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55화 (55/361)

55화 백경 식품 공업사

‘무슨 방도가 없을까?’

관련 자료가 필요하다? 국제시장 중고서점도 몇 번 뒤적이긴 했지만 별로 성과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없다. 그저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수업 중 자꾸 펜대만 굴리는 모습에 보다 못한 오재갑이 슬쩍 물었다.

“요즘 어딜 그리 다니십니까.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형님.”

“아, 미안, 티가 났나?”

“네. 혼자 머리부터 싸매지 말고 무슨 일이 문제인지 말씀해 주시죠. 사정은 모르지만, 집단 지성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같이 고민하면 좀 도움이 될지 누가 압니까?”

강태준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이야기를 경청하던 광필이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흠. 역시 제품 개발이란 게 보통 일이 아니네요.”

“무슨 대안이 없겠나?”

“혹시 모르니 도서관이라도 뒤져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학교 역사를 고려해 보면 일제 시대 자료도 있을지 모르죠. 쓸 만한 자료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오재갑의 제안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강태준은 학교를 찾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진짜 깨끗하게 암것도 안 나오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단서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서점은?”

“서점 쪽 인맥을 돌렸는데 그쪽도 없답니다. 더 찾아봐야 의미가 없을 거 같군요.”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실망도 잠시, 머리를 굴리던 강태준의 뇌리에 퍼뜩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그럼 학교 수장고를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수장고요?”

“예. 일제 강점기 때 설립된 곳이니 그간 자료가 많이 쌓여 있을 거 아닌가. 참고할 만한 서적이나 논문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아?”

“그럴듯하긴 합니다만, 수장고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지 않나요?”

“걱정 마소. 지가 서점에서 일한 거 잊었소? 내 도서관 사서랑 친분이 있소이다.”

광필이가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친분이 있다고 자신이 넘쳤지만 정작 반응은 시원찮았다.

“수장고를 보고 싶다고요?”

“그려. 부탁 좀 할게.”

“그거 곤란한데. 외부인은 출입 금지가 원칙입니다.”

“이봐 임자, 원래 지식이란 건 썩혀 둬야 아무 쓸모도 없는 법이야. 유도리 있게 살아야 하지 않나?”

어깨동무를 한 광필이가 슬쩍 묵직한 주머니를 뒷주머니로 찔러 주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사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 세상이란 게 원래 원칙대로만 되지 않지요. 자 따라오십쇼.”

청운관에 설치된 수장고는 총 9개로 자연재해와 화재 등의 피해로부터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쾌적하구만. 좀 숨이 막히긴 해도.”

“외부의 누수나 결로 등의 피해가 내부로 침투할 수 없게 이중으로 만든 벽체와 별도의 공기층을 만든 겁니다.”

오래된 유물들과 해골 모형이 쌓인 공간을 지나 수장고를 안쪽으로 들어가니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여긴 왜 이렇게 정신이 없나?”

“그게 전시 때 혹시 몰라 급하게 옮기는 바람에. 좀 정리가 덜 되었죠. 그 뒤로는 뭐 정리할 사람이 없었죠.”

약간 곰팡이가 섞인 듯한 퀴퀴한 책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자 광필이가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난이 아닌뎁쇼. 여기서 뭘 어떻게 찾으라는 건가?”

“그래도 대충 분류는 되어 있을 겁니다. 저기 표지 붙어 있는 거 보이시죠. 그럼 저는 이만.”

혹시나 도움을 요청할까 서둘러 도망가는 사서의 모습에 강태준이 혀를 찼다.

“참 고마운 말씀이시군.”

“일단 이 상태로 찾는 건 무리고, 정리부터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뭐 그래야겠지. 재갑이 너는 화학 쪽을 맡고, 광필이랑 나는 식품 쪽으로 가 보지. 일단 정리부터 하면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

팔을 걷어붙인 남자 셋은 며칠간 대청소를 시행했다. 급하게 옮기느라 자료가 순서대로 정리되지 않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던 만큼 청소를 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검토를 마친 재갑이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다 살펴봤지만, 화학 쪽은 없습니다.”

“식품 쪽도 없어요. 발효와 관련된 논문을 샅샅이 뒤졌는데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렇다면 생물인가?”

“생합성 분야라면 의약 쪽일 수도 있습니다.”

거의 일주일에 걸쳐 이 잡듯 다시 책들을 뒤졌지만 별로 쓸모 있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더 힘듭니다. 형님 그냥 가지요.”

“그럽시다. 뭐 솔직히 더 뒤진다고 뭐 나올 거 같지도 않구만요.”

‘포기해야 하나?’

“일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지 혹 시야에서 떨어진 것이 있나?”

퀴퀴한 창고를 이 잡듯 뒤지던 강태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구석에 꽂힌 검은 색으로 된 논문집들이었다.

“이건 뭔데?”

“아 그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생물학 연구일지인 거 같기는 한데, 제목도 안 달려 있어서.”

차분하게 자리에 앉은 강태준이 아무 제목도 없는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보존 상태였지만 다행히 속지는 무사했는지 읽는 데 지장은 없었다.

‘완전히 뒤죽박죽이네.’

누가 연구한 건지 모르지만 여러 사람의 연구일지가 한데 뒤엉켜 어질러져 있는 것이 한숨이 나온다. 일본어와 영어가 섞여 있는 것이 이곳에 봉직했던 일본 연구원이 쓴 글인가?

서류를 꼼꼼히 넘기던 강태준은 문득 논문을 하나 찾아냈다.

누렇게 변색된 제목에서 가리키는 내용에 눈이 번쩍 띠였다.

- 다시마 생합성과 관련된 연구. L-글루타민산 生産菌 Brevibacterium lactofermentum의 Bacteriophage에 關한 硏究. 크렙스 회로를 통한 글루탐산 생성 기제에 관하여.

독일의 화학자인 칼 리트하우젠이 최초로 글루탐산을 발견했을 때부터, 산분해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법을 포함, 미생물의 종류별 특성과 크렙스 회로를 통해 생산성을 확보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그 뒤로는 달하는 방대한 각주와 서적들이 딸려 나왔다.

“심 봤다!”

“이거로군.”

하나하나 서류를 촬영한 강태준이 자료를 보여 주자 노기철은 크게 반색했다.

“세상에 이런 귀한 자료가?”

“논문 들여오면서 연구 자료로 끼어 온 것 같습니다.”

“이런 게 있었다니. 정말 큰 도움이 될 거 같네요.”

논문과 각주로 달린 서적들까지 구하고 나니 꽤 괜찮은 가이드라인이 잡혔다.

연구 속도에 박차를 가한 강태준은 오징어를 원료로 글루탐산을 생산하는 발효 공정을 채택하기로 했다. 본래 사탕수수를 원당으로 이용하지만, 국내 여건상 수입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오징어를 푹 삭혀 추출한 발효액에서 글루탐산을 분리하고 수산화나트륨을 첨가하는 과정이다. 그런 다음 활성탄을 이용해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쳤다.

용액을 가열해 물을 증발시키고 나자 수분이 사라지고 흰 결정이 남았다.

“안 선생님, 대충 결과물이 어떻습니까?”

“아, 여기 이겁니다.”

설탕같이 흰색의 결정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강태준이 먼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혀에 넣어 맛을 보자. 혀끝을 타고 느껴지는 감칠맛이 뇌리를 관통한다. 뒷맛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만 가지고는 영 모르겠군요. 역시 식품에 넣어 봐야 알겠는데요?”

“물론입니다. 보기에는 그럴듯한 것 같은데 시험해 봐야죠.”

안연복이 즉석에서 면에 넣어 조리해 보니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멸균 정제 후, 수율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몇 달간에 걸친 씨름 끝에 맛과 퀄리티가 일정하게 나오기 시작하자 강태준은 확신했다.

“대충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저도 이제 본격적으로 생산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설비부터 확보하는 게 급선무겠군요.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발효조랑 여과기부터 필요합니다.”

“그건 걱정 마시죠. 마침 에스컴 시티 쪽에서 빵 공장을 증설한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쪽에서 공수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까.”

강태준은 복만이를 통해 미군 쪽에서 발효조 등 필요한 설비를 공수해 오기로 했다. 마침 평택의 미군 부대에서 빵 공장 증설과 더불어, 오래된 양조 설비도 폐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설비를 꽤 싼 값에 들여올 수 있었다.

부산 연제구 쪽. 강태준이 마련한 공장은 일제 시대 거제 관사 창고로써 대지 1,200평에 목구조 경량 철골조의 1층 6개 동으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계량기구와 발효, 믹싱 설비에 대형 오븐을 설치하고 과당 가공용 설비까지 들이자 텅 비었던 건물 안이 꽉 찼다.

철도역이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전경에 김광필이 이마에 손을 대고 전경을 훑었다.

“이거 건물이 낡아도 보통 낡은 것이 아니네요…….”

“그렇다고 공장 건물을 통으로 새로 지을 순 없잖아, 청소 안 할 거야?”

“예? 관사 하나만 청소하면 끝 아니었습니까?”

“끝은 무슨. 이제 시작이지. 저기 중고 설비랑 시설 보이지, 자 봐 봐.”

뚜껑을 연 발효조 안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부를 들여다본 녀석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라이트를 들여다보니, 술 찌꺼기로 보랏빛으로 변한 내부에선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휴, 안만 들여다봐도 취할 거 같은데요.”

“청소 아지매랑 깨끗이 청소하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하고, 먹는 식품에 잡균이 번식하면 안 되게 깔끔하게 해야지.”

“알겠습니다요. 까라면 까야죠. 언제부터 저 같은 고급 인력이 청소부가 된 건진 모르겠습니다만요.”

광필이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애초에 군바리 생활을 하다 보니 꼼꼼하게 닦는 것에는 도가 텄다.

대청소를 끝내고 난 뒤에 무안에서 운반된 오징어들은 곧바로 발효조로 옮겨졌다. 멸균 정제한 엑기스에 영양액을 넣은 뒤에 발효를 촉진시키기 위한 미생물을 투입하는 작업이었다. 적당한 온도와 습기를 맞춘 다음,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조미료가 생산되어 나오기에 앞서 제품명을 무엇으로 정할지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부터 상품명을 정해야겠네. 각자가 하나씩 말해 보지. 자, 재갑이부터?”

“음, 미원은 어떻습니까? 맛의 근원 그런 뜻으로.”

“그건 아지노모토(味の素, あじのもと)를 뜻만 그대로 베껴 쓴 거잖아.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군. 향후 문제가 될 여지는 없애 두는 게 좋아.”

“그럼 미소는 어떻겠습니까? 맛 미에 흴 소(素) 자로요.”

“그건 된장국 이름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나?”

“그러면 맛 상무? 맛 주부?”

“그건 술 상무가 생각나서 좀 거시기하다. 맛 주부는 좀 촌스러운 거 같고.”

맛 황제, 미왕, 미신, 미궁, 천미, 미미 등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서로 호불호가 갈렸다.

의견이 재차 기각되자 춘삼이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그러면 단순하게 풍미는 어떻나요?”

“풍미?”

“맛의 풍년이라는 의미에서 풍미요.”

그 말에 광필이도 솔깃한 듯 귀를 기울였다. 오감을 통해 뇌가 최종적으로 해석하는 맛과 향을 합쳐 풍미(風味)라고도 하니 복합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 중의적인 의미라 그거 그럴듯한데?”

“저도 그게 좋을 거 같군요.”

“그럼 대략 종합 의견이 나온 것 같으니 다수결로 정하자고.”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풍미가 제일 호평이었다.

결국, 브랜드명은 압도적인 표를 받은 풍미로 결정되었다.

풍미(豐味)라고 브랜드를 정한 강태준은 백종섭에게 의뢰를 넣었다.

“저보고 조미료 상표를 그려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고래를 기본형으로 캐리커처 형태의 캐릭터를 하나 그려 줬으면 하네요. 그리고 4컷짜리 만화도 하나 말입니다.”

“아하, 시사만평 같은 거 말이죠?

“네. 이왕이면 신문에 낼 광고로 쓸 생각이니까요.”

그렇게 몇 개월에 걸친 시제품 출하 준비 끝에 마침내 첫 제품이 신문에 선을 보였다.

하얀 고래를 의미하는 백경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이 백경 식품 공업사의 출발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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