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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57화 (57/361)

57화 천경물산

저녁 8시. 사람들로 드문드문한 자리.

바둑판을 앞에 둔 이원석은 자리에 홀로 앉은 채 골몰해 있다. 혼자서 수를 복기하던 이원석이 나직하게 한탄을 내뱉었다.

“이렇게 걸친 수에 붙여 버리면 당최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먼.”

혼잣말한다지만 사실 자조적인 소리. 최근의 계속되는 재정 문제가 발목을 잡은 와중 일본 수입 지사 사무실은 임대료가 비싼 도쿄도 신주쿠의 사무실을 지방으로 지바현으로 옮기고, 파견직원들을 어떻게든 안심시켰지만,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큰 무역상들이 줄줄이 주문 취소를 통보하는 와중 뇌라도 환기할 겸 이렇게 바둑판에 앉아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기호지세. 사업도 대국처럼 돌을 굴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곳으로 움직이는 손.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서는 흑을 두면 안 되지 않습니까? 백이 상변을 먹으면 중앙의 흑돌이 들뜨게 되니까요.”

강태준의 훈수에 짐짓 정신을 차린 이원석이 다시 물었다.

“아, 그런가? 그럼 우변으로 공격하면?”

“그건 백의 함정에 빠지는 셈이죠. 그러면 귀가 떨어지는 셈이죠.”

“흠.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겠나?”

강태준이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그가 포석을 복기하며 말했다.

“상대가 붙여 올 때는 포석을 잘 챙겨야 큰 구멍이 나지 않습니다. 위로 젖히고 장기전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답이지요.”

강태준이 시범을 보이듯 순서대로 돌을 놓았다.

바둑판 위를 보던 이원석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 그렇게 빠져나갈 수가 있었군.”

“별것 아닌 요령이죠. 한번 기억해 두면 대처하기 쉬울 겁니다. 그보다 누구 선객 있습니까? 마침 상대가 없어서 그런데.”

“없네. 이 늙은이랑 한판 두겠나?”

“사양하지 않지요.”

양자는 긴말 없이 시합을 시작했다. 말없이 바둑판 위에서 돌 놓는 소리만 울리기를 30분. 정적이 끝나고 순식간에 한 판이 끝났다. 두말할 것 없이 강태준의 압승이었다.

“이거 나도 어디 가서 바둑 좀 둔다는 소리 듣던 사람인데. 그쪽에는 쪽도 못 쓰겠군. 젊은 사람이 기력이 좋구만. 어디서 배웠나?

“취미로 독학했을 뿐입니다. 그럼 한 판 더 둘까요?”

“좋지.”

몇 판을 내리 졌지만 새로 보는 포석에 흥미를 느낀 듯한 이원석이다. 집중한 덕에 고민을 털어 버렸는지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즐거운 승부였네. 시간 되면 몇 수 더 지도해 줄 수 있겠나? 한동안은 이곳에 머물 텐데.”

“물론입니다. 그럼 언제 오십니까?”

“저녁 7시부터 10시 정도? 보게 되면 다시 두세.”

새로운 상대에 호승심을 느낀 건지, 아니면 머리를 식히기 위함인지 이원석은 몇 주간 바둑 교실에 계속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하게 바둑만 두는 정도로 끝났지만 몇 번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통성명도 나누고, 서로 잡담도 하면서 조금씩 친해진 둘.

나이는 무려 20살 이상 차이가 났지만 둘은 스스럼없이 친해졌다.

이해관계를 떠나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원석.

보기엔 바둑에 집중하는 듯했지만 생각은 다른 곳을 쫓는 듯, 계속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이원석이었다.

한참을 상념에 잠긴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강태준이 탁자를 두드렸다.

“저, 이 사장님 차례입니다.”

“아니 벌써?”

본능적으로 돌을 집던 이원석이 물끄러미 판세를 보더니 뭔가 깨달은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거 외통수로군. 언제부터 이랬지?”

“한참 전부터요.”

“이거, 나도 양반은 못 되네. 미안하이 사실 자꾸 잡생각이 나서 집중이 안 되더군. 이거 대국 중에 실례가 많았구만.”

“머리가 맑지 못하면 집중이 흐려지지요. 뭔가 고민하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이라. 많지. 오늘은 튼 거 같은데 시간 되면 혹 술이나 한잔하겠나?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구먼.”

“좋습니다. 저도 대충 여유는 있으니 말이죠.”

강태준은 못 이기는 척 함께 따라나섰다. 둘이 찾아간 곳은 어느 한 대폿집.

돼지껍데기가 자글자글 익어 가는 가운데, 싱싱한 관자와 삼겹살이 불판에서 익었다.

안주를 끼고 술잔이 돌아가고 나자, 슬슬 취기가 올라온 이원석에 강태준이 슬쩍 운을 떼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이제 와서 뭘 숨기겠나? 사실 사업이 잘 안 풀리는 중이야.”

“나일론 유통 문제 때문인가요?”

“그래 근래 수천만 어치 실값이 반토막 났네. 1파운드당 80센트에서 40센트로 말이야. 정부의 물가 통제로 미리 쟁여 둔 물건이 똥값이 되어 버렸으니 큰일이 아니겠나.”

“흠. 그래도 그간 꽤 재미를 봤을 텐데요. 유보금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까?

“그간 너무 공격적으로 투자한 게 문제였지.”

“그래도, 웬만큼 버티실 여력은 충분하지 않으세요?

“돌려 막기 하는 중일세. 하루하루 버티기가 버겁지.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다들 본색을 드러내더군.”

술에 취한 그가 벌게진 얼굴로 성토했다.

“오성과 회신, 광우사를 포함해 대부분의 유통사들이 손을 들어 버렸어. 정부의 경제 단교 조치를 무시하고 제품을 유통하려면 엄청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니 말이야.”

“그럼 몰린 주문을 취소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번 단교 조치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사유잖습니까. 일단은 주문한 물량부터 취소하고 나중에 수입을 재개하면 되지요.”

“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사정이 달라졌다고 주문을 맘대로 취소하면 누가 우릴 신뢰하겠나. 이 위기만 넘기면 어떻게든 반등할 수 있다고 설득했네. 다들 해 온 실적을 생각해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오판이었는지 영 반응이 안 좋더군.”

그는 쓰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예정대로 원사를 수입한 후에 사정이 악화되니 다들 말을 바꾸더군. 오늘도 동업자랑 대담을 했는데 면전에다 수출 오더를 찢으면서 모욕을 주더구먼. 항상 허허 웃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길길이 날뛰니 배신감이 장난이 아니더라고. 겨우 사정해서 틀어막기는 했는데 이번 주 내에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주총을 열어 경영권을 박탈할 거라 경고하더라고. 이번 일로 대구집까지 팔았는데 아직도 융통할 자금이 부족해.”

“거래업체들 쪽엔 사정을 타진해 봤습니까?”

“손해는 우리 쪽에서 짊어질 테니 몇 달만 편의를 봐달라고 했지. 이토츠와 마루베니에서는 다행히 손해를 분담하자고 말하더군. 한일교역에서도 말이야. 하지만 미쓰이 쪽은 원론적으로 굴더라고.”

“그쪽에서는 뭐랍니까?”

“사정은 정말 유감이나 약속은 약속이니 기한까지 꼭 미수금을 갚으라더군. 규정상 시간을 넉넉하게 주기 곤란하다고 말이야. 한일교역이 재개되면 충분히 벌충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안 들어 주더군.”

“흠. 그래서 물어 줘야 할 손해액이 그래서 총 얼맙니까?”

“80만 환 정도 되네.”

“80만 환이라 꽤 큰돈이네요. 만기까지 얼마 남았습니까?”

“이제 한 달 정도일세.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데 쉽지 않구먼. 정 안 되면, 직접 미쓰이 본사로 찾아가기라도 해서 담판을 지어야지.”

덤덤한 말투였지만 표정부터가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대안은 있습니까?”

“배 째라 드러눕는 것 말고 딱히 수가 있겠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0년이나 거래하는 와중에 한 번도 미수금 문제가 걸린 적이 없었는데, 아무리 거래 관계라도 이렇게까지 무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 감기에 걸렸는데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억울한 줄 아나. 결제일 상환을 미뤄 주지 않으면 부도가 나는 수밖에 없네. 그렇게 되면 농약이라도 먹고 콱 죽는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이원석으로서는 충분히 서운할 법도 했다. 미쓰이 쪽 한국사업부가 이렇게까지 커진 것은 이원석의 공이 컸다. 미쓰이가 출자해 세운 도요레이온이 경쟁사의 발흥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듀폰 물건을 수입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전적도 있었던 만큼, 과거의 신뢰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저버리는 행동에 분통이 터질 만도 한 것이다.

“재고를 처분하면 당장 급한 불은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량이면 몰라도 대량으로 매입할 업체가 없어. 거래 회사들에 의견을 타진해 봤지만, 우리 회사가 어렵다는 사실이 벌써 소문이 났는지 아무도 매입하려고 하지 않더군. 회사가 망하면 어차피 헐값에 공매로 나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심보인지. 아니면 어떻게 풀릴지 모르니 몸을 사리는 건지. 쥐고만 있어도 나중에 값이 오를 물건인데 마음이 아파.”

사업에서 불확실성에 기대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다른 업체들이야 언제 이 경색 기조가 풀리는 시점을 알 수 없으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이 강경 기조가 그리 오래 갈 수 없다는 걸 아는 강태준에게는 다시없는 기회다.

뜸을 들이던 강태준이 슬쩍 운을 띄웠다.

“그렇다면 제가 재고를 사는 건 어떻겠습니까?”

눈시울이 파르르 떨리는 이원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아니 자네가 말인가?”

“예. 저도 이 사장님께서 취급하는 제품에 좀 흥미가 가는군요. 한일관계 경색이 끝나거나 생필품 가격 규제가 풀리면 나일론 원사값이 분명 오르지 않겠습니까?”

“그건 장담할 수 있네. 하지만 그만한 물량을 당장 소화할 수 있겠나? 다시 말하지만, 소량 판매는 의미가 없어.”

“긴급 수혈에 유의미할 수준이라면 백만 환 어치는 어떻겠습니까?”

“그거 진심인가?”

“저는 빈말은 하지 않습니까. 재고량과 상태가 확실하다면 구매 의사가 있습니다. 제품 재고 확인은 바로 가능하겠습니까?”

“내일 당장이라도 가능하네.”

다음 날 안내된 천경물산 창고 안은 관리 직원 서넛을 제외하고는 썰렁한 상태였다. 재정 압박으로 인해 직원들 대부분이 휴가를 나간 상태라 관리자를 비롯한 최소 인원만 남긴 것.

하지만 깨끗이 정리된 창고 안에는 나일론 실이 통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드럼통을 열어 실타래 더미를 확인한 강태준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경물산답네요. 제품 상태는 확실하군요.”

“품질은 보증할 수 있다네. 나일론 원사는 다른 실처럼 좀이 먹거나 썩지도 않으니 보관만 잘하면 반영구적이지. 언제든지 가공해 팔 수 있다네.”

강태준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여유자금으로 융통할 수 있는 돈은 120만 환 정도.

“약속대로 100만 환을 투자할 테니 개중 50만 환 어치는 바로 현물로 받겠습니다. 지금 시세대로 1파운드 40센트입니다”

“정말인가? 그럼 나머지 절반은?”

“나머지 50만 환은 이자 없이, 회사 지분으로 받고 싶네요. 천경물산 투자자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지분으로 말인가?”

이 어려운 시절에 역으로 투자한다는 말에 믿기지 않는 듯 얼떨떨한 이원석이었다.

“그거 정말인가? 잘못하면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어.”

“하하. 그 정도 리스크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설마 아까워서는 아니시겠죠?”

“그럴 리가. 회사가 망하게 생긴 판에 그딴 지분이 대수겠나. 원하면 사장 자리도 줄 수 있네.”

그 말에 강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경영은 사장님이 하셔야죠. 상세한 투자 조건과 지분양도 범위는 서류화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 일단 법률 사무소로 가지요. 부경 변호사 사무소에서 저희 회사 법률 대리를 맡고 있으니 세부 내용은 거기서 조율하지요.”

“좋네. 나야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지.”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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