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납기 계약
문제는 이 진압을 맡은 세력이 다름 아닌 그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KKK단에 준하는 막장 단체라고까지 불렸던 서북청년단은 집단 학살, 방화 약탈을 자행하며 온 제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좌익 세력과의 게릴라전이 반복되면서 무려 8년에 가까운 기간 섬에서는 내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죽은 군경과 민간인만 1만 명. 피해자만 6~7만 명. 실종자는 3,000여 명에 달했다. 반삼평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좌익 세력들은 말소되었지만, 그때 일본으로 도주하거나 잡혀 죽은 사람들도 많네. 산간마을에 사는 김가네도 그렇고, 사라진 도공들이 한둘이 아니지. 덕분에 그간 옹기를 팔며 쌓았던 기반이 완전히 박살이 났지.”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래도 선생님 같은 분이 명맥을 이으셔서 다행입니다.”
“나 같은 늙은이야 뭐. 이게 평생 해 온 업인데 그만둘 수 있나. 이제는 도공이 되고 싶은 사람도 별로 안 남았네.”
“그래도 제주 옹기 하면 알아주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겠죠.”
“글쎄, 그건 좀 너무 낙관적인 생각 아니겠나? 이걸 보면 생각도 좀 달라질 텐데 말일세.”
반삼평이 보여 준 물건은 붉은색의 토기로 붉은 빛깔에 매끄러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옹기 두 개를 연이어 보여 주며 반삼평이 넌지시 물었다.
“이거, 차이점을 알겠나?”
“꽤 비슷하긴 하군요. 오른쪽이 발색이 좀 환한 것을 빼면.”
“근데 이 오른쪽은 납유 용기일세. 왼쪽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회유 옹기고 왼쪽을 보고 흉내 낸 거지.”
오재갑이 꺼림칙한 어조로 물었다.
“납유 용기라면 중금속이 들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런 걸 광명단 용기라고 부르는데 보기엔 발색도 좋고 예쁘지만, 납 성분이 있어서 몸에 안 좋아. 게다가 재질 자체가 산에 약해서 발효 식품을 저장하기에도 부적합하지. 기공을 납이 막아 옹기가 숨을 못 쉬거든. 그래서 장을 담가도 제맛을 내기도 힘들고, 저장 능력도 약해서 기능도 별로일세. 하지만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싸지.”
“심각하군요. 이게 쉽게 구분이 가능합니까?”
그러자 반삼평은 대답 대신 옹기 위쪽의 입을 퉁퉁 때렸다. 특이하게도 맑은 소리를 내는 회유 용기와 달리 납유 용기는 쇳소리가 나지 않고 잠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봐 봐. 소리가 맑지 않지?”
“앗, 정말이네요.”
“저온에서 구워서 그래. 그런데 문제는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걸세. 종래 회유 옹기는 고온 소성을 하기 때문에 연료비가 몇 배나 더 들지만 납유 옹기는 900℃ 전후에 소성 가능해서 값이 헐하거든. 게다가 화목 말고 값싼 유연탄으로도 생산할 수 있으니 가성비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셈이지. 그래서 요새 이런 회유 용기를 만드는 곳은 극히 드물어.”
“아, 그래서…… 부산에 좋은 옹기가 많지 않았군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육안만으로는 구분이 어려우니 속여 파는 거 아니겠나. 게다가 양은 냄비처럼 대체재까지 나오니 굳이 옹기를 고집할 이유가 적어지는 거지.”
그야말로 상술이다. 쓴웃음을 짓던 반삼평이 다시 물었다.
“시대의 흐름이 야속하지. 옛날에는 허벅 정도는 만들어야 제대로 도공 행세를 했는데, 이제는 무늬만 장인인 놈들이 많아졌으니 말이야. 그래서 자네는 무슨 대단한 걸 구한다고 이 먼 오지까지 왔나? 옹기 말고도 좋은 대체재가 많은데 말이야.”
“그래도 통기성 좋은 발효 용기가 필요해서요. 사실 저희 쪽에서 식품사업을 하는 중이라 품질 좋은 옹기가 대량으로 필요하거든요.”
“식품사업?”
강태준의 이야기를 들은 반삼평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래서야 가성비가 안 날 텐데. 다시 말하지만 회유 용기는 값이 비싸. 굳이 옹기 정돈 싼 걸로 써도 되지 않나? 사람들이야 어차피 모를 텐데 말이야. 중금속이라고 하지만 용출되어 나오는 액은 소량일세. 게다가 아직 딱히 규제 같은 것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존심 문제죠.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몸에 안 좋다는 걸 알고도 외면한다는 건 상인이기 이전에 인간의 도리에 반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좋은 상품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알아주지 않겠습니까?”
“허허. 젊은 친구가 생각이 깊군. 창간부터 함 둘러보겠나?”
아까보다 목소리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이 아까 말은 그저 떠본 모양이었다. 반삼평 노인이 안내한 곳은 독이 가득 담긴 창간으로 건조된 날소지를 잿물칠에 두벌 건조하거나 가마 재임할 때까지 저장용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바삭거리는 모랫바닥을 밟으며 실내로 들어가니 서늘한 가운데 과연 건조 중인 옹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각양각색 개성을 뽐내는 옹기들의 모습에 강태준이 찬탄을 흘렸다.
“이야, 이걸 다 언제 만드셨습니까?”
“먹고 배운 게 이거뿐인데 놀아서 뭣 하나? 그냥 꾸역꾸역 만들어 놔야지. 시간 날 때 짬짬이 만들어 놓다 보니 이렇게 커졌군.”
안쪽으로 들어가니 작업이 끝난 완성품들이 보인다. 창고 벽 뒤로는 반 벽으로 비를 가렸고, 위편은 통풍이 잘되도록 구멍이 나 있었다. 일부는 장을 직접 담가 사용하는 중인지, 공기 사이로 은은한 향이 배어 나오는 것도 있었다.
강태준의 눈에 뜨인 것은 터부룩하게 배가 나온 형태의 허벅이었다. 전통적인 모양의 항아리 어깨에 달무리 같은 색다른 띠가 있고 표면에 흰 소금쩍이 일어나 있는 것이 실용적으로 보였다.
“이게 좋아 보이는군요.”
“보는 눈이 있군. 소금쩍이 적당히 끼는 것은 통기성이 적당한 옹기란 의미지. 이런 데 장을 담그면 장맛이 달아져.”
여러 옹기를 살펴보았지만, 더 마음에 드는 물건은 없었다.
“그래. 뭘 기본형으로 할지 결정은 내렸나?”
“네. 아까 본 허벅이 좋아 보이네요. 아까 거는 사이즈가 좀 작으니 크기는 1.5배 정도 큰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 손에 감싸 안을 정도 크기로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양은 얼마나 필요한가?
“다다익선입니다. 일단 1차 물량은 2천 개 정도 발주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생각보다 많은 물량에 반삼평의 표정이 달라졌다.
“허허, 처음부터 2,000개라 통이 크시군. 사업이 규모가 좀 있나 보이?”
“뭐, 아직은요. 차차 넓혀 가는 중입니다.”
“흠…… 큰 고객이 찾아와서 기분이 좋지만 아까 그 물건은 가격이 좀 나가네…… 아시다시피 애초에 원재료 자체가 구하기 힘든 물건이거든. 가마 크기를 고려하면 한 번에 구울 수 있는 개수도 적고. 그래서 한 개에 적어도 삼백 환 정도는 받아야 할 거 같은데…… 감당할 수 있겠나?”
삼백 환이라면 2,000개에 무려 60만 환 아닌가. 옹깃값으로 치면 절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꽤 금액이 나가는군요. 깎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포장이랑 운반은 저희 쪽에서 부담할 수 있습니다”
“흠…… 정 그렇다면야 한 가지 조건만 받아 준다면 반값에 대줄 수도 있네.”
“그게 뭡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점례 저 아이 좀 맡아 줄 수 있겠나?”
“아니, 제가 말입니까?”
뜻밖의 부탁에 강태준은 깜짝 놀랐다.
“아이를 맡아 달라니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 저 어린 애가 이런 촌 동네에서 평생 썩을 수야 없잖은가. 이곳은 마땅히 배울 것도 없고, 여기보다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일면식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네. 최소한 여기서 하는 일 없이 노는 건달 놈팽이들과는 다르지 않겠나? 말본새 하니 꽤 배운 몸인 것도 같고 말이야.”
“하지만 어르신, 전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몸입니다. 게다가 험한 일 하는 뱃놈이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에게 손녀를 맡기시다니요.”
“나도 충분히 숙고해서 하는 말일세. 어린애가 여기 있어 봐야 뭐 하겠나? 늙은이 뒷수발이나 들면서 고생만 하겠지. 부산에 가서 지 또래 친구들도 만나고 학교도 다녀야지.”
“절 뭘 믿고 그렇게 신뢰하십니까?”
“허허. 자네를 믿는 게 아니라 돈을 믿는 걸세. 강 사장과 나는 거래로 엮인 사이 아닌가. 30만 환 정도라면, 아이 하나 정도 맡을 양육비론 충분히 남는 장사 아닐까 생각하는데 향후 거래에도 서로 신뢰가 쌓일 테고 말이야. 어차피 이번 거래 한 번만 하고 퉁 칠 건 아니잖나?”
“흠…….”
“공짜로 맡아 달라는 건 아닐세. 제 앞가림은 제가 하는 아이니 손이 많이 가진 않을 거야. 딱 중등학교 졸업까지만 후견인이 되어 주면 좋겠네. 그 뒤엔 자립할 수 있으니. 애초에 난 여길 떠날 수 없는 몸이니 말이야.”
평생 일하던 일터를 떠나 봐야 뒷방 늙은이밖에 더 되겠는가. 강태준은 그 심정을 이해했다.
“흠…… 갑작스런 제안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일단은 저보다는 당사자인 손녀분의 생각이 더 중요할 것 같은데요.”
“뭐. 그거야 내가 잘 설득하겠네. 똑똑한 아이니 내 말을 잘 알아들을 걸세.”
“하, 좋습니다. 손녀분 생각이 확고하다면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물량은 제대로 챙겨 주셔야 합니다.”
“그야 물론일세. 물건은 이제부터 만들어 보겠네. 재료도 공수해 와야 하고 사람도 뽑아야 하니 서너 달 정도는 걸릴 거야.”
결국, 강태준은 점례와 함께 귀갓길에 올랐다. 점례 역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촌구석에 처박혀 답답하던 찰나에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옹기를 사러 갔다 웬 정체 모를 여자아이 하나가 딸려 오게 되자 광필이의 표정이 볼 만해졌다.
“아니, 성님 그래서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를 덥석 받아 온 거요?”
“어쩔 수 없잖나? 어차피 재갑이도 나가는 마당에 방 비우지 않아 좋지.”
“나참. 형님도 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무슨 손녀까지 책임을 지고 그러십니까. 게다가 총각댁에 여자아이라니 좀 남사스럽지 않습니까.”
“뭘 그렇게 까칠하게 그래. 그냥 객식구 하나 받는다 치는 거지.”
“그래도. 허.”
그러자 아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점례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거, 광필이 아재. 아재나 지나 비슷한 처진 거 같은데유?”
“뭐?”
“할부지가 지를 공짜로 맡긴 것도 아니잖슴까. 광필 아재도 태준 오라버니 집에 얹혀사는 처지 아니에유? 같은 처지에 너무 괄시하지 맙시다유.”
“허허…… 뭐라고? 허허. 아재라고?”
광필이가 헛웃음을 짓자 재갑이가 흡족한 듯 옆에서 대꾸했다.
“거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러게요. 광필 형님. 전혀 틀린 말은 아니네.”
“아니, 니들은? 임마 니들 누구 편이야?”
춘삼이까지 동조하는 통에 어이가 없어진 광필이. 점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태준 오라버님 시킬 거 있으면 말씀만 하세유. 지 밥도 빨래도 잘 하유. 우물물도 잘 긷고요.”
“그런 잡일 시킬 생각 없으니 염려 마라. 식모 구하는 거 아니니까. 일단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뭍에 가서 전학할 학교부터 알아보자꾸나.”
“학교요?”
“그래, 네 또래 애들은 당연히 학교에 가야지. 할아버님이 특별히 부탁하셨다.”
“와아. 그거 정말이에유?”
눈이 빤짝이는 것이 꽤 기대감이 큰 모양이다.
“그래 광필 오라비 말은 너무 맘에 두지 말거라. 저 녀석이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닌데, 말을 좀 함부로 하거든. 사실 좀 쉬려고 눈치 부리다 일찍 귀가하게 되니, 빈정이 상해서 그래.”
“니예. 지도 알아유. 세상에 나잇값 하는 어른만 있는 건 아니쥬. 그럼 지는 방해 안 되게 빨리 차에 탈께유.”
고개를 숙인 점례가 종종걸음으로 올라타자 멍해진 광필이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