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식품 개발 연구부
요구사항을 들은 박원숙의 눈이 가늘어졌다.
“냉장고를 구매하고 싶다?”
“예. 미군부대 쪽에서 식품 보관용으로 쓰던 물건이 있지 않습니까? 가능하면 좀 큰 사이즈가 있나 해서 말이죠. 업소용으로 나온 거라면 더 좋고요.”
“흠. 단순한 냉장고 정도는 동생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지 않아?”
“그냥 일반적인 크기라면 가능하겠지만, 큰 사이즈는 드물잖습니까. 이왕이면 클수록 좋거든요.”
“어느 정도?”
“음, 최소 800ℓ급 이상? 큰 걸 구하기 힘들다면 여러 개 합친 것도 괜찮습니다.”
“흠. 그 큰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네. 원래 냉장고란 게 전기 먹는 하마라고. 나야 미군기지 내에 있으니 별로 문제 될 게 없지만, 태준이는 그게 아닐 텐데.”
당시까지 냉장고는 절전형으로 나온 물건도 아닌 데다, 당시 전력 사정상 전기료도 상당히 비쌌다. 보급 초기에 1년 내내 냉장고를 사용하기보다 여름철에만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을 정도…… 실제로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일반 가정에서는 냉장고 보급률이 고작 6.5%밖에 지나지 않았다
“연구 개발용으로 쓰려면 냉장고는 24시간 틀어 놔야 하지 않나. 하지만 전력이 끊겼을 때를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일반적인 냉장고가 아니라 가스냉장고를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스냉장고?”
“네. 직접냉각의 방식의 가스냉장고는 전기식 컴프레서를 이용하는 냉장고보다 관리도 쉽고 고장 날 확률이 훨씬 적다고 하더라고요.”
가스냉장고는 냉매인 암모니아수가 증발할 때, 주변의 열을 빼앗아 온도를 떨어뜨리는 원리를 이용하는 냉장 설비이다. 점화에 필요한 열 스위치와 몇 가지 장치를 제외하면 복잡한 내부 기기가 필요하지 않아 고장이 적고, 유지 관리 역시 전기냉장고에 비해 쉬운 데다 소음도 없다시피 하다. 박원숙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어머 신기하네. 왜 난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지?”
“북미 쪽 시장에서는 일찌감치 경쟁에서 밀려서 도태되었으니까요. 소수의 업소를 제외하고는 가정용으로 쓰는 곳은 없다시피 하죠.”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게 장점들이 많은데 왜?”
“자본의 힘이죠. 가스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는 대부분 중소기업이었던 반면 전기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는 제너럴 모터스나 웨스팅 하우스 같은 대기업들이 주류였거든요. 결국은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 거죠.”
실제로 1920년대까지 당시 미국에서 가스냉장고 대 전기냉장고의 구도는 오히려 가스냉장고가 더 유리했다. 하지만 전기사업에 사활을 건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냉장고 시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막대한 홍보와 연구비를 앞세운 전기회사들의 파상공세에 밀려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헤에, 신기하네. 기술의 우열을 자본의 힘으로 엎어 버린 건가?”
“대충은요. 그렇다고 완전히 퇴출된 건 아닙니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 곳엔 여전히 쓰임이 많으니까요. 암튼 전기식이 아닌 가스식을 사용하면 전력 수급이나 비용 같은 대부분 문제는 해결될 거 같아요. 작동만 잘 되면 중고라도 상관없으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뭐 동생이 그렇다면야. 알았어. 그럼 내가 힘써 볼게.”
가정용으로서의 경쟁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아직 가스냉장고라는 것이 구시대의 유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강태준은 소르코 사에서 나온 냉장고를 세 대 구했다. 전기냉장고로 완전히 판도가 넘어가기 직전 요트에 장착할 용도로 만든 물건으로 덩치가 꽤 컸다. 하지만 인재 수급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형님, 안 선생 말고 다른 전문가들은 찾을겨? 연구를 하려고 해도 사람이 있어야지. 솔직히 좀 불안한데?”
“응, 여기저기 쓸 만한 사람을 찾아보고는 있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더군. 혹시 추천해 줄 사람이 있나?”
“뭐. 마침 아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한데. 소개해 줄까?”
“니가?
“뭐 노기철이라고 이북서 평양공대 화공과 다니다 피난 온 녀석인데 그놈은 어떻소이까? 제 전공을 살렸는지 비누나 화장품 같은 걸 만들어서 국제시장에 팔고 다니는 녀석인데 꽤 수완이 좋더이다.”
“흠 신통하네. 그런 녀석을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 수산대 2학년으로 편입한 녀석이요. 종종 옆자리에서 보던 놈인데 술자리에서 만나서 친해졌지.”
“그래?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사상 문제 같은 건 없지?”
“에이, 형님 설마 제가 아무나 소개할까 봐서? 출신성분은 걱정 마소. 원래 평양 살던 놈인데 그놈 부모가 지주계급으로 몰려서 숙청당했거든요.”
토지 개혁 때 정치보위부의 탄압으로 아버지가 숙청당하면서 가세가 몰락해 버린 것.
토지 몰수 후, 평안도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 전쟁 때 남한으로 넘어온 것이다.
“허, 인생이 다사다난하구만.”
“암튼 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녀석이니 그 부분은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되오.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왔으니 연고도 없고. 덕분에 그 좋은 머리를 두고도 개고생 중인 거지. 이만한 조건이 솔직히 어디 있나?”
이야기를 듣던 강태준은 내심 마음이 동했다. 진짜 화공과 출신이라면 당시에는 보기 드문 엘리트가 아닌가.
“그렇다면 한번 데려와 보게. 일단 얼굴이나 익히자구.”
“네. 형님.”
다음날 김광필은 아침 일찍 광대뼈가 불거진 비쩍 곯은 젊은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강태준을 본 녀석이 허리가 접힐 만큼 넙죽 고개를 숙였다.
“광필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노기철입니다.”
“그렇게 예 차릴 거 없어.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데 말이야.”
“하하. 형님. 이 친구가 나름 족보 있는 양반 출신이라 예의가 바른 친굽니다.”
“족보는 무슨. 다 망한 집인데요. 광필이한테 기본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화학 쪽 전문가가 필요하시다면서요?”
“뭐, 그래 본인을 전문가라 소개할 정도면 자신이 넘쳐 보이는데. 대충 경력이 어떻게 되나?”
“실험실에서 화공 약품을 주로 다뤄 보았고 북에서 화약 제조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흠. 식품 제조 쪽으로는 별도의 경험이 있나?”
“예. 제 지도 교수님께서 담당하신 연구 과제 중 하나가 발효 연구 분야여서 전통 발효된 간장덧으로부터 숙성 효모를 분리하거나 산분해하는 연구도 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데?”
“쉽게 말하면 염산을 사용해 간장을 제조하는 연구죠. 결국 간장은 단백질을 분해한 아미노산 덩어리라고 할 수 있거든요. 콩 분해 속도를 높여서 효소를 이용할 때보다 공정이 간단해지고 제조 시간을 며칠로 단축해 가격을 낮출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만들면 풍미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으니 양조간장과의 비율을 어떻게 맞출지가 포인트지요.”
몇 가지 질문을 하던 강태준으로서는 짐짓 믿음이 갔다. 허풍을 떠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입은 청산유수인 걸로 보아 아는 것은 많아 보인다. 어차피 시켜 보지 않고 진면목을 알 방법 따윈 없었지만 적어도 사기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네. 광필이 추천도 있고, 한번 채용해 보도록 하지. 다만 진짜 능력이 있는지는 스스로 입증해야 할 걸세.”
“물론입니다.”
“동기부여를 위해 덧붙이자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연구에 성공하면 자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줄 걸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 사정이 좀 여의치 않아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중에 말고 지금 당장 현찰 일부라도 당길 수 있을까요?”
“임마?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
갑작스러운 요청에 김광필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강태준이 조용히 물었다.
“아직 일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성질이 급하군. 혹 급전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나?”
“몇 달 전부터 일감이 끊겨서. 하는 수 없이 사채를 썼더니 사정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사채라니, 내 듣기로는 그간 비누랑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던데, 그걸로 충당하기 부족했던가? 나름 쏠쏠하게 수입을 올렸다고 들었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군.”
“그게 사기를 당했거든요. 비누를 만들려면 폐유가 필요한데 원래 거래하던 업체에서 식용유가 아닌 윤활유를 넣어서 양을 부풀렸지 뭡니까. 품질 검사할 기구도 없이 그저 믿고 막 만들어 팔다 보니 사달이 났습죠. 덕분에 손님들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 죄다 환불하고 배상해 주느라 곤욕을 치렀습니다.”
“사람 몸에 쓰는 물건인데 확인도 안 해 보다니, 그건 좀 안이했던 거 같군.”
“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제 불찰입죠. 문제는 덕분에 거래처가 끊겨 버려서 배상해 주고 나니, 순 개털이 돼 버려서 말이죠.”
주절거리듯 변명하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꽤 절박해 보인다.
“그래서, 대체 빚진 돈이 얼마쯤 되는데?”
“그게 3만 환 정도. 아, 한 번에 다 달라는 게 아니라 이자라도 좀 갚을 정도만…….”
녀석의 머뭇거리자 강태준이 지갑에서 지폐 뭉텅이를 꺼내 내밀었다.
“자, 여기 있네. 그걸로 바로 빚 갚고 몸보신이라도 해. 몸뚱이가 그렇게 곯아서 무슨 일을 하겠나.”
“아. 이렇게 선뜻 큰돈을…….”
액수를 확인한 노기철이 감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선뜻 처음 보는 외지인에 이 큰 액수를 내주겠는가.
“나도 얼마 전만 해도 자네랑 사정이 다르지 않았거든. 뭐 이왕 이렇게 된 것 한번 믿어 보지.”
악수를 권하는 손에 눈시울이 시큰해진 그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 천천히 갚아. 선금은 매월 월급에서 차감할 테니 말이야. 대신 자네는 연구 끝날 때까지 절대 못 그만두는 거네. 알겠나?”
“물론입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임 연구원을 영입한 강태준은 거지 아이 중 손이 야무지고 똘똘한 아이들도 몇 명 선발하기로 했다. 둘이서 연구를 진행하기엔 역부족인 만큼 잡무를 담당할 보조역이 필요했다.
그렇게 열서너 명 남짓 모으고 나자, 강태준은 온천동 가옥 후원에 가건물을 설치한 다음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달, 학교로 복학해서 바쁘긴 했지만, 강태준은 매일 빠짐없이 연구실에 도장을 찍었다. 투자액을 감안하면 그로서는 이 사업의 승패가 초미의 관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느 날처럼 가운을 입은 채 현미경 관찰에 열중한 노기철의 모습에 강태준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 사장님.”
“연구는 잘 됩니까?”
“생각보다 쉽지 않군요. 진척이 되는 듯하다가도 계속 도돌이표입니다.”
현미경을 살피던 그가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혹 제가 도울 것이라든지.”
“글쎄요. 조합이 문제입니다. 이 아지노모토란 게 사실 성분구성은 그다지 특별한 게 없거든요. 밀에서 추출한 글루텐을 발효시키면 글루탐산이란 성분이 나오는데 그게 감칠맛을 내는 핵심이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추출하느냐죠.”
“단백질을 분해하는 과정은 이미 연구해 오신 분야가 아닙니까?”
“하하, 기본적인 공식은 알더라도 실제로 작용 기제는 천차만별이니까요. 어떤 재료를 쓰는 게 수율이 높은지, 어떤 온도와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지는 직접 실험해 봐야 알죠.”
“대부분의 제조사에선 제조 방법이 기밀이라 알기가 쉽지 않겠지…….”
“그렇지요, 어떤 미생물이 효과적인지 어떤 원물을 이용해야 좋은지 글루텐산 수율 조합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게 문제라는 말이죠.”
해방 직후 아지노모토사는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관련된 기술 자료들을 철저하게 소각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나하나 관련 자료를 대조하며 제조법을 복원해 가는 중이었지만 참고로 사용할 만한 자료가 너무 부실했던 것이 없었다.
“무슨 재료가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온도나 압력이나 이런 건 시험을 통해 얻어지는 거고, 결국 정답은 노가다밖에 없지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난관이 크군요.”
“네. 누구나 김치나 된장 같은 걸 만들 수는 있지만, 맛 좋은 상품을 만드는 건 적잖은 노하우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원물은 물론 온도나 압력 등 제반 환경에 따라 발효 속도나 발효 후의 결과물도 차이가 크고 말이죠. 맛은 과학이라는 말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때마침 배양실에서 막 돌아온 안연복이 작업복을 벗더니 출납 기록부에 X자를 쳤다.
빼곡히 적힌 재료명 옆으로 무수한 X자가 처져 있었다. 노기철이 한숨을 쉬었다.
“또 실팬가요?”
“응. 아무래도 정어리는 아닌 듯해. 산패가 빠르더군. 그래도 하나 지운 거에 만족해야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한마디 했다.
“확실히 경우의 수가 너무 많군요. 이렇게 원물별로 일일이 대조해 보는 건 너무 무식한 방법인데, 이렇게 가다간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해 봐야죠. 추가로 관련된 논문이나 전문 서적을 참조한다면 훨씬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텐데. 좀 아쉽긴 합니다.”
“논문이라?”
“뭐 연구에 있어 촉매 같은 거랄까요? 대략 작용 기제가 이렇다 저렇다 쓰여 있기만 해도 참고가 되니, 연구 방향을 잡는 게 훨씬 편해지죠. 구체적인 범주를 좁혀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까? 쓸데없는 시행착오가 줄어들고 말입니다.”
“숨은그림찾기 느낌인가? 흠, 그럼 일단 최선을 다해 주십쇼. 해당 자료는 저도 같이 찾아보도록 하지요.”
“예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
연구를 전문가에 일임했다고는 하지만 가만히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재료를 수급하고 연구소를 유지하는 데 적잖은 비용이 드는 만큼 현재의 지출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