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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51화 (51/361)

51화 위조 배표

부두에 도착하자 하역을 지휘하던 탁재훈 사장이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손에 항상 애용했던 지팡이가 없어진 것에 강태준이 아는 척을 했다.

“복대는 벌써 푸셨군요. 허리 삐끗한 건 나으셨습니까.”

“고럼,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 저번에 가르쳐준 민간요법이 많이 유용하더구만. 이제 쌀 두 포대 정돈 가뿐할 정도야.”

“하하. 그래도 무리하진 마십시오. 헌데 항구에 정박한 선박이 평소보다 배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요새 돌아가는 사정 알잖나. 중고선 규제 여파로 언제 수출길이 막힐지 모르니까. 처음 실을 때 최대한 많이 싣겠다는 심보지.”

“그 정도입니까?”

“수출 쪽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 수입 쪽은 통관 절차가 갑작스레 까다로워져서 골치일세. 특히 조미료 부분은 거의 수입 길이 막힌 거나 다름없어.”

강태준이 의아해했다.

“아니 왜요?”

“듣기로는 오성그룹 쪽에서 압력을 넣었다는군.”

“오성이 말입니까?”

“그놈들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상황이 아쉬울 게 없거든. 올해 초에 조미료를 무진장으로 사 놓았는데 값이 폭등했으니 갸들이야 손해 본 게 없지 않나. 게다가 정부 쪽에서 회담 결렬 후 무차별로 일본 어선까지 나포하고 있으니 수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당시 한국이 일본에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압력 카드는 평화선이었다. 한일 회담이 결렬되자, 한국은 즉각 평화선을 침범하는 어선 나포를 시행하며 압박을 넣었다.

“한일 관계가 경색되기 딱 좋은 행동이군요.”

“거기다 빌어먹을 오성 놈들이 아지노모토 밀수를 막으려고 포상금까지 내걸었거든. 사주를 받은 사복 경찰 놈들이 눈이 벌게져서 돌아다니니 도저히 뚫을 방도가 없지 그래. 가짜 아지노모토 유통까지 적발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어. 이제는 국민 건강을 위해하는 요소를 차단한단 명분까지 생겨 버린 거지. 세관에 검시관이 하도 들락날락해서 업무에 지장에 줄 정도야.”

“거참, 그딴 조미료가 뭐라고. 사람 잡는군요.”

“아쉽지만 아지노모토 같은 걸 제작 가능한 업체는 아직 국내에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 거 투자해서 개발해 보는 건 어떤가. 혹 개발만 성공하면 떼돈 벌지도 몰라…….”

“하하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태준도 내심 혹하는 부분이었다. 자기가 취급 중인 오징어에도 라이신이나 타우린처럼 감칠맛 내는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총판 전 창고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물량도 적지 않으니 거기서 특정 성분만 추출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 아닌가. 하지만 조미료 개발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론만 알아서 뭐 하나. 당최 뭘 알아야지.’

MSG 즉 글루타민산 나트륨이 다시마에서 추출하는 물질인 걸 듣기는 했어도. 구체적인 추출 방법은 전혀 모른다.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려면 이론을 현실화할 인력이 필요한데, 그럴 만한 고급 인력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면도기 같은 경우는 칼날 잘 다루는 장인이라도 있었지만, 식품 사업 같은 경우에는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먹지도 못할 포도는 시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지.”

아쉽지만 잡생각을 털어 낸 강태준이 서둘러 목청을 높였다.

“자자 일부터 끝내자고. 오늘 하역할 짐이 좀 많아.”

“옙.”

5톤 트럭에 한가득 실린 오징어들이 차례차례 내렸다. 탁재훈의 지휘에 따라 무아지경으로 짐을 나르다 보니 어느새 몸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며 열이 났다.

마침 날도 춥겠다. 코가 간지러워진 강태준이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

“엣취!”

“뭐야, 혹시 감기인가?”

“그건 아닙니다. 코에 먼지가 들어가서요.”

“아이구. 그럼 좀 쉬고 하지. 건강이 재산인데. 쉬엄쉬엄해야지.”

“정말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그런 신호가 왔을 때 적당히 그만둬야 몸이 안 상해. 일단 하역할 물건은 거의 다 실었으니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자고. 어차피 오늘 출발할 것도 아니니까.”

“그럽시다. 슬슬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요.”

오전 일을 마친 일행이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찰나 저쪽에서 돌연 소란이 일었다.

탑승 수속을 밟는 여객선 앞에서 누군가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 자리가 이미 예약이 끝났다니요.”

“아놔, 더럽게 땍땍대는구먼. 당신 자리는 이미 없다니까? 그 표는 가짜고.”

“그럼 제 돈은 누가 책임집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엄한 데서 사기당하고 와서 이러면 안 되지, 그려.”

두 명이 아웅다웅 목청을 높이자 보다 못한 탁 사장이 중간에 끼어 들였다.

“거참 시끄럽군. 대체 무슨 일인가?”

탁 사장이 중간에 끼어들자 아까부터 민원 응대를 하던 직원이 하소연을 했다.

“아유. 사장님. 글쎄 이 양반이 가짜 배표를 사 놓고는 자꾸 막무가내로 따지지 뭡니까.”

“무슨 일인데?”

“속초에서 배편을 갈아타고 부산항에 입항했는데 세관에 내리기 전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이 표를 팔더랍니다. 부산 페리 대행이라 신분증을 제시하길래 아무 의심도 없이 가짜 표를 샀다지 뭡니까?”

“아니 가짜 아니라니까요?”

“자자. 진정하고 그럼 그 배표부터 보여 주게나.”

“예. 이겁니다.”

자신 있게 배표를 건네는 상대에 신중하게 배표를 살펴보는 탁재훈.

인쇄용 돋보기를 꺼내서 상세히 확인해 보는 그.

잠시 후 불쌍하다는 눈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하, 이건 순진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건 승선권 재질부터가 갱지 아닌가. 털렸구만. 털렸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거 요새 유행하는 신종 사기 수법일세. 자 보게 이게 진짜 배표고 자네 것은 이거고. 육안으로 봐도 차이가 확연하지?”

“그, 그렇긴 합니다만. 원래 개별 인쇄물에도 개별 차가 있지 않습니까.”

진짜와 위조품을 코앞에서 비교해 보니 딱 봐도 색이며 문양에서 조금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은 얼굴이 아닌 상대가 계속 떼를 쓰자 난감해하는 직원들. 잠자코 실랑이를 지켜보던 강태준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 자 이걸 보게.”

“아 뭐 하는! 어?”

배표 위에 살짝 분무기로 물을 뿌리자, 금세 잉크가 번지는 위조품. 반대로 진짜 배표는 물이 번지지 않고 물방울만 송골송골 맺혔다. 그걸 본 남자가 탄식했다.

“아! 이건.”

“진짜 배표는 유성 잉크를 쓰지. 게다가 잉크 표면을 왁스로 코팅 처리까지 하니 잘 번지지 않아. 애초에 배표라는 게 물이 닿기 쉬운 물건이니까. 게다가 이 프린팅 부분을 자세히 보면 진짜 배표는 인쇄농도가 전부 일정한데, 위조품은 끝단 색이 엷게 나오지 않나. 이건 십중팔구 사설용 프린트에서 등사한 거야.”

“정말로 그렇군요. 그럼 저는?”

“브로커한테 속은 걸세. 여객선사 사무실 앞마다 똑똑히 적혀 있지 않나. 배표 사는 곳은 정해져 있으니 절대로 아무 데서나 사지 말라고.”

“아니, 그럴 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는 녀석.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녀석이 이내 간절한 어조로 부탁했다.

“제발, 전 저 배를 타야 합니다. 정 안되면 화물칸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네만 도와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여객에 탈 인원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특히 요즘같이 한일 관계가 험악한 시기에 꼬투리 잡히면 골치 아프거든. 잘못하면 영창 가.”

탁재훈이 고개를 젓자 남자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가. 그럼 다음 배는요?”

“다음 여객선도 예약이 꽉 찼다네. 아마 몇 달은 예약 잡기 힘들 거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신문 안 보고 사시나? 한미회담이 파토 났으니 당분간 수출입이 통제될 거란 말일세. 게다가 이번 일본에서 토야마루호 사건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안전 관리 규정이 강화됐거든. 그래서 더 배표 구하기가 무지 힘들어졌어. 당분간 중고선 출입이 대폭 막힐 테니 말이야.”

토야마루호 사건이란 1954년 9월 수송 연락선이던 토야마루호가 잘못된 기상예보로 태풍에 의해 침몰한 사건을 말한다. 기상예보가 틀려 배가 황천길로 간 경우야 그 이전에도 적지 않았지만, 문제는 피해자의 숫자였다. 익사자만 1,100명이 넘을 만큼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데다 일본의 유력 정치인도 있었던 것. 덕분에 이 재해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일로 중고선 규제가 크게 강화되었다.

“근데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한국에서 출항하는 여객선 대부분이 중고선이라 여객선 대부분이 강제 전수 조사에 들어갔다네. 덕분에 운임료 값도 엄청나게 뛰었고. 아마 내년 상반기까지 예약이 밀려서 배표 구하기가 좀 어려울걸.”

“허어, 그럴 수가.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다음, 다음 배라도.”

다급해 보이는 태도가 안쓰러웠지만, 강태준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방법은 없어요. 이미 예약이 전부 종료돼서. 더욱이 요즘같이 민감한 시기에 굳이 일본에 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취업 때문입니다. 그게.”

“취업요?”

“네 제가 직업이 요리사라 마침 지인께서 소개해 주신 호텔 쪽에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헌데 아예 건너가지도 못하다니. 이걸로 취직 활동은 다 물거품이 되어 버렸네요.”

“오 호텔 취업이라. 조리 쪽에선 꽤 출중하신 분인 거 같은데, 좋은 기회를 놓쳐 아쉽겠습니다. 그쪽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안연복입니다.”

“저는 강태준이라고 합니다. 그럼 안연복 씨, 앞으로는 어쩔 셈입니까?”

악수를 마친 안연복이 힘없이 말했다.

“글쎄요. 이런 상황에서의 계획은 생각해 둔 게 없어서. 뱃삯으로 빌린 돈까지 한 번에 다 날려 먹었으니, 이대로 고향에 돌아갈 낯도 없고. 배편 구할 때까지는 당분간 막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곤란하게 되었네요. 여기에 아는 지인이던지, 따로 머물 데는 없나요?”

“없습니다. 사실 제가 고향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요. 사실 이번도 여행으로서는 초행길입니다. 저희 마을이 궁벽진 곳이라 전란 때도 특별히 외부에 나간 사람도 없어서요.”

“저런…….”

풀 죽은 모습에 내심 연민이 든 강태준이 마음이 동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니 예전 하꼬방 시절의 어려움이 생각나 문득 도와주고 싶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럼 갈 곳이 없다면, 일단 우리 집에 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예?”

“아까 말씀을 듣고 보니 사정이 딱하신 거 같은데. 식객 하나 들일 자리는 있거든요. 혹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당분간 머물다 가시죠.”

“이렇게 황송할 데가. 고마운 말씀이긴 하지만 초면에 그렇게 실례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갑작스런 제안에 섣불리 답을 못한 안연복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사람에게 데이고 난 직후라 호의를 선뜻 받기 망설여졌던 것.

그 기분을 눈치챈 탁 사장이 웃으며 안심시켰다.

“하하 강태준 이 사람, 꽤 잘 나가는 젊은 사업가일세. 신원은 내가 보증할 수 있어.”

“그게 아니라 제가 너무 부담돼서.”

“이보게 젊은 양반, 운 좋은 줄 알어, 세상에 이런 호인 만나기 쉬운 줄 아나? 딱한 사정 감안해서 호의 베푸는 거니 더 사양하는 것도 실례야.”

“그럼 염치 불고 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럼 좀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직 일이 덜 끝나서요. 하역만 끝내고 오지요.”

작업을 마친 뒤, 안연복과 함께 집에 돌아온 강태준이 그를 비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새로 개보수를 마친 집 상태는 예전의 폐가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차이가 있었다.

“와, 생각보다 널찍하네요.”

“원래 창고로 쓰려고 놔둔 공간이라 좀 정신없네요. 일단 불편하더라도 당분간만 참으십시오. 조만간에 대청소를 할 테니까요.”

“에휴, 아닙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이 정도면 제게 궁궐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불편한 점이나 따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참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날 이후 식객으로 들어선 안연복은 당분간 강태준 일행과 같이 지내기로 했다 애초에 낯가림이 없는 광필이는 스스럼없이 대했고 가족들 역시 안연복을 가족처럼 취급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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