걸 그랬군요.”
“확실히 장인이라 그런지 제품의 질이 다르네요.”
발효가 더 잘되는 옹기로 인해 MSG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생산량이 점차 늘어나자, 조미료인 풍미의 점유율은 20%를 돌파했고, 면도날 사업 역시 확장을 거듭했다. 그사이 면도날 품질 관리를 맡은 오재갑이 반기 실적 보고서를 올렸다.
“면도날 사업 쪽 당기순이익이 200만 환이 넘을 것 같습니다. 이번 분기부터는 하도급 반제품 생산량도 월 40,000개 이상으로 늘어날 거 같고요.”
“성장세가 빠르네. 군납을 추진하기에는 좀 빠른가?”
“일단 접촉은 해 보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일단 물량을 감당하기엔 아직 인력이랑 설비가 부족하고 말이죠. 원자재 가격이 높아지고 있으니 리스크를 분산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미래제철 쪽에서 전기로를 추가 증설하여 생산 물량을 늘린다고 하니 그쪽과 거래도 타진해 보세요.”
“네, 사장님. 그보다 조미료 광고는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계속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고정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 부분은 일단 비용이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기 전까지는 광고비를 아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인지도가 없으면 소용없는 만큼 마케팅이 반이다. 풍미(豐味)의 대성공으로 인해 조미료 시장에 지각변동이 발생한 만큼 지금부터가 진짜 경쟁이었다. 미광, 미훈, 미향, 미왕 등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만큼 공격적인 마케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지속적인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발생으로 실제로 남는 금액은 얼마 없었다.
‘더 빨리 성장하려면 추가 수익이 필요할 텐데 말이야.’
근래 규모가 급성장하기는 했지만, 제조업은 본래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는 분야다. 지금이야 관망 중이지만 막대한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이 끼어드는 순간부터 치킨게임이 벌어지게 될 것이 불문가지. 공장 규모와 시장 점유율을 부지런히 키워 놓아야 후일의 충격에 대비할 수 있는 만큼 강태준으로서는 성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임 사장 그 인간은 대체 어디 간 걸까.’
본래대로라면 한국 최초의 MSG 공장을 세웠을 인재이니 최우선으로 스카웃하려고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던 것.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춘삼이가 신문을 가져왔다.
“사장님 이거 보세요.”
[지평호, 해외 시범조업 승인. 인도양 진출 가시화]
[미국 기술자문관 파견, USOM과 협력 강화할 예정]
“심 사장이 결국 해냈군. 평화선 때문에 힘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진짜로 해냈군요.”
태동산업 심 사장이 인수받은 S. S. 워싱턴(Washington)호는 1946년 미국 오리건주의 아스토리아(Astoria)항 조선소에서 건조된 배로, ‘시애틀 수산 시험장’에 소속되어 트롤과 연승어업 혹은 선망 어업 등 모든 업종의 어로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목적 시험조사선이다.
하지만 한국에 온 이 배는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나 다름없는 신세로 부산항에 계류되어 있었고, 그걸 심 사장이 과감히 인수한 것이다.
배의 기능이 워낙 우수하니 한 척만으로도 본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과감히 24만 불의 거금을 주고 구매했지만, 해외 진출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당시 이만승은 기능이 탁월한 일본 어선들의 어로 활동을 막기 위해 평화선을 선포했고, 일본과의 국제 분쟁으로 확산되면서 해외 진출에 나서야 하는 태동산업에 좋지 않은 영향만 미쳤다.
선박을 제대로 운용할 만큼 경력 있는 선원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일본과의 마찰로 어구조차 마련하기 어렵게 되니 당장 외국 출어는 언감생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돈만 까먹게 되자 심 사장은 평소 그와 친분이 있던 윔스 씨에게 SOS를 청했다. 미군 정기 법률과 경제 분야 특별보좌관이었던 윔스는 궁지에 처한 심 사장의 편지를 들고 사모아에서 투너캔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반 캠프(VAN CAMP) 사(社)에 거래 의사를 타진했다. 윌링턴 사장을 만난 윔스는 이렇게 호소했다.
“전후 일본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내에도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젊은이들은 꼭 원양어업 같은 힘든 일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고임금의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튜나 조업은 큰 난관에 봉착할 게 분명합니다.”
“허허.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애초에 일본에서 조업하는 것만으로도 물량은 충분한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원래 일본인은 지리적 특성상 생선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튜나를 회로 즐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일본 내수시장 소비가 증가하면 신선하고 가성비 있는 제품은 횟감으로 돌려질 테니. 통조림 원료 확보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건 먼 훗날의 일이지. 그렇다고 한국을 대안으로 삼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한 국가가 생산 수요를 조절할 만큼 커지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지요. 그렇게 되면 일본이 어획량을 조절할 것이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수요가 는다면 필연적으로 어가 상승을 부채질할 겁니다. 앞으로 공급량을 더 늘리지 않으면 가격 경쟁력이 없을 겁니다. 원료 공급지로서의 ‘제2의 일본’이 필요합니다.”
그 호소는 윌링턴 사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 반 캠프사에서는 수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한국에도 기회를 줘 보기로 했다.
“태동산업에서 사모아에 진출한다고?”
“진짜네. 허풍인 줄 알았더니 양재문 그 양반이 구라까지 않았군.”
무모한 꿈으로만 여겼던 원양어선 사업이 현실화된 것이다. 지평호가 수개월 내 대만 가오슝 지역에서 시험 조업을 하고 난 다음, 사모아로 향할 것이라는 소식에 수산대 전체가 달아올랐다. 광필이가 말했다.
“조업 허가가 나다니 대단하네요. 그럼 겨울이 코 앞인데 그럼 내년 봄쯤에 조업을 시작하려나요?”
“그것보다는 좀 걸리지 않을까. 준비한다고 해도 최소 몇 개월은 소요될 테니. 아무래도 선박 운항 기술 전수랑 베테랑 선원 선발도 그렇고 아직 조율해야 할 일이 많겠지.”
강태준의 말에 광필이가 물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정말로 형님 말씀대로 튜나조업이 시작된다면 이참이 경력을 쌓을 기회가 아닙니까?
“그래. 마침 해양 실습도 마쳤으니 한번 찾아가 봐야지. 태동산업 사무실이 중앙동에 있다는군.”
그러자 오재갑도 함께 나섰다.
“저도 같이 갑시다.”
“자네도?
“연안 실습을 해 보니, 국내 사정이 녹록지 않더라고요. 치어까지 씨가 말랐던데. 저도 나름 손발을 맞춰 보았으니 가서 읍소하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좋네. 자네가 함께라면 더 든든할 거 같군.”
내친김에 강태준은 오재갑과 함께 중앙동에 있는 태동산업 부산사무소로 향했다.
부산사무소는 영도다리가 건너다보이는 자갈치 시장 언저리에 있었다.
태동산업 사무실은 몇 사람의 직원들이 바삐 오가는 가운데 활기찬 분위기였다. 회사 소속선인 지평호를 대양으로 출어하기 전 시험 조업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기 때문. 영도대교 가까이 안벽에 정박 중인 지평호 갑판으로는 쌀이며 김치 등 선원들이 항해할 동안 먹을 주 부식과 선용품이 끊임없이 선적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오재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안이 있나. 정면돌파가 최고지.”
선원과라고 적힌 팻말이 늘어뜨린 책상 앞으로 간 강태준은 무슨 서류인가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지평호 출항과 관련해서 선원으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선원과 직원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원서를 제출하러 왔다고요?”
“지평호 선원들을 뽑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늘 이 회사를 찾아온 것은 그 배에 승선하기 위해섭니다.”
그제야 직원이 놀란 듯 강태준을 바라보다니 다시 말했다.
“많이 늦었습니다. 벌써 선원 구성이 끝났거든요. 이미 다 통보되었습니다.”
“아니 공시한 지가 언제인데 벌써 인원 구성이 끝납니까?”
기막혀하는 오재갑의 반론에 직원이 말했다.
“시험 조업을 하는데 라인업 정도야 뽑아 두는 거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사업은 정부도 주목하는 사업입니다. 아쉽지만 버스는 떠났어요.”
“안 됩니다. 저희는 지평호를 꼭 타야 합니다.”
“아니 벌써 끝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강태준은 물러서지 않고 가져온 서류를 펴 보이며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저희는 지평호 같은 최신 배를 타기 위해 불철주야 공부를 했고, 오늘 같은 날이 오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강태준이 내밀자 부득이 인사과 직원은 강태준이 내민 서류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한국 수산대 교무처가 발급한 재학증명서와 성적표였다.
경남고 졸업. 한국 수산 대학 어로학과 4학년 졸업예정자
전남농고 졸업, 한국 수산 대학 어로학과 3학년 졸업예정자 (재갑이는 그냥 꿇지 않아서 3년 연하다.)
그 대목까지 읽은 직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 분 다 아직 졸업 전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원 자격상 결격사유는 아니잖습니까? 무엇보다 졸업하고 나면 지평호는 벌써 출항하고 없을 테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만한 성적이라면 얼마든지 수산고나 해무청 같은 최고 직장을 골라 갈 수 있을 텐데요?”
다시금 성적표를 들여다본 직원은 이해가 어렵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강태준과 오재갑의 학업성적이 극히 우수했기 때문. 올 A의 향연에 말투가 누그러진 직원이 점잖게 타일렀다.
“학업성적은 좋지만 원양어업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는 잘 모르시나 보군요, 최소 6개월은 바다만 봐야 하는 직업이에요. 젊은 혈기에 무모한 짓은 삼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해는 위험한 곳이고, 가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릅니다. 굳이 승선을 원하신다면 연근해 조업 경험부터 착실히 쌓고 원양어선을 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디서나 위험은 상존하는 법이죠. 첨부터 원양어선을 타나 근해 조업을 하나 뱃일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건 좀 제 권한 밖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이번 한 번만 기회는 아닐 텐데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신지.”
“그렇다면 책임자분께 한번 이야기라도 넣어 주십시오.”
“어이, 참. 이게 안 된다니까요?”
발뺌하던 인사과 직원이 난감해하자,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맞는 말이야. 의지는 가상하다만 이미 선원 구성은 끝났네. 받아 주기 어렵겠군…….”
백발이 성성한 남자의 등장에 강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