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요리사 영입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안연복도 부산에서의 나날에 금세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강태준의 사정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듣자 하니 사업을 몇 개나 운영하신다 하시더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십니다.”
“허허 뭘요. 그보다 요새 구직 활동은 잘 되십니까?”
“아니요. 생각보다 취업이라는 게 어렵습니다. 식당 구인란을 보고 찾아갔더니 시다 뽑기 하는 것처럼 그릇 닦이부터 시키려고 해서. 마땅히 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요사이 국내 경기가 말이 아니라. 취직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게요. 그래서 말인데 가능하면 혹 잡일이라도 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허허 객을 그렇게 대우할 수 있나요. 편히 계시면서 천천히 할 일부터 알아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럼 며칠만이라도 식단을 맡겨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계속 신세 지는 것이 마음이 좋지 않네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이죠.”
“허허. 좋습니다. 그게 마음이 편하시겠다면 그렇게 하십쇼.”
상대가 거듭 말을 그렇게 하니 사양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강태준과 일행은 다시 하역일을 했다. 잔뜩 일을 마치고 들어오자 집 입구부터 맛있게 풍기는 냄새가 대문 앞을 반겼다.
“음?”
우물가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니, 간을 보던 안연복이 돌아온 사람들을 반겼다.
“아, 모두 고생 많으셨지요. 시장하실 텐데, 어서들 오세요.”
“와 냄새 좋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한 상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오늘 누구 생일이여? 웬 잔칫상을 이렇게 뻑쩍지근하게 차렸소?
“새벽에 이모님이랑 장을 봐 왔지요.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솜씨 좀 부려 봤습니다.”
골동반에 따뜻하게 만 밀면에 꿩고기를 넣은 생치만두, 뜨끈하게 삶은 족발과 밤과 배, 편육을 버무린 생채 각종 지짐이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중앙의 신선로에는 알로 빚은 지단과 완자, 은행 호두 등이 웃기용으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달아오른 틀 안에 육수를 붓자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던 광필이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야, 그런데 밥은 없나?”
“잠시만요. 여기 곧 대령합니다.”
그것이 전부 끝이 아니었다. 뜨끈한 가마에서 꺼낸 시커먼 덩어리를 꺼낸 안연복이 김이 황토 덩어리를 내려놓았다. 두어 시간 구워 표면이 갈라진 황토 틈으로 녹은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코끝을 감도는 황토 냄새에 향긋한 육향이 침샘을 자극한다.
복만이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움메, 안 선생님, 이게 다 무엇이오?”
“황토 오리 진흙 구입니다. 황토에 싼 오리를 가마에서 3시간 반 이상 익힌 거죠.”
질 좋은 황토를 덮은 다음 한지로 감싸고 옹기에 넣어 쪄 낸 것이다.
딱딱하게 익힌 황토를 탁 치자, 흙이 쩍 갈라지며 속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를 조심조심 들어내어 배를 가르니 밤과 대추를 포함한 견과류가 찰밥에 섞여 구수한 향을 냈다.
“이야, 이거 보양식이네. 진수성찬이구만.”
“여기 오징어볶음은 밀전병에 싸서 드시면 되고, 여기 열구자탕은 계속 끓이면서 졸이면 되니 장국을 부으면서 먹으면 됩니다. 조치는 토장이 있어서 제가 맛을 가미해 보았습니다.”
찢은 오리 살을 입에 넣어 보니 단맛과 함께 착 감겨 올라오는 감칠맛이 혀끝을 맴돈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살코기.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기름기를 쫙 빠진 것이 담백하니 잘 어우러지는 맛이랄까. 잘 무친 명이나물에 겨자채를 싸 먹자 신선한 나물의 향긋함과 아삭함이 잘 어우러져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 살다 살다 이런 대접을 받아 보네. 제가 여태 먹어 본 음식 중에 최곱니다.”
“엄마나. 완전 궁중음식이구먼. 이거.”
“안 선생 진짜 요리사 맞네. 어디서 배웠나? 이거 보통 솜씨가 아닌데”
일반인이 그냥 보기에도 칼질하며, 차림상을 보니 쌓은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진심 어린 칭찬에 안연복이 멋쩍게 씩 웃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궁중 대령 숙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오래 배우긴 했는데 아직은 솜씨가 부족해서 흉내만 내는 정도지요.”
“이야, 무려 족보 있는 요리사셨구먼. 황송한데 이거 몰라뵜소다.”
“어인 말씀을요. 자자. 맛있게 드십쇼.”
장정 서넛이 달려들자 두툼했던 오리는 순식간에 뼈만 남았다. 쉴새 없이 그릇을 비우던 복만이가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며 꺼억 소리를 냈다.
“음마, 매일 이렇게 먹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처묵어라, 돼지 시키도 아니고 혼자만 몇 인분을 처먹냐.”
“형님은 무슨 내가 식충이인 줄 아슈. 나도 나름 밥 값하는 놈이니, 밥 먹을 때 뭐라 하지 마소. 그리고 이렇게 마른 돼지 보았소?”
“하긴 니가 그냥 돼지는 아니지. 들돼지지.”
“맛있어서 그렇지. 형님도 잔소리는, 그렇지 않냐 춘삼아?”
“네. 엄청 맛있군요. 진짜 유명한 청요릿집에서 만든 음식 같아요.”
춘삼이의 칭찬에 입가에 기름을 가득 묻힌 덕배도 오리고기를 들고 해맑게 웃었다.
“니는?”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 최고예요. 제일 맛있어요.”
그러자 광필이가 놀리듯이 핀잔을 주었다.
“이 녀석, 동숙 이모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럼 담부터 맛있는 거 안 만들어 준다.”
“앗. 죄송. 사실 이모님 밥 다음으로 맛있어요.”
당황한 나머지 얼른 말을 고치는 덕배에 웃음을 짓는 사람들.
어머니가 밥 위에 조기 살을 올려 주며 말했다.
“맞다. 잠시 깜빡했는데 어제 전화 교환원이 전보를 주고 갔다. 명동에서 연락이 왔단다. 오늘 오후 1시쯤에 연락 주면 된다더라.”
“무슨 일로요?”
“사업상 논의할 부분이 있다더구나. 명동 쪽 영업과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는 듯해.”
식사를 마친 강태준은 자전거를 타고 전화국으로 향했다. 교환원이 손잡이를 돌려 신호를 보내자 뚜두 소리와 함께 전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백종섭 씨?”
“아, 사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간만에 무슨 일이신지요?”
“다름이 아니라, 명동 쪽에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 마담 말로는 이번 달 매출이 많이 감소해서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전화를 마친 강태준이 집으로 돌아올 즈음 설거지를 마친 일행은 거실에 나와앉아 있었다.
후식을 우물거리던 복만이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또 명동입니까?”
“아무래도 조미료 파동 땜시 경양식당 경영에 문제가 생겼나 봐. 게다가 식자재비가 많이 오르는 바람에 운영상 수지가 맞지 않는 모양이야. 문제가 커지기 전에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다.”
“아니 무슨 대안은 있습니까? 솔직히 형님 요리실력이 괜찮은 건 알지마는 그렇다고 파는 걸 만드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젠데…….”
“뭐 나라고 딱히 별수 있겠어. 일단 백종섭 씨나 정 마담과 함께 논의해 봐야지. 일단, 내일 차편으로 올라간다고 했으니 내일 오후 일정 비워 두라고.”
“알겠습니다. 형님.”
그러자 눈치를 보던 안연복이 황급히 나섰다.
“혹 요리 문제라면 저두 데려가 주십시오. 명색이 요리사인데 혹시 식당 문제라면,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한, 사나흘은 체류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빨리 끝날 일이 아니라서요.”
“괜찮습니다. 서울 구경도 할 겸 한번 나들이 가는 셈 치면 되죠. 뭐. 취업은 당분간 힘들 것 같으니 일단 빚이라도 갚아야죠.”
강태준 입장에서는 별로 손해될 것이 없는 제안에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날 강태준 일행은 모터풀 쪽에 배송하기로 한 물품을 싣고 명동으로 향했다.
트럭에서 내려 보니 미리 백종섭과 새로 고용한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빵모자를 벗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백종섭에 강태준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이쿠야. 백 화백님, 간만입니다. 살이 많이 오르셨네요.”
“강 사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염려해 주신 덕에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살이 보기 좋게 오른 백종섭은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덕인지 표정이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보내 주신 그림은 잘 받았습니다. 요사이 작품 활동은 잘 되시고요?”
“배려해 주신 덕에 너무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깨끗하게 세팅된 테이블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다.
“전보 받고 바로 왔습니다. 그럼 실적부터 확인해 보지요.”
“네. 여기 있습니다.”
일일 매출을 적어 놓은 기록부를 보던 강태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출 감소가 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손실이 크지 않아 보입니다.”
“아무래도 지출과 관련된 문제는 몇 달 뒤에 반영되겠죠. 가격이 오르기 전에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조미료를 비축해 두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래도 치즈나 계란 같은 재룟값이 전반적으로 상승했으니, 이대로면 다음 달부터는 적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정 마담의 말에 강태준이 턱을 괴었다.
“흠. 그러면 가격 상승이 근본 문제군요. 그 외에는?”
“사실 근본적인 틀에서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메뉴 차별화 면에서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자체 조사를 해 보니 재방문율이 많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고 말이죠.”
“그렇다면 식단 자체가 물린다는 소린가요?”
“네. 아무래도 경양식으로 승부를 걸기에는 좀. 제가 너무 자신이 넘쳤던 거 같아요.”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정 마담. 그러자 함께 온 복만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메뉴 변경이라. 단순하게 부대찌개는 어떻소?”
“군부대 근처라면 모를까. 문제는 부대고기인데 분쇄육이라도 그렇게 대량으로는 못 구해. 웃돈을 주고 사 온다면 모를까. 이동 거리를 감안하면 수지에 맞지 않고.”
전쟁 후 한국은 햄과 소시지는 고사하고 고기조차 충분하게 공급되지 못할 만큼 육류가 부족했다. 6·25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지인 의정부, 송탄, 동두천, 수원 등지에서 햄과 소시지가 흘러나왔지만, 유통은 일부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유출 가능한 소시지와 햄의 양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
“게다가 부대고기 유출은 원칙상 금지되어 있어. 이문이 엄청 남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굳이 피곤하게 경찰에게 불려 갈 이유는 없지 않나.”
“그럼 황토 오리구이 같은 건 어떨까요? 형님? 엄청 맛있었는데”
“흠. 그거는 품이 너무 많이 들지 않아? 일단 굽는 시간만 서너 시간이 넘으면 아무래도 원료비도 많이 들 테고. 안 그렇습니까. 안 선생님?”
그러자 안연복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실적으로 좀 부담스러운 감이 있죠. 수급할 오리나 육계를 대량으로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들어가는 연료나 수고를 생각하면 가성비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곁들일 반찬까지 만들려면 노동력이 많이 들 겁니다.”
“그렇군요. 아쉽네. 그럼 뭘 팔면 좋을까요.”
“아무래도. 간단하면서도 회전이 빠른 요리가 좋을 것 같은데.”
밑반찬을 많이 준비하지 않고 단품으로 팔 수 있는 메뉴라. 강태준이 의견을 올렸다.
“아, 면 요리는 어떻습니까? 요사이 미국 원조 물자 중 밀가루 공급이 많아서 가격도 저렴하니, 밀가루 음식이 많이 대중화되고 있으니까요.”
“면 요리라면 잔치국수 같은 걸로 말입니까?”
“흠. 너무 일반적인 메뉴 같은데. 더욱이 이 앞에 한일관이 있는 마당에 거기랑 직접 경쟁한다는 건 좀…….”
간단하지만 그만큼 특색을 살리기 어려운 것이 면 요리다. 고민하던 강태준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해물 짬뽕이 어떻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