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채권단 구성
처음 듣는 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채권단?”
“채권단이라니 그게 뭔가?”
이 당시에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사람들에 강태준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여러 채권자가 각각 채권을 회수하려면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낭비가 심하지 않습니까. 채권자 간 공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고. 차라리 채권자 대표랑 총무를 선임해서 천경물산과 협상하는 편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흠…… 대표 선정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게 확실히 나을지도 모르겠군.”
약간 누그러진 사람들이 동의하는 기색을 보이자 강태준이 말을 이었다.
“법원으로부터 집행권원을 부여받거나 채권 추심을 하려고 해도 대표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액수는 다르지만, 다들 비슷한 입장이니 잡음 없이 채권을 회수하려면 보조를 맞춰야지요. 가능하면 부도 전에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
“그럼 자자. 솔직하게 말씀들 하십쇼! 굳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지금 나가셔도 좋고요.”
광필이의 호언에도 사람들은 눈치만 볼 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략 반 이상 넘어왔다고 생각한 강태준이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럼 대부분 여기 계신 분들은 동의한 걸로 간주하지요. 다만 채권단을 구성하려면 피해자 인원과 피해 금액부터 확인되어야 하니.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오는 13일 영도 국민학교 강당에서 채권자 모임을 가질 생각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다만 출석 시엔 채권자임을 증명하는 서류와 위임자에겐 위임장과 신원 증명서를 구비하셔야 합니다.”
순한 양처럼 변한 채권자들은 안내에 따라 채권단 가입 서류에 순서대로 이름과 주소지를 적고 갔다.
위기를 넘긴 이원석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시하자 강태준이 안면 근육을 풀었다.
“큰일 날 뻔했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고맙네. 근데 이 친구들은 누군가? 다들 체격들이 건장하구먼.”
“저희 학교 후배들입니다. 영도회라고 같은 동호회 회원들인데 경비 인원이 줄었다 하여 맡긴 원사 재고를 운반하려고 왔지요. 그런데 시기적으로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그런데 채권단이라니 자네가 나설 생각인가?”
“일단은 급한 불을 꺼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신 이 사장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사흘 후, 오후 2시 영도 국민학교 대강당.
천경물산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채권단 회의가 진행됐다.
참석한 인원은 무려 백여 명.
빼곡히 들어선 얼굴들에서 스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무거운 분위기 속 철제 의자에 앉은 강태준이 입을 열었다.
“자자. 오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회의의 목적은 천경물산에 대한 채권자 대표를 선출하고 대응 방향을 정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제3 채권 인수대금에 대한 일괄 가압류 문제와 시위 등 기타 대응 문제도 논의할 계획입니다. 그전에 지금 천경물산의 사정이 어떠한지 사정을 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천경물산의 재무 상태에 대한 기나긴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또렷하게 눈을 뜨고 집중한 사람들을 향해 강태준이 덧붙였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현재 천경물산은 자산 총액이 1천7백만 환. 부채가 2천5백만 환의 부채 초과 상태입니다. 현재 6달 내 갚아야 할 거래 어음은 200만 환, 미수채권은 130만 환에 달하며 은행 융자 400만 환을 채무로 끼고 있습니다. 파산할 경우에는 자금 회수가 더욱 지난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류 창고에 있는 원사와 매장 재고 등을 합쳤으면 순자산이 더 많지 않소?”
“물론 실제 판매 금액과는 차이가 있겠죠. 하지만 나일론 및 기타 원사의 총재고를 현재가로 환산하면 300만 환 규모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부동산을 처분하려고 해도 감가상각비와 유찰 시 가격 하락을 고려하면 회수 가능 금액은 훨씬 낮아질 겁니다. 퇴직금을 비롯한 임금 채무를 고려하면 회수 가능한 개인별 채권액은 매우 적습니다.”
“으음…….”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파산 시 자산을 모두 정리해도 채권액을 충당하기 어렵다는 말에 모두 심각한 기색이다. 그 말에 나이가 지긋해 뵈는 채권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거기 천경물산 관계자 입장을 들어 보고 싶군. 변명할 말은 있소?”
“경제 사정이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투자위험을 경시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합니다. 하지만 저희 천경물산은 올해를 제외하고 단 한해도 적자를 보지 않은 건실한 회사였습니다. 현재의 규제가 해소되면 충분히 회생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채권단 회의에 참석한 이원준 전무가 고개를 숙이며 읍소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채권자들도 고민이 깊어졌다. 천경물산의 투자자들 대부분은 이원석과 이해관계인들로 이원준과 한 번쯤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상황의 어려움을 떠나 그런 모습이 딱해 보이기도 한 것이다.
흔들리는 모습에 강태준이 다시 말했다.
“회생에 필요한 실무단은 별도로 꾸릴 예정이지만, 저희 백경 식품 공업사 측에서는 채권의 회수가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감안해 천경물산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채권을 정리하고 싶은 분들께서도 선택권이 있는 것이 합리적인 만큼, 오늘 저희 회사에서 채권을 6할 할인한 가격에 즉시 매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농담하나? 지금 채권을 4할 가격에 사겠다고?”
“6할도 아니고, 고작 4할이라니 그건 너무 적은 금액이지 않은가?”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반응에도 강태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 상황이 한시적이라고 판단해 보류를 결정했지만, 현재 지출 가능한 금액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채권을 정리하고 떠나실지, 여기서 변제를 유예하고 회생에 동참할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그럼 30분간 논의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집단별로 모인 채권자들의 의견 대립이 격렬했다. 회사를 정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채권을 회수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주먹구구식 청산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격하게 대립했다.
“금융 관계 채무자들이 차례로 법적 조치를 취하는 중인데 천경이 어떻게 살아난다는 말이요? 천경물산의 회생은 어렵소이다. 지금이라도 손을 터는 방법밖에는 없소이다.”
“재고를 지금 판매한다고 제값을 받을 수 있나? 청산에 들어가도 회수 가능한 금액이 없다면 의미가 없소. 가격이 반등할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회수할 자산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니 빨리 빚을 갚거나 파산 선언을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격렬한 토론이 오고 가길 십수 분. 마침내 시간 경과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자자. 모두 주목! 생각이 끝나셨다면 이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어음 판매를 결정하셨다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결국, 어음 할인에 동참한 인원은 8할. 다들 사태가 얼마나 장기화될지 예상할 수 없는 만큼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엇보다 한일관계가 풀린다고 해도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천경물산의 어음은 휴짓조각이 되는 만큼 손해를 보더라도 파는 게 낫다는 편이 더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의 예상과 달리 2할 정도는 채권판매에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잔류한 것은 총대를 맨 남자 덕분이었다.
“채권을 넘기지 않으시겠다고요?”
“그렇소. 이 사태만 어떻게든 극복하면 반등의 여지가 있지 않겠소? 우리도 천경물산이 아직 여력이 있다고 믿고 있소. 회생에 동참하고 싶소이다.”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것이 꽤 잘생겼지만, 왜인지 모르게 위험한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한쪽 손에만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흠. 후회하실지도 모르는데 정말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손실액을 따진다면 강 사장부터 똥줄이 타는 게 합리적이겠지 그런데 이렇게 백기사를 자처하는 것을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겠소?”
은근슬쩍 눈을 흘기는 것이 꽤 여유로워 보인다.
비슷한 생각을 해서일까? 배짱을 튕기는 신선하다는 생각이 드는 강태준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니 감사하군요. 그런데 저번 공장 파동 때는 못 뵈었던 분 같은데?”
“하하. 예리하시군. 원래는 나 말고 주인은 따로 있지. 나는 위임자 자격으로 참석했수다. 하지만 이렇게 채권 양도 각서를 받은 마당이니만큼 주인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럼 추후 행동 방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와 같이 움직이시겠습니까?”
“뭐 그게 깔끔하지 않겠소? 뭐 이런 걸로 주도권 싸움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으니까 협상과 관련된 권한은 전부 위임하겠소.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동지군요. 성명이.”
“팽호상이요. 위임장은 여기 있으니 나는 이만…….”
서류를 내려놓은 팽호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뒤따르는 부하들. 강태준이 서둘러 붙잡았다.
“그냥 가십니까? 원하신다면 총무 자리라도 내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니, 귀찮은 건 사양일세. 나는 당분간 없는 셈 치고. 맘대로 하시게나. 나중에 결과만 통보해 주소.”
홀연 듯 사라지는 모습이 쿨하기 짝이 없다.
걸음걸이를 주시하던 광필이가 날 선 어조로 말했다.
“저거 분위기가 예삿놈이 아닌데요. 칼밥 좀 먹은 거 같은데, 주의해야 할 듯싶습니다.”
“나도 알아. 뭐 그래도 쓸데없이 훈수 두지 않고, 알아서 빠져 주겠다니 고맙지 않나?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인간이군.”
“그래도.”
인상을 찌푸리는 광필이에 강태준이 슬쩍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소리. 우리 든든한 광필이가 있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안 그래?”
“에이, 형님,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입니다.”
상대가 어떤 놈이든 간에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지 않나. 원래 돈만 잘 벌어 주면 상관없다.
채권자들 문제가 대략 해결되자 한시름 놓은 이원석이 감사를 표했다.
“휴우…… 고맙네. 자네 덕에 겨우 살았어.”
“뭐 그쪽이 협력해 주신 덕이니 뭐 쌤쌤이죠. 그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정이 꽤 괜찮았던 걸로 아는데요?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사안입니까?”
이전까지 버틸 여력이 충분해 보였던 만큼 채권자들의 배신은 의외였던 것.
그러자 이원석이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언론들 때문이지 근래 주류 신문들을 비롯해 여러 경제 잡지에서 우리 회사의 파산을 점치고 있네. 마치 망하라고 고사라도 분위기랄까. 아마도 오성 쪽 사주를 받은 것 같네.”
“허. 그럼 지금 곧 만기가 도래 예정인 채권이 어느 정도입니까?
“미도래 어음이 150만 환 이상이긴 하지만, 거래 미수금과 상계하면 대략 100만 환 정도일세.”
말을 하면서도 미미하게 흔들리는 눈빛. 위화감을 눈치챈 강태준이 얼굴을 굳혔다.
“저희랑 한배를 타셨으면 제대로 말씀을 주셔야죠.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로서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미수금 채권 가운데 회수 불가능한 금액이 있을 텐데 말이죠.”
“하. 자네는 도저히 속일 수야 없군. 정확히는 한 달 내 만기로 돌아오는 채권이 200만 환이야.”
“200만 환. 꽤 크군요. 천하의 천경물산이 이 정도까지 몰리다니. 다른 업체들도 사정이 비슷합니까?”
“오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정이 대동소이할 걸세. 오성이야 워낙 모기업이 탄탄한 만큼 버티는 데 문제가 없겠지만 국한이나 예성방직 같은 기업들도 본사 부지까지 담보로 내놓은 걸로 알아.”
강태준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 채권을 인수하는 데만도 벌써 60만 환을 써 버렸다. 추가로 동원 가능한 금액이 40만 환이니 아무리 긁어도 답이 없다.
“200만 환이라. 알았습니다. 제가 한번 힘을 써 보지요.”
“이봐. 추가로 200만 환일세. 지금 지출만도 상당한데 가능하겠나?”
“저 혼자 힘으로 힘들겠지만, 주변인이 있지 않습니까?”
강태준은 재갑이를 포함한 영도회 회원들을 온천동 사무실로 소환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