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해물 짬뽕
“짬뽕이라? 어떤 거 말입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얼큰한 초마면 같은 거? 조개나 바지락같이 해물을 넣어 시원하게 끓은 육수가 어울릴 거 같은데요. 일단 오징어 같은 재료는 저희가 직접 수급하니 단가 면에서도 경쟁력이 있고요.”
시원한 해물 육수에 오징어 다리를 듬성듬성 잘라 넣은 짬뽕을 떠올리니 꽤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생각해 보니 이즈음에는 짬뽕이라는 메뉴가 그닥 대중적이지는 않았지.’
훗날엔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짬뽕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제 시대 자료에는 기록이 없어 해방 이후 생긴 음식으로 추정된다고 할까. 강태준의 의견에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거 괜찮을 거 같기는 한데요. 근방 남대문 시장도 가까워서 재료 수급이 용이하니. 일단 단가 문제도 적고요.”
“그럼 안 선생께서 식단 개발에 도와주시겠습니까? 저희는 사실 요리 전문가가 아니라서 구체적으로 맛을 구현하기엔 좀 걸리는 점이 많네요.”
“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그간 신세를 진 것이 부담이었던 안연복에는 실력을 발휘할 기회.
근처 남대문 시장에서 조리할 재료를 사 온 안연복이 당장 작업에 들어갔다. 홍합과 오징어 등 해산물과 양파를 썰어서 식용유를 넣고 볶았다. 도마 칼로 썬 재료들을 섞고 불맛을 입히자 금세 요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와우, 역시 요리사네.”
“오 먹음직스럽군요. 근데 국물 색이 원래 이렇습니까.”
“예. 뭔가 잘못되었나요?”
“아……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짬뽕의 원조인 중국의 초마면은 하얀 국물이다. 짬뽕에 고춧가루를 넣은 것이 오히려 특이하다고 할까. 그 외에는 별로 현대의 짬뽕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기름기가 둥둥 떠있는 국물에 즉석에서 볶은 야채와 홍합이 고명으로 올려져 있고, 오동통한 면발 위 반으로 가른 청경채가 데친 것처럼 길게 걸쳐져 있다.
각자에게 한 그릇씩 음식을 건넨 안연복이 조심스럽게 식사를 지켜보았다.
“어떻습니까?”
“맛있긴 한데, 뭔가 확 땅기는 맛이 없네요.”
불맛이 확 나는 걸 빼면 삼삼하기 그지없다. 강태준으로서는 꽤 취향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식성을 고려하면 그다지 먹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네. 개운한 게 술 먹고 난 뒤에 좋긴 하겠습니다만. 좀 자극성이 적다고 할까.”
“흠,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좀 더 매콤하게 가능하겠습니까? 고춧가루 팍팍 넣어서 외관상 붉은색이 더 맛있어 보일 거 같은데.”
강태준의 의견에 안연복이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빛 국물이라? 그거 엄청 매워 보일 거 같은데요?”
“시각적으로 붉은색이 더 식욕을 자극한다지 않습니까. 아마 그쪽이 더 대중적으로 먹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강태준의 요구에 따라 안연복이 홍고추와 고추기름을 넣고 다시 끓였다. 붉게 변한 국물을 뜨자 매콤한 향과 함께 국물이 올라왔다.
“이건 어떻습니까?”
“확실히 아까보다 낫습니다만 뭔가 2프로 부족한 느낌입니다.”
“네. 저도 맛은 있는데 뭐 차별화할 거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뒷맛이 확 댕기는 느낌이 아니라서.”
“그렇습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안연복이 다시 웍 쪽으로 가더니 뭔가 가루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정체불명의 가루를 국물에 뿌린 안연복이 자신 있게 그릇을 다시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제 비장의 무기입니다. 드셔 보시면 아까와는 사뭇 맛이 다를 겁니다.”
조금 의구심이 들 만도 했지만, 표정부터 자신감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국물맛을 보는 순간 짜릿하게 올라오는 전율.
농후한 국물에 혀를 착 감기는 감칠맛에 복만이 역시 한번 국물을 마셔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세상에 아주 국물이 입에 짝짝 달라붙습니다요.”
“이게 무슨 마법인지.”
“가루 조금에 맛이 이렇게 변하다니. 이거 무슨 마약이라도 됩니까?”
맛을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했다.
대체 뭐를 넣었길래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놀라워하는 사람들에 안연복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건 제 특제 비법입니다. 밀을 발효시킨 다음 다시마와 쇠고기를 섞어 빻고 건조한 겁니다. 이렇게 하면 맛의 조화를 살리고 풍미를 좋게 해 주지요.”
“혹시 그 가루, 볼 수는 있습니까?”
“네네. 여기요.”
살짝 새끼손가락에 찍은 가루를 혀를 대어 보니 뒷맛이 당기는 것이 묘한 느낌이 났다.
‘이건 MSG?’
순수한 MSG와 거리가 있긴 하지만 감칠맛을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깜짝 놀란 강태준이 돌아보자 의미를 오해한 안연복이 겸연쩍게 웃었다.
“신기하게 이걸 개별적으로 사용하면 그렇게 풍미가 좋지 않지요. 다만 다른 재료와 섞이면 상승효과가 납니다. 사실 스승님께서는 굉장히 싫어하셨죠. 음식에는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맛을 내는 건 야매라고 많이 혼났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훌륭한데요.”
“맞습니다. 야매든 뭐든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닙니까?”
복만이의 말에 다들 맞장구를 쳤다. 짬뽕을 물처럼 흡입한 사람들은 모두 바닥까지 깨끗이 비운 상황이었다. 안연복도 꽤 기대감에 찬 눈이었다.
“그럼 이 메뉴는 통과입니까?”
“넵, 이 메뉴로 하지요. 주방 뒤편을 확장해 다방과 음식점으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추가로 이참에 별채 개량을 해서 공간을 나눠 놓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별채 공사라?”
“아무래도 공간 활용상 좀 아깝지 않겠습니까?”
원래 있던 경양식당을 그대로 둔 채 외벽을 쌓고 별채를 꾸며 다방을 나누어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안연복은 그 외에도 소갈비 양념에 야채와 당면을 듬뿍 넣은 안동찜닭과 달짝지근한 계란말이 비법도 전수해 주었다.
떠나기 전 안연복은 계량에 필요한 비율을 적어 주며 신신당부했다.
“일정한 맛을 내려면 음식을 재료를 꼭 정량에 맞춰야 합니다. 짬뽕과 냉면에 넣을 조미료는 제가 매달 따로 조제해 보내 드리도록 하죠. 주의할 부분은 더운 곳에 두면 상하거든요. 액화가 되면 내용물이 변질되니 꼭 차가운 얼음통 안에 서늘하게 보관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사이 정학 조치가 풀리고, 학교로 돌아온 강태준은 학과 진도와 복습으로 눈코 뜰 새 없었다.
복학이 풀리기 무섭게 기말고사를 앞두고 밀린 과제와 실습이 산더미처럼 들어왔다. 휴가를 마친 복만이도 미군부대로 복귀했다.
정신없이 일에 치이던 일상이었지만, 얼마 후, 서울에서 도착한 전보에 미소가 떠오르는 강태준이었다.
“백 화백이 많이 흥분한 모양이군. 글씨체가 평소와 달라.”
“뭐 좋은 일 있답니까?”
춘삼이가 의아한 듯 묻자 강태준이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명동 쪽 매출이 급상승했다네. 짬뽕 메뉴가 대박일세. 지금 명동 사람들이 아예 줄을 서서 먹을 정도라는군.”
짬뽕이 상상 이상으로 좋은 반응을 얻자 다방의 매출도 역대급으로 치솟았던 것.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인 손님들로 명동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고 했다.
덕분에 자기 그림을 보는 사람도 많아졌다나.
식사 후에 다방에 영수증을 제시하면, 커피를 절반 가격에 마실 수 있도록 할인행사를 연 것도 흥행에 주효한 영향을 미쳤다.
“이게 다 연복 씨 덕분입니다.”
“무슨 말씀을. 원래부터 자리가 좋던데요. 저야 약소한 도움을 드렸을 뿐이죠.”
자신감이 생긴 강태준은 은근슬쩍 욕심을 드러냈다.
“사실 저번에 보여 주신 그 비법 소스 말입니다. 대량 생산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따로 시장에 시판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
“글쎄요.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어째서입니까?”
“대량으로 상품화하기에는 좀 뭐랄까. 보관도 어렵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서요. 게다가 유통기한이 짧아서 실온에서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고요.”
“만들기가 어렵나요?”
“재료 비율도 중요하고 건조과정이 복잡하거든요. 비율이 달라지거나 섞어서 응어리가 지면 발효과정에 차이가 생기고 그러면 변화가 생깁니다. 게다가 제조 시 온도에 따라 맛이 변하니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추운 날이면 괜찮지만 여름에는 관리가 훨씬 어려워지거든요.”
온도에 민감한 만큼 자칫 잘못하면 분말이 액화되어 버리거나, 산패가 발생해 독성이 생기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흠, 그 부분은 앞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참에 아예 본격적으로 상품화 연구를 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 소스를 상품화한다고요?”
“예. 빈말이 아닙니다. 제가 개발비 전액을 댈 테니 안연복 씨는 한번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쪽에 손해 보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음. 좋은 제안이긴 합니다만 스승님께서 아신다면 어떤 불호령을 들을지…….”
망설임을 느낀 강태준은 재차 그를 설득했다.
“수입 규제 조치로 인해 근래 아지노모토 같은 조미료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국내에도 제대로 된 국산 조미료가 필요하죠. 하지만 지금 국내에는 제대로 된 조미료 회사가 극히 드뭅니다.”
“흐음, 저 혼자서 연구하기에는 좀. 전 요리사지 요리 연구가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식품 연구는 전문적인 화학 지식을 갖춘 연구 인력이 필요할 텐데요.”
“그 부분을 제가 해결해 드린다면요? 대중의 식생활을 개선하는 일도 질 좋은 요리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번 일만 성공시킨다면 제가 부산에서 제일가는 요릿집을 차려 드리지요. 장담컨대 명동의 한일관에 못지않을 규모로 말이죠.”
그 말에 안연복의 눈이 커졌다.
“성공하면 정말 요릿집을 차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예. 거기서 후학들을 양성할 요람을 만들고 스승님을 모셔 본다면 그거야말로 뿌듯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승님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실 일이죠.”
“흠.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고민을 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본인 명의로 된 음식점을 개설한다는 소리에 크게 흔들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개인 명의로 된 식당을 열고, 자신의 요리실력을 마음껏 펼치는 일이야말로 모든 요리사의 꿈이 아니겠는가.
‘내가 과연 이런 연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이며 기간을 생각하면 당분간 요리사 직은 개점 휴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차피 취직이 힘든 마당에 계속 염치없게 붙어 있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안연복이 결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한 설비 리스트는 여기 있습니다.”
“황토를 발라 만든 배양실과 중고 열수 추출용 설비, 거기에 정제를 위한 여과 설비, 냉장고 등등 제대로 본격적이군요.”
“최소 공간은 30평, 연구를 시작하고자 하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필수입니다. 이른 시일 내에 준비 가능하시겠습니까?”
“생각을 많이 하셨군요. 이 정도야 예상 범위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까짓것 해 보지요. 쓸데없는 고민이 길었습니다.”
“결심을 굳히셨다니 좋습니다. 그럼 서면부터 작성할까요?”
둘은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었다. 조미료 개발을 위해 초기 투자할 비용은 5천 달러. 제품 개발에 성공할 경우 특허는 공동출원하되, 강태준이 3년 내 부산 해운대나 남포동 인근에 300여 평 규모의 고급 한식당을 안연복 명의로 개설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아직 시제품도 안 나온 제품에 대한 투자치고 무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강태준은 곧바로 개발을 위한 설비 공수에 착수했다. 전쟁 통에 폭격 맞은 식품회사들이 많아서인지 매물로 나온 연구용 설비를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대략적인 준비를 마친 강태준은 다시 박원숙을 찾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