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풍미 출시
광고의 시작은 신문에 연재한 4컷짜리 만화였다.
옛날 옛적, 요리를 아주 못하는 여자를 아내로 둔 어부가 있었습니다.
간도 못 맞추기로 유명한 요리실력 덕분에 어부는 매일매일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습니다. 삼시 세끼 맛없는 음식을 먹다 보니 집밥을 피하기 일쑤였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만큼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 어부의 그물배에 새끼 고래 한 마리가 그물에 잡혔습니다. 고래가 어부에게 살려 달라고 빌자, 불쌍하다고 생각한 어부는 고래를 결국 놓아줬답니다.
그러자 며칠 후, 풀려난 고래가 찾아와 감사를 표하며 물었어요.
“자식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으십니까?”
“한 번이라도 맛있는 집밥을 먹고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라니?”
어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곰곰이 생각하던 고래가 이렇게 말했어요.
“설마 용왕님이라도 못하는 요리를 잘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저런.”
“대신 이걸 가져가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맛가루가 나오는 맷돌인데. 음식에 넣으면 맛없는 음식도 맛있어집니다.”
고래가 준 것은 영원히 돌아가는 요술 맷돌이었어요
몰래 맷돌에서 나온 맛가루를 넣으니 이게 웬일. 지금껏 맛없던 음식이 아주 맛있어지지 뭡
니까. 마누라는 요리가 맛있어져서 좋고, 어부도 더 이상 집에 들어가는 게 싫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어부는 마누라랑 금실이 좋아져 순풍순풍 쌍둥이를 낳았답니다.
요술 맷돌을 각색한 동화의 마지막에는 깨알 같은 광고 글이 달렸다.
“집 나간 남편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맛! 입안에서 터지는 맛의 풍년!”
“풍미 한 봉지면 당신도 주부 9단~! 넣기만 하면 맛있는 고래!”
운율을 맞추어 일부러 라임을 넣은 대사는 강태준과 백종섭이 머리를 맞대고 짜냈다.
“역시 신문 광고는 겁나게 비싸네요. 역시.”
“그래도 한 방에 시선을 사로잡으려면 광고만 한 게 없지요.”
“근데 이거는 과대광고 아닙니까? 좀?”
“원래, 광고에 다소의 양념은 어쩔 수 없는 법이지.”
공장에서의 첫 조업을 마친 직후 강태준은 기진맥진했다. 하루 종일 포장을 붙이고, 짐을 나르느라 쉴 틈도 없었던 것. 직원들 모두가 퇴근도 불사한 채 며칠간 씨름했고, 정성껏 포장된 조미료가 트럭에 실린 채 부산 시장까지 운반됐다. 거기다 학교 기말까지 곧바로 겹치면서 그야말로 초주검이 된 것이다.
그렇게 시험이 끝난 다음 날, 춘삼이가 강태준을 흔들어 깨웠다.
“사장님! 사장님!”
“오늘 쉬는 날인데 왜. 그래?”
“그게 아니라 사장님, 아무래도 밖에 나와 보십시오.”
“무슨 일이야?”
“아니 밖에 나와 보시라니까요.”
보채는 춘삼이에 눈을 비비고 나가 보니, 조미료 공장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골목 건너 저 뒤편까지 긴 줄에 어안이 벙벙해진 강태준이었다.
“이게 다 뭐야?”
“도매상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 대박 났습니다요. 물량이 그새 다 팔렸답니다.”
“응, 벌써?”
광필이를 비롯한 직원들은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판 나간 초도 물량이 불과 사흘 만에 완판되어 버렸던 것. 며칠 새 입소문이 나면서 광고지를 들고 온 주부들이 상점으로 몰려들자, 순식간에 동이 나버린 것이다.
한 팩에 50환. 담뱃값이 50환이던 시절이니, 담뱃값에 준한 가격도 흥행의 좋은 요소였다.
“풍미 그거 써 봤소이까? 국에 넣으니 아주 진국이드만.”
“그거 아지노모토 같은 거 아니유? 우리 바깥양반두 그거 없어지고는 통 입맛이 없다 투정 부리던디.”
“비슷하지. 근데 아지노모토보다 훨씬 싸고 맛있어.”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한국인 대부분이 아지노모토라는 제품을 알고, 일본어도 알고 있었다, 자연스레 아지노모토 수요를 풍미가 대체하게 된 것이다.
밋밋한 국에 맛이 확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주부들은 앞다투어 물량을 사 갔다. 원래 아지노모토가 팔리던 가격의 반의반도 안 되는 가격의 물건이 풀렸으니,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제품의 진가를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강태준의 조미료 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 중이었다.
‘광고 효과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재래식 장류 외에 인공 조미료란 꿈이고 사치였던 시절인 만큼 수요와 반향은 엄청났다. 그간 아지노모토를 쥐고 담합하던 업체들이 부랴부랴 남은 재고를 쏟아 냈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간 뒤였다. 굳이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 일본제 상품을 살 사람들은 없었다.
억수로 돈을 쓸어 담게 된 김광필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야. 대단하네요. 이렇게 좋은 반응이라니.”
“아지노모토 총판사인 오성 놈들, 똥줄이 빠졌는지, 재고를 오질나게 쏟아 내더군요. 벌써 시장에 물량이 풀려나와 반값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종간나 시키들, 대체 얼마나 해 먹었길래?”
“좀 씁쓸하긴 하네요. 일본과 경제교류가 완전히 끊어져서 시중 물가가 말이 아닌 상황에 그 세태를 이용해 먹으려만 하다니.”
강태준의 풍미가 불티나게 팔리는 사이,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여전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한일 단교 선언, 경제 관계 경색 본격화]
[이만승 대통령, 일본에 굴복하지 않겠다. 깊어지는 한일 갈등 해법은?]
한일 회담의 전개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이만승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일본에 경제단교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 한국 정부에서는 지금까지의 강경 기조를 계속하면서 평화선을 침입에 대해 무차별 나포를 지시했고, 한일관계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이번에 나포한 선박이 수십 척이 넘는다는군요. 뭐, 덕분에 실습선이 부족해질 일이 없어져서 좋긴 합니다.”
“대신 일본 쪽 거래 폭이 좁아져 버렸지. 뭐.”
덕분에 오징어 수출도 당분간 개점휴업이다. 오재갑이 중얼거렸다.
“우리 쪽에는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덕분에 풍미 점유율도 늘어나고, 오징어 원물도 갈 곳을 잃어 제조 단가가 더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긴 하다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지. 무엇보다 글루타민산 추출에 오징어보다는 효율 좋은 원물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말이야.”
“당밀입니까?”
“그래. 지금이야 규제 탓에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걸로 대체해야지. 안 선생 말로는 사탕수수를 이용하는 게 더 맛이 좋고 수율이 높다니까.”
“흠. 맛이 더 좋다라. 그건 주관적인 평가 아닌가요.”
춘삼이의 질문에 이번엔 노기철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게 아닐세. 사탕수수를 발효시키면 글루타민산 말고도 리보핵산이란 물질이 나오거든. 두 산이 궁합이 좋아 식품에 넣으면 적은 양으로 훨씬 진한 풍미를 낼 수 있지.”
“아, 한마디로 상승작용이 있다는 말이군요.”
“그래. 근데 한일관계가 이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규제 물품을 수입하려면 실적이 필요하고, 지금으로서는 기존에 수입했던 업자들을 제외하면 새로 루트를 뚫을 가망이 없으니 말이야.”
설탕은 기본적으로 전략 물자로 분류되는 상품이기 때문에 수출입상 규제를 받는다.
기존의 무역협회 소속 업체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좁은 시장을 비집고 들어갈 방법이 당최 없었던 것.
게다가 사탕수수를 구매하려면 일본의 상사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니, 수입하려면 일본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자 노기철이 위로하듯 말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이니 고민해 봐야 별 답이 없겠지요. 그보다 요사이 옹기솥 부식이 심해져서 문제입니다.”
“옹기솥이?”
“예. 발효과정에서 바닥이 자꾸 삭더라고요. 산도 때문에 Ph가 낮아져서 자꾸 깨지는 듯합니다. 내구도가 좀 높은 물건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구력이 좋은 옹기를 새로 많이 사 둬야겠군. 따로 알아보겠네.”
강태준은 바람도 쐴 겸 바둑교실로 향했다. 쓸 만한 옹기장을 구하려면 정성택의 인맥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몇 달 새, 덩치를 불린 대성기원은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다. 진한 담배 냄새가 사라진 공간엔 다방처럼 은은하게 커피 향이 나고, 비싸 보이는 난초들이 장식된 창가는 훨씬 안락해 보인다. 청결해진 실내를 구경한 강태준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장 큰 변화는 방의 중앙을 차지하는 푹신푹신한 가죽 소파였다.
‘이거 최 목수 작품 아닌가? 이번에 새로 출고했다고 했었는데?’
“우리 사무처장님 얼굴빛이 좋으시네. 근데 이 가죽 소파는 어디서 났습니까?”
“크크 카발 수리소 최 사장한테 딴 전리품이야. 판돈으로 3점 깔고 이겨서 받은 걸세. 족히 10만 환은 줬는데 아주 배 아파서 죽으려 하더만.”
“이야, 우리 성택이 형님 기력이 많이 느셨나 보네. 이러다가 빌딩 세우는 거 아닙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지. 조미료 사업 잘된 대며.”
“뭐,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죠.”
커피를 가져온 정성택이 능글맞게 웃었다.
“밥 먹고 살 만하다라. 우리 강태준이가 그런 말도 하네.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뭐. 다름 아니라 옹기솥 때문에요.”
“옹기솥?”
“조미료 제조에 필요한 소모품인데 좋은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서요. 혹시 아는 옹기쟁이 있으면 좀 연결시켜 주십쇼.”
“무슨 내가 요술 방망이야? 툭 하면 팍 하고 나오게?”
“에이, 사례비 드릴 테니, 그렇게 빼지 마십쇼. 넙치형님 실력이면 별로 어렵잖은 일이잖습니까?”
그 말에 바둑판을 앞에 둔 정성택이 능글맞게 말했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내기 한번 할까?? 지면 수수료 4푼, 이기면 6푼”
“오, 기력이 많이 느셨나 본데. 지금 저한테 감히 도전하시는 겁니까?”
“도전이라니. 예전의 내가 아니지. 임마. 너처럼 매일 놀고먹은 줄 아냐? 뼈를 깎는 수행을 하면서 노력했다고.”
“호오. 자신감 보소. 그럼 판돈이 1프로 정도는 좀 아쉽지 않습니까. 지면 2푼, 이기면 8푼 어떻습니까?”
“좋아. 대신 니가 두 점 깔아라.”
“에이, 형님 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같은 조건인데요.”
아웅다웅하면서 대국을 시작한 두 명이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곳곳에서 드문드문 새로운 손님들이 보였다.
딱히 오락거리가 없는 지금 시점에 바둑은 담소를 나누면서 즐기기 좋은 스포츠였던 것.
그러던 중 중절모를 쓴 중년의 멋쟁이 하나가 바둑을 복기하는 것이 보였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관에 궁금증이 생긴 강태준이 아닌 척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많이 눈에 띄네요. 저 양반은 대체 누굽니까?”
“아, 저분 꽤 멋쟁이지? 이원석이라고 방직 분야에서 방귀 좀 뀌는 분이지. 천경물산이라고 그쪽 사주야.”
“어? 미쓰이 물산에서 나일론 원사를 들여온다는?”
“그래 맞네. 원래는 동경 쪽에서 사업하다 대구에 정착하셨지. 대구 토박이거든. 도요레이온 쪽과 주거래 업체야.”
“그럼 사장님이 저렇게 돌아다녀도 됩니까?”
“이 사장님은 영업이 전문이니 동생이 공장관리는 대신 맡는다는군. 오늘도 수출입 문제로 출장 오신 거 같아. 나도 가끔 맞상대를 해 드리는데.”
“나일론 원사라면 돈을 아주 긁어모으겠네요.”
“하하. 예전에는 그랬겠지, 근데 요새는 좀 사정이 어려운 듯해.”
“어째서요?”
“뭐긴 뭐겠어 경제 단교 때문이지. 정부 쪽에서 일부 생필품의 가격을 통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잖은가. 나일론도 그 규제 대상 중에 하나지.”
수입 금지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52개 생필품 가격에 상한(Price ceiling)을 둬 더 이상의 가격 인상을 막도록 한 것이다.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한 대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수입업체로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런 일이…….”
“판매 단가가 수입가 이하로 떨어져 버렸으니 관세에 창고료나 운반비까지 생각하면 적자도 그런 적자가 없지. 그렇다고 쥐고 있기도 뭣하니 덕분에 저렇게 아무 때나 홀연히 와서 대국을 복기하다 가시더군. 사업 생각을 하시는 건지. 가끔 멍하게 생각에 잠기실 때가 많아.”
“그럼 혹시 제게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분이 언제 또 오시는지.”
“왜?”
“대화해 보고 싶어서요. 생사 수입 쪽에 관심이 많이 있기도 하고요.”
“글세. 저 양반이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서. 그냥 접근해서는 쉽지 않을 텐데? 어……!”
어느새 패배가 확고해진 대국 판을 보고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얼굴.
강태준이 선심 쓰듯 말했다.
“수수료 4푼으로 타협하는 건 어때요? 대신 저쪽 회사 재정 상태까지 알아봐 주는 걸로.”
“임마. 그건 좀 아니지. 인건비 계산은 안 하나 6푼.”
“에이 구질구질하게. 그럼 말고. 제가 직접 알아보죠 그럼.”
“하하, 알았어 알았어. 우리가 남이가, 물론 공짜로도 알려 줄 수 있네.”
그로부터 얼마간 대성기원 사람들은 정성택의 지시에 따라 이원석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정성택이 강태준에게 신호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알아봤습니까? 대충?”
“천경물산 재정 문제가 꽤 심각한 모양이야. 자꾸 어디론가 돈을 꾸러 다니더군.”
“그렇습니까? 예상대로네요.”
“그래. 내일 8시쯤 방문할 거 같으니. 그때쯤 오라고. 판은 깔아 둘 테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