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나일론 투자
오성 물산.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오성그룹의 지주회사인 이곳은 종합 물류와 무역을 담당하는 오성의 모태이자 한국전쟁 이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곳이다.
공장 입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밀을 보관하는 거대한 사일로로. 외벽의 두께가 1.2m, 외경이 10m, 높이가 무려 60m에 달했다. 이 웅장한 구조물 옆엔 중형(1200t). 소형(200t) 사일로 3기가 나란히 서 있고,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 구조로 된 3층 건물에 사무실이 있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상생경영(相生經營)이라는 사훈이 적힌 곳.
그룹 총수인 이병구 앞에서 임원들의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증산 투자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하루 제당 생산 능력이 20톤에서 50톤으로 증가했습니다. 연내 일일 조업 생산 100톤으로 증설하여 하루 150톤 규모로 생산에 박차를 가할 예정입니다.”
“계획대로 순탄하군. 추가 증설 계획엔 차질이 없나. 외환 매입에 필요한 한화 확보 문제는? 실수요자 배정으로 우리가 받을 외환 총액이 줄어들었다고 하던데?”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상업은행 이성신 행장이 제당공장 건설 취지를 전폭적으로 찬동하여 추가 대출해 주기로 했습니다. 또한 외화 수급을 위해 동방 공업 통조림 공장을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아직 자금 면에서 여유가 있겠군. 지금보다 생산 케파(Capacity)를 2년 내 일일 생산량 250톤 규모로 증설토록 목표를 상향하도록 한다.”
이병구의 선언에 자리에 모인 임원들이 웅성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눈치를 보는 가운데 동생인 이명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부분은 재고해 주십시오. 사장님 현재 증설 속도도 국내 수요보다 생산 규모 확장이 충분히 빠른데 굳이 증설 속도를 높이는 건. 대규모 생산 시설이 놀게 되면 손해가 막심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경쟁에서 이기려면 투자에 인색해서는 안 돼. 국내 수요가 증가가 확실한데. 공급이 부족해 추가로 증설 계획을 짜면 이미 늦은 뒤일 테니 말이야.”
“그렇지만 수요 예측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금 경색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 추진 중인 모직이나 비료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다. 추가로 도입된 설비는 소맥분 생산으로 전용하면 되잖은가. 그렇게 하면 유휴시설 없이 충분히 비용 절감이 가능할 테고. 이참에 밀가루 판매 가격을 지금보다 1할 낮추어 공급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
“엣? 1할이나요? 그렇게까지 판매 단가를 낮추면 이익률이 크게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지금 제분 쪽 점유율이 답보 상태 아닌가? 가공 후 품질의 차이가 없으니 시장에서 경쟁 요소는 결국 공급가뿐이지. 밀가루의 정부 고시 가격과 시중 시세를 감안하면 판매가를 3할가량 낮추더라도 우리 오성은 손해를 보지 않아. 반대로 다른 회사들의 경우 설비 도입 과정에서 부담한 빚과 이자 부담을 고려할 경우 더 단가를 낮추기는 망설여지겠지.”
밀가루 제조 원가에서 원물인 맥의 비중은 70~80% 정도다. 밀가루 품질은 당시 밀가루 생산용 밀은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PLO 480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던 만큼 실질적인 원산지 품질의 차이가 없다시피 했다. 말을 듣던 이재무 상무가 크게 감탄했다.
“오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우리 회사의 경우 설비 원가를 조기 회수한 셈이니 제조 비용상 비교 우위가 있겠군요.”
“그래. 점유율 확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더라도 상관없다. 고작 1할의 단가를 내리는 정도로 다른 회사들의 설비 투자를 억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이득이 아니겠나?”
출혈경쟁을 강요할 경우 오성은 수익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버틸 여력이 충분하다. 일단은 현 시장 판매지분 상태를 고착화하기만 해도 경쟁자를 고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명천 역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탁월하신 혜안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책은 조속히 실행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하지. 그리고 이재무 상무, 아지노모토는 재고는 어떻게 되었나?”
“일단 대리점 쪽에 우선 배분했습니다만, 그 외 재고분은 고통 분담 차원에서 사원들이 한 박스씩 구매하도록 했습니다.”
“인건비와 판촉비는 어떻게 처리했나?”
“입점 업체 측에서 자발적으로 분담하기로 정했습니다.”
“잘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조미료 쪽에 투자할 필요가 있을 거 같군. 백경 같은 조그만 기업도 만드는데, 우리라고 조미료 정도는 못 만들까?”
“지금 당장은 유휴 인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연구개발을 하려면 추가 인력부터 확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직접 개발을 왜 하나. 기술제휴를 하면 되지.”
“제휴요? 하지만 지금 일본과 단교 상태 아닙니까?”
“이런 멍청한.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야. 제3 국인 싱가폴이나 홍콩 쪽에서 만나면 되잖나? 그쪽에도 사업부가 있으니. 어차피 좋든 싫든 천년만년 일본과 쇄국하고 지낼 순 없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일정 잡고 아지노모토 쪽과 접촉해 보게. 그쪽도 자의로 철수한 것은 아닐 테니 한국 시장에 미련이 남아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회의를 막 끝내려던 이병구가 임원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아차, 천경물산은 요새 어떤가? 재정상태가 안 좋은 걸로 아는데, 아직도 이원석이가 사채시장에 나타나지 않았나?”
“예. 어디서 급전을 공수해 온 모양인지 아직 별다른 신호는 없습니다.”
“허. 아직도 그럴 여력이 남았을 줄이야 이원석이가 그간 꽤 덕을 많이 쌓았나 보군. 혹 지원을 받았는지 알아보았나?”
“출입 인원이 줄어 내부사정을 알기가 힘듭니다. 아무래도 알아보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듯싶습니다.”
그 말에 이병구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이병구가 호통치듯 언성을 높였다.
“뭐야? 이런 칠칠치 못한 놈들을 봤나. 경쟁사 내부사정도 제때 몰라서야 어떻게 전략을 짜라는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쪽이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단축 조업에 직원들 무급 휴가까지 보냈으니, 아마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내가 너무 안일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망할 때를 기다려서야 다른 변수가 생길지도 몰라. 그래. 천경이랑 한일이랑 꽤 돈독한 사이라고 했지? 우리 쪽이 한일공업 쪽에 가진 미수금이 얼마나 되나?”
“현재로서는 한 150만 환 정도 됩니다.”
“한일공업 쪽에 압박을 넣어서 어음 회수하게 해. 그리고 천경물산과 관계된 회사 쪽에 만기를 독촉하도록. 시장에도 상황을 슬쩍 흘리라고.”
“예? 그러면?”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며칠 후, 천경물산. 한일공업사에서 최문병 전무가 찾아왔다.
“아니 갑자기 어음 연장이 어렵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안하네. 우리 쪽도 사정이 어려워. 오성에서 압박이 들어왔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성이라니?”
“나도 이렇게 말을 번복하게 된 것이 달갑지는 않네. 하지만 우리도 사정이 급하이. 이미 오성 쪽에서 어음 만기연장은 불가하니 은행에 지급 제시를 하겠다고 통보해 왔어. 자네도 알잖나 그놈들 얄짤없는 거.”
“하…… 그래서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일단 이번 달 만기 도래분 50만 환 정도 필요하네.”
“지금 저희 회사 상태가 어떤지 아시잖습니까. 50만 환이라니.”
이원석은 끝까지 만기 연장을 고려해 달라 물고 늘어졌지만, 원론적인 답변만 되돌아왔다. 서재일 전무가 자리를 뜨자 담배를 태우는 이원석.
이미 끊은 지 오래였지만, 오늘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짙은 연기의 꽃이 머리 위로 피어났다 사라진다. 짙은 연초 향이 코끝을 감돌았지만, 폐를 더럽히는 감각에 기분만 뭣 같아질 따름이었다. 담배를 비벼 끈 이원석 옆으로 동생이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휴우…… 일단 한일공업 쪽 밀린 미수금은 먼저 처리해 줘.”
“하지만 형님. 그렇게 되면 저희 쪽 주머니가 많이 가벼워집니다. 향후 운영자금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그간의 정황도 있고. 우리랑 최대한 의리를 지키려 하지 않았나? 최대한 긴축을 하는 수밖에.”
불가피하지만 이제는 버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조업에 필요한 최저인원을 제외하고 비상대기 인력으로 이원준을 비롯한 가족들만 남았다. 어떻게든 쥐어짜면 두어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었지만 문제는 다음 날부터였다.
사정은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
“약속어음 만기를 연장해 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건 약속과 다르잖습니까?”
“지급 제시일 내에 채무금을 갚지 않으면 조만간 가압류를 신청하겠다고요? 그런 무슨? 신 사장님. 신 사장님!”
폭풍처럼 몰려드는 채권자들의 독촉에 정신이 나갈 지경. 하루 종일 울리는 전화기에 업무가 마비되자 참다못한 이원준이 전화선을 빼놓기까지 했다. 완전히 지쳐 버린 이원준이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입니다. 만기어음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건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오성에서 손을 썼나 보군. 이병구 그 잡놈이 우릴 회사 집어삼키려구 수작질을 하는구먼.”
“빌어먹을 녀석. 이따위 추잡스러운 짓을.”
비열하긴 하지만 자금 회수로 압박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공격은 달리 없다. 문제는 딱히 방어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 이원준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던 찰나, 갑작스럽게 밖이 시끄러워졌다. 공장 밖으로 나와 보니, 몇 안 되는 직원과 경비원들이 필사적으로 사무실 안으로 돌진해 오는 사람들을 막고 있다.
“아, 이건 업무방해입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요.”
“씨팔, 사장 어딨어! 이원석이? 당장, 내 돈 내놔.”
“다들 진정들 하십쇼.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지금 내가 망하게 생겼는데 진정. 장난해?”
“다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지금은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한 달만 더 기다려 주시면…….”
“뭐 한 달? 그렇게 말한 지 벌써 넉 달째야. 누굴 호구로 아나? 당장 내놔!”
밀려드는 사람들은 다들 채권자들이었다. 채권자들의 분노가 고조되자, 어떻게든 달래려 애썼지만 생떼를 부리는 수십 명의 군중은 도무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쯤 돌아 버린 눈빛들이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것이 사무실 기물들을 죄다 때려 부술 기세였다.
실랑이를 벌이던 중 채권자 하나가 이원석의 넥타이를 휘어잡았다.
“컥!! 말로 하시고…… 차분하게 대화를!!”
“그래 이 자식아, 우리 한번 몸으로 대화를 나눠 보자고. 내 돈 내놔! 내 돈 어쩔 거야? 엉!
눈이 뒤집힌 채권자가 멱살을 잡자, 이원준이 서둘러 둘을 떼어 놓으려고 애썼다. 실랑이가 벌어지던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주먹에 안면을 맞고 나가떨어진 이원준. 그사이 목덜미가 조여진 이원석의 낯빛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다.
“사장님!!”
있는 힘껏 몸통 박치기를 하는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멱살잡이에서 풀려난 이원석. 하지만 이미 열 받을 대로 열 받은 사람들은 눈이 뒤집힌 모습이었다. 때마침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 한 대가 나타나더니 일행을 갑자기 비추었다.
“뭐야?”
빠따를 들고 내리는 덩치들에 기겁한 채권자들. 트럭에서 내린 인원들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인상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덩치가 크다는 말이 어울린다.
건장한 체격에 어깨가 떡 벌어진 덩치들이 주변을 둘러싸자 채권자들은 불안해진 눈을 뒤룩거렸다. 빠따를 목 뒤로 올린 채, 휘파람을 불던 광필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모. 이럴 줄 알고 오긴 했는데. 완전히 기대 이상이구먼.”
개중 그나마 깡이 있는 녀석이 용기를 내어 꾸짖었다.
“뭐야 니들 뭐야? 어디서 온 깡패 쉐리들이야?”
“지우들도 채권자요. 하는 짓 보면 깡패는 되려 댁들 같은데.”
“뭐, 뭐라고? 지금 뭐라켔나?”
“지금 하는 꼬라지들 보시게. 채무자 패서 돈 나오나? 시정잡배들도 아니고.”
광필이의 꾸짖음에 할 말이 없어진 사람들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부축을 받는 이원석의 꼴을 보니 옷이 찢어지고, 입술이 부르튼 모습이 말이 아니었던 것. 광필이가 배트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거기 아자씨. 얼마 물렸소?”
“나?”
“그래요. 아자씨. 거기 아자씨 말고 어딨다고. 물린 돈이 얼마냐고?”
“그게…… 5만 환 정도일세.”
“씁. 고작 그 정도 빚으로 이게 무슨 짓거리요. 우들은 무려 100만 환이여. 우들보다 더 물린 인간들 혹 있소? 있으면 뭐, 말을 하던가?”
눈알을 부라리며 돌아보는 모습에 절로 위축되는 사람들.
빠따로 바닥을 툭툭 치는 행동에 옆에 있던 거한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공포심을 자극했다.
“거. 그만, 그만해라. 그만하면 되었다.”
뒤늦게 앞에 나온 강태준이 주위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자자. 소란이 커져서 죄송합니다. 현장 조사차 방문했는데 마침 이렇게들 모여 계시다니 덕분에 신문에 공고할 수고는 덜었군요.”
“아니, 신문 공고라니 뭔 소리고?”
“뭐긴 뭡니까. 채권단 구성을 하려면 공고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