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기사회생
“아니, 태준 형님, 웬일로 저희를 한꺼번에 불렀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방직사업 투자 건 때문에 불렀다. 사실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야.”
강태준이 간략하게 브리핑을 하자 모두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런…… 그래서 오성그룹 쪽이 천경을 노리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버티기만 하면 될 텐데. 천경물산이 넘어가지 않으려면 추가로 버틸 자금이 부족해.”
“지금 같은 상황에서 투자자라. 위험부담이 있군요.”
“그래. 나는 이번 기회만 넘기면 반드시 회복한다 장담해. 물론 강요는 아니야. 이건 어쩌면 기회기도 해. 가격 통제만 사라져도 최소한 2~3배는 남는 장사다.”
광필이의 설명이 이어지자 학생들은 침묵했다. 모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선뜻 투자를 결정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오재갑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태준 형님, 천경물산이 한때 잘 나가던 회사인 건 알지만. 현재 여건이 매우 좋지 않다는 건 사실입니다. 정말로 버틸 수 있을까요?”
“유동성 문제만 해결되면 반드시 오른다. 그건 장담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렇다면 투자하지요.”
그가 선뜻 품에서 내놓은 것은 내놓은 것은 누런빛을 띠는 봉투였다.
마치 미리 준비했다는 듯 두툼한 봉투를 확인한 강태준은 놀랐다.
안에 든 현금다발이 무려 50만 환에 달했던 것이다.
강태준이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건?”
“미리 천경 건으로 부르실 때부터 예상은 했습니다. 저희들 전 재산입니다.”
오재갑의 지분은 30프로 정도.
영도회 멤버들 역시 적게는 1만 환 많게는 3만 환씩 십시일반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설마. 광필이 너?”
사정을 눈치챈 강태준이 돌아보자 광필이가 들켰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에이. 형님. 제가 처음부터 말한 게 아닙니다. 뭐.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대충 눈치로 아는 거지.”
“맞습니다. 지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투자 기회를 잡았을 때 과감히 들어가야죠.”
“니들 괜찮겠냐?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제야 다들 똑같이 미소를 짓는 모습이 능글맞기 짝이 없다.
“위험부담 없는 투자가 어디 있습니까? 뭐 이번에 투자한 금액은 제 학자금 대용이긴 한데, 뭐 안 되면 잃어버린 셈 치지요. 그까이 꺼 한 학기 휴학하면 됩니다.”
“뭐 우리 어로학과의 희망이신 강 사장님께서 설마 홀랑 털어먹기야 하겠습니까. 좋은 건수 있으면 저도 좀 묻어가자고요.”
“모 아니면 도! 지도 형님만 믿고 갑니다. 뭐 걸리면 아버지한테 뒤지게 맞기 정도밖에 더하겠습니까?”
“저도 합쳤습니다. 술값 대용이니 부담가지지 마십쇼. 이참에 간 관리나 하지요.”
꼽사리로 낀 복만이에게 시선이 향하니 마지못해 5만 환을 내놓는 녀석.
강태준이 머리를 쥐어박자 격하게 항의하는 복만이었다.
“아코, 형님. 왜 때려요!”
“임마. 디지기 전에 다 내놓는 게 좋을걸?”
“아니 형님. 누구는 부탁이고 왜 저는 강요입니까?”
“니가 돈 벌어먹은 게 다 누구 덕인데? 어서 썩 못 내놔?”
“아니 무슨. 이런 깡패 같은 인간이 있나?”
복만이가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은 돈에 비상금을 합치자 얼추 100만 환이 넘었다. 정성택과 박 여사, 거기에 카발 최 사장까지 추가로 100만 환을 내놓았다. 그렇게 천경물산 지분을 가지고 있던 기존 동업자는 자리에서 빠졌고. 강태준이 총 지분의 20%를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천경물산은 간신히 자금 위기를 벗어났지만 몇 개월 동안 한일 간 경색 기조는 심해졌다.
원사 수입이 크게 위축되자 경제 상황은 일파만파로 악화되었다.
서문시장 포목상들을 비롯해 섬유 기업인들과 판매상들까지 들고일어나 해당 규약 철폐를 적극 요구하고 나섰고, 경북 직물 조합 이사장이던 최철호가 총대를 메고 서울에서 대정부 국회 로비활동을 벌여 수입규제 철폐 운동을 주도했다.
“섬유 수입을 재개하기 전에 당장 매국노인 상역 국장부터 갈아 치워야 하오!”
“왜 직물산업을 싹도 크기도 전에 죽이려고 하느냐!”
섬유산업을 죽이는 건 나라의 미래를 죽이는 일이라 격하게 항의했다.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시위로 인해 대구 전역이 들끓자 대구에 본적을 둔 이병구로서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저런 또라이놈들, 하루 종일 빽빽거리는 게 목 안 아프나. 왜 저렇게 난리 바가지야.”
“요사이 저런 놈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밥줄이 끊기게 생겼으니 벌써 망한 방직회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재무의 말에 쯧쯧 혀를 차는 이병구였다.
“멍청하긴. 그보다 천경물산 그놈들은 왜 아직도 안 망하고 있어? 사채시장 쪽에는 아직 소식이 없나?”
“그게 채권단을 구성해서, 방어 중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채권단에서 추가로 투입한 자금이 무려 300만 환이 넘는다고.”
“허허. 호구 납셨군. 무슨 오기로 그 돈을 쏟아부어. 그럼 미쓰이 놈들은?”
그 말에 슬쩍 눈치를 보던 이재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게…… 이원석 사장의 요청대로 몇 개월 더 유예를 주기로…….”
“야, 이런 또라이 같은 자식이. 그것도 해결 못 해? 대체 니는 하는 게 뭐야? 지금이 호재니 어떻게든 천경을 흔들어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하지만. 아버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엉덩이 붙이고 사장 흉내 내는 게 일이야? 설득이 안 되면 가서 사정해야지. 지금 당장 일본으로 뛰어가지 못해!”
“넵? 지금 일본으로요?”
“그래 아주 영원히 발령을 내줄까? 당장 못 꺼져?”
“아. 아닙니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도망치듯 달려가는 이재무.
꽁지가 빠지라 달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아들의 뒤를 보던 이병구가 한심하다는 듯 한탄을 흘렸다.
“멍청한 자식. 안 되겠어. 저 칠칠치 못한 자식을 믿고 무슨 대업을 할 수 있나.”
천경이 이렇게 오래 버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부흥부 장관에게 연락이라도 해서 대출자금 회수 압박을 강화해야 하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민하던 중 불쑥 들려오는 문소리.
생각을 방해받은 이병구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그것이 지금 대통령께서 특별 담화를…….”
“뭐?”
비서의 말에 서둘러 라디오를 켜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통령 긴급 조치로 이 시간부로 민생 안정과 경제 안정을 위해 한일 외교를 원상 복귀하고, 원활한 물류 활동을 위해 생필품 가격 규제를 해제하는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변 장관 이 자식이 감히 나랑 상의도 없이!! 최 비서, 최 비서 어디 있나?”
“옛! 예!!”
“변 장관한테 연락 넣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해명하라고!”
이거야말로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아닌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광분한 이병구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담화문을 뒤집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생필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자 이만승이 마침내 꼬리를 내린 것. 이만승은 담화를 발표하는 즉시 일본에 외무부 장관을 보내 억류자를 상호 석방하기로 하고, 그간의 경제 봉쇄를 완화하는 유화책을 내놓았고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이 일을 1면에 보도했다.
[외무부 변태영 장관 방일. 한일관계 해빙, 돌파구 가늠자 될 것.]
[한일 외교창구 재개, 경제 협의 급물살]
한일관계 회복을 희망했던 미국은 곧바로 이 결정을 환영했다. 물가 통제가 풀리며 나일론 원사값은 시장의 가격에 따라 규제 전인 1파운드당 80센트를 넘어 1파운드에 1달러 선까지 급등했다.
수입가격 통제가 풀리자, 그간 원사 수급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면방업계에서 원사 수급을 두고 물밑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 것이다.
덕분에 유동성 부족으로 하루하루 은행 여신 상환에 피 말리던 천경물산은 단박에 손해를 만회할 수 있었고, 이원석 또한 거래처와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지킬 수 있었다.
“이야, 태준 형님, 완전 대박이네요, 생사 값이 1달러가 넘는다니. 예전 동업자분들이 완전 대박 나셨겠는데요.”
정성택과 박 여사, 카발 최 사장이 함께 투자한 100만 환은 곱절이 넘는 250만 환이 되었다.
“그러게. 일부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어 근시안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큰 손해를 보는 법이지.”
생사를 1파운드에 40센트에 샀던 만큼 산술적으로만 해도 2.5배 이상이 뛰었다.
그야말로 한밑천 톡톡히 잡은 셈. 덕분에 이번에 크게 재미를 복만이 역시 한결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회복되는 걸까요? 형님.”
“아직은 아니지. 이 박사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일본 쪽도 아직은 배상금을 토할 생각이 없을 테니 말이야.”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한일 양국 간의 관계는 여전히 험악했다. 영토분쟁은 물론 배상 합의, 강제수용소 문제 등 관계 정상화에 필요한 과제가 산적해 있는 상태. 평화선 철폐를 묻는 일본 통신기자와의 회견에서 이만승은 딱 잘라 말했다.
“평화선은 그대로 유지될 거요. 작년 한 해 일본 선박이 클라크 라인을 침범한 건수가 50여 회가 넘소. 우리 쪽에 적발된 건수가 그 정도니, 실제 침범한 선박은 수백 척이 넘겠지. 기존의 제한선도 무시할 정도인데 그마저도 없다면 어찌 주권을 지키겠는가. 한국은 자주 독립국이므로 보호수역을 가져야 하오.”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평화선은 연합군은 6·25전쟁 당시 북괴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설치한 클라크라인이었다. 1953년 7월, 클라크라인은 휴전으로 폐지되었지만, 평화선은 영해의 방어선으로서 아직 유효력을 갖고 있었다.
미국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암묵적인 옹호 의사를 표출했고, 덕분에 평화선이 국제법상 불법적이라 주장하였던 일본도 강력하게 항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문을 보던 김광필이 투덜거렸다.
“확실히 이만승 그 영감탱이. 다른 건 몰라도 외교적 수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능구렁이지. 외교 말고 내치에도 그만치 신경을 써 준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그보다 저희는 이 길로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거의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아, 저기 보이는군.”
마중 나온 갈매기가 도착을 알리자, 낮게 깔린 지평선 위로 애월항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탑처럼 보이는 등대 뒤로 너른 돌바닥이 보이고, 그물코 같은 돌 염전이 깔려 있는 모습이다. 소금빌레라고 불리는 국내 유일의 빌레 염전이었다.
산업화가 덜 되어서일까. 방파제가 설치되기 전의 고색창연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의 분위기에 강태준은 묘한 향수를 느꼈다.
곧이어 큼직한 화물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자, 장화 신은 노동자들이 짐을 하역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정박한 배에서 화물이 내려지는 동안, 강태준 일행도 배표를 확인받고, 뭍에 내렸다.
“아따 이제 살겠구만. 간만에 여행 온 기분도 나네, 형님, 이제 우짜실 거요?”
“일단 약속했던 물량 배송부터 끝내야지. 풍미랑 오징어부터 내리고, 소금은 광필이랑 춘삼이 니들끼리 매입하도록 해. 나는 재갑이랑 구억리 쪽으로 갈 테니까.”
“구엄리요? 요 앞에 마을 말입니까?”
“아니, 서귀포 쪽 구억리 말이야 거기서 황 조장이 추천한 옹기 장인부터 만나 보려고. 부산 쪽 물건은 영 시원찮더군. 아무래도 발효 옹기를 따로 구해야 할 것 같아.”
혼자 영업을 뛰라는 말에 약간 걱정이 된 춘삼이가 눈치를 보았다.
“그럼 저희끼리 거래하란 말씀입니까?”
“뭐. 현장에서 그 정도 굴러먹었으면 너도 알 만큼은 알잖아. 이제는 스스로 영업도 뛰어 봐야지. 혹, 자신이 없는 거냐.”
“아닙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광필이 니는?”
“형님도 참. 저 모르슈? 굳이 그런 걸 왜 쓸데없이 질문하고 그러슈. 걱정 말고 형 일이나 잘하소.”
“그래라. 일 끝내고 동방여관에서 보자.”
“후딱 끝내고 오이소. 아니면 내 여비 순식간에 거덜 낼지도 모르니.”
“아이구. 그럼 춘삼아 잘 부탁한다. 어디 튈지 모르니 저놈 뻘짓 못 하게 잘 감시하고.”
“옙. 걱정 말고 다녀오십쇼. 준비 완료하고 기다리겠습니다.”
“거. 노파심은. 내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 고만하고 빨랑 가.”
더 듣기 싫다는 듯 광필이가 등을 떠민다. 등짐을 진 춘삼이가 쭐레쭐레 따라서는 모습에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춘삼이 녀석, 신나도 될 법한데 애어른이야. 애어른.”
“광필 형만 혼자 신났네요. 하긴 요새 좀 고생하긴 했죠. 힘쓸 일이 좀 많았습니까?”
“하긴 그래 그간 일만 죽도록 하고 못 쉬었으니 좀 풀어 주는 것도 좋겠지. 그보다 이번에 완성된 집은 어때? 살 만한가?”
그 말에 오재갑이 멋쩍게 고개를 저었다.
“하하, 처음 짓는 집이라 그런지 좀 어설픈 점이 많습니다. 착공 전 난방시설 보강을 깜빡하는 바람에 최 목수님이 아니셨다면 큰일 날 뻔했습죠. 덕분에 한 소리 좀 들었습니다.”
“그 양반 성질은 좀 불같은데 은근 정이 많은 양반이지.”
“네네.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신 덕분에 주택공사 기간이 많이 절약되었습니다. 대문 앞에 멋들어진 명패도 만들어 달아 주셨더군요. 지가 다 죄송하더이다.”
“암튼 재갑이 자네가 나가면 집구석이 허전해지겠어. 덕배 녀석이 섭섭해하겠어. 많이 따랐던 걸로 아는데 말이야.”
“하하.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뭘요.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자주 와. 밑반찬 좀 챙겨 가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던 둘은 트럭을 몰며 대정읍으로 향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