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50화 (50/361)

50화 MSG

언짢은 듯한 설유하의 말투에서부터 약간의 노기마저 느껴진다.

“아니, 겨우 성별 때문에 말입니까?”

“대단하신 대통령 각하께서 조직에 쓰기 껄끄럽다고 임관을 보류했다네요. 성적도 상위권이었는데.”

“그건 좀 부조리하군요.”

“맞아요. 말이 보류지, 무슨 이유가 그렇게 궁색한지. 지금이 아직 조선 시대인 줄 아시나 봐요.”

“조선 시대 사람은 사실이잖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법조계에 진출하려는 의사는 변함없는 건가요?”

“그거야 당연하죠. 권리는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싸워서 쟁취할 때 얻어지는 거니까요. 법의 목적은 평화지만 그걸 쟁취하는 수단은 투쟁이니 누군가는 선구자가 되어야죠.”

“멋있는 말이군요. 누가 한 말입니까?”

“루돌프 폰 예링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법학자예요.”

그간 맺힌 게 많았는지 설유하의 목소리가 커졌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 주며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 주는 강태준.

차별받는 처지라는 것이 공감대가 형성된 탓인지 대화가 잘 통했다.

그렇게 식사 후 계산에 앞서 설유하를 먼저 내보낸 강태준이 주인장을 불러 슬쩍 물었다.

“매번 단골이라 자주 왔지만, 오늘은 좀 실망스럽네요. 소스 맛이 평소랑 다른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 말에 강태준을 올려다본 주인장이 씁쓸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게…… 죄송합니다. 하필 비축해 둔 조미료가 다 떨어져서. 최대한 신경을 쓴다 했는데 역부족이었던 거 같군요. 사실 지금 조미료값이 너무 올라서. 일본산 수입 규제 조치 때문에 시중에 조미료가 씨가 말랐습니다.”

“아! 그런 이유가.”

“덕분에 조미료값이 금값입니다. 물건을 사고 싶어도 파는 데가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음식값을 확 올릴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재료를 사서 저희가 직접 만들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주인을 보니 아까의 짜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강태준이었다.

제대로 된 조미료를 구할 수가 없으니 맛이 심심해질 수밖에. 정부에서는 외화 유출을 막고 수출입 불균형 해소를 위해 벌인 조치라 했지만 그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이었고 이에 손해를 보는 것은 오히려 국민들이었다.

국내 수입되는 물량이 줄어들자 조미료값이 크게 뛰고 유통량이 크게 부족해진 것이다.

주인장은 미안하다는 듯 거듭 고개를 숙였다.

“불만족스러우셨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반성하는 의미로 오늘은 식대는 안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다음부턴 좀 더 신경 써 주십쇼.”

“네. 손님. 살펴 가세요.”

계산을 마친 강태준이 밖에 나오니 설유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먹었어요. 먹었으니 운동을 해야 하는데 요새 앉아만 있다니까요.”

“그럼 소화도 할 겸 좀 걸을까요?”

“그거 좋지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다.

평소보다 잔잔한 바닷물이 조명이 비추어 물빛에 반사되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언덕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돛단배를 접어 띄우는 아이들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강태준이 그제야 기억이 난 듯 비단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아차, 깜빡했는데 이거 선물입니다.”

“응, 뭐예요?”

“복고양이입니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랍니다.”

목에 달린 방울을 단 채 배에는 복(福) 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앙증맞다.

오른발을 들고 어서 오라 손짓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 설유하도 신기한 듯 고양이 배를 만지작거린다.

“어머 귀여워. 이거 직접 깎은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저랑 사업을 같이하는 목수님이 한 분 게신데 그분이 가르치는 견습공이 만든 작품이에요. 철민이라고 요새 목공을 배우는데 제법 이쪽에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전차 역 앞.

헤어질 시간이 되자 설유하가 문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쯤에서 헤어지겠군요.”

“다음에는 좀 더 맛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네 다음에 또 봐요.”

기분이 좋아진 강태준이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집에 도착할 무렵, 어디선가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노났구만, 노났어. 어째 동생은 군대에 박아 두고 인생 편한가 봐. 아주 살판이 나셨어, 그려.”

“복만이? 복만이냐?”

평상 위에 걸터앉은 녀석이 짐을 올려놓은 채 사과를 먹고 있다. 머리를 벅벅 깎은 것이 이제 제법 군인 태가 나 보인다. 복만이가 씨를 뱉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고모한테 뒤늦게 들었소. 학교 복학했다며. 혼자만 대학 생활이라니. 아주 팔자 편하게 늘어졌구먼.”

“임마, 내가 놀자고 학교 다니는 줄 아냐? 근데 넌 왜 벌써 왔어. 설마 거기서 사고 쳐서 짤렸냐?”

“짤리긴 무슨, 휴가요. 휴가! 형이 학교 다니는 동안 이 동생은 훈련소 간 거 기억 안 나?”

“아. 그랬었나?”

새삼스럽게 몸뚱이를 들여다보니 예전에 비하면 꽤 홀쭉해진 것이 장족의 발전이다.

“다시 보니 살 좀 빠졌는데. 턱선도 날렵해지고 인물이 좀 나아졌어.”

“내가 원래 본판이 좋아서 그렇지. 그보다 왜 사기 쳤소? 여자는 개뿔 아무도 없드만. 시불 배치받고 보니 완전 깡촌이여.”

“그래서 휴가는 얼마나 받았나?”

“한, 삼 주?”

사과 씨를 퉤 뱉으며 대꾸하는 복만이에 강태준이 박수를 쳤다.

“야, 잘 되었구먼. 그러잖아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너 휴가 동안 일 좀 도와라.”

“아니, 사람을 적당히 부려 먹어야지. 내가 형 종이요?”

“그래? 그거 유감이군. 광필이가 조만간 부산은행 아가씨들이랑 미팅 한번 주선한다는데.”

그러자 눈이 번쩍 뜨인 복만이가 사근사근해진 태도로 말했다.

“그거 진짜요?”

“임마, 형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뭐 하기 싫으면 말아.”

“에이. 형 나만 한 인력이 어딨다고? 보소 여기 근육도 생기지 않았나? 나 힘쓰는 일 잘하우.”

“시끄러. 너 말고 대타 구할 거다. 후배 중에 똘똘하고 말 잘 듣는 녀석으로.”

“에이 형님! 그러지 마시고.”

미팅 약속에 넘어간 복만이는 두말없이 작업장으로 복귀했고 강태준은 학업을 쉬는 기간 쉴 새 없이 일에 열중했다.

마침 오징어 풍어로 성수기가 겹치면서 작업량이 폭증한 것.

매일같이 16시간씩 일하는 강행군이 계속되자 출퇴근 시간을 아낄 김에 강태준은 아예 광필이와 재갑이를 불러 숙식을 시켰다. 아직 집을 다 완공하지 못한 재갑이 입장에서는 머물 장소가 필요했고, 광필이도 하숙비가 굳는 마당이니 별로 불만이 없었다.

다 큰 장정들이 아침마다 고봉밥을 먹어 치우는 모습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두 그릇 뚝딱 밥을 해치운 복만이가 그릇을 들고 소리쳤다.

“여기 한 그릇 더!”

“이놈아, 천천히 먹어라. 누가 안 쫓아와. 뭔 놈이 아침에 입맛이 그리 좋나?”

“고모! 밥이 맛있어서 그렇죠. 역시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 거지요. 맨날 기름진 음식만 먹다가 밥 먹으니 좀 살겠네요.”

“맞습니다. 어머님 밥이 최곱니다.”

입가심으로 숭늉을 들던 복만이가 엄지를 척 드는 모습에 외숙모가 실없게 웃었다.

“언제는 외식 노래만 부르던 녀석이. 이제야 철들었네. 맨날 자장면, 자장면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그거야 옛날이야기지요. 게다가 요새 바깥 밥이 너무 맛없어서 나갈 수가 없겠다니까요.”

“글게 말입니다. 그렇게 잘 되던 음식점들이 팍삭 죽어 버렸습니다.”

조미료 파동의 여파로 가장 타격이 심한 곳은 평양냉면집이었다. 본래 평양냉면은 고깃국물과 동치미를 섞어 차게 만드는 것이 원칙. 하지만 아지노모토가 등장한 이후, 감칠맛을 내기 위해 MSG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지노모토. MSG로 알려진 이 재료는 감칠맛을 내는 마법의 가루나 다름없다.

이 감칠맛을 살리려면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48시간 이상 푹 끓여야 하는데, 이건 연료도 많이 들뿐더러 무지하게 수고로운 일.

게다가 그런 수고를 들인다 해도 강한 감칠맛에 길든 사람들의 입맛을 되돌리기 역부족이었다.

말을 듣던 복만이가 내심 툴툴거렸다.

“세상에 그거 좀 안 넣었다고 더럽게 맛없긴 하더이다.”

“시중에 완전 물량이 말랐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특정 수입업체들이 물건을 쟁여 두고 판매를 통제하는 모양입니다.”

“완전 개자식들일세. 먹는 걸로 폭리를 챙기다니.”

“원래 경기가 별로라도 항상 돈 버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죠. 그보다 한미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당분간 이 기조가 지속되겠군요.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신문을 읽던 재갑이가 한마디 했다.

과연 경제란 1면에는 대문짝만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미 회담 결렬! 아이젠하워 깊은 유감 표해.]

[이 대통령, 曰 보상과 사죄 없이 수교도 없다]

한미 간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에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과 안전보장을 미끼로 반일 정책을 포기할 것을 재차 권고했지만, 이만승은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 없이는 회담 재계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양측 입장이 끝도 없이 평행선을 달리자 참다못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이에 이만승도 아예 일정을 당겨 귀국해 버렸던 것이다.

기사를 확인한 광필이가 보곤 혀를 끌끌 찼다.

“이야, 결국 이 박사께서 화끈하게 저질러 주셨구먼. 역시 성깔 있네. 돈 땜시 쪽바리 놈들한테 굽힐 수야 없다는 거겠지.”

그러자 오재갑이 한숨을 쉬었다.

“고작 돈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사정이 좋지 않군요.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경제는 현실 아니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우들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그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곤조도 부릴 때 부려야지. 미국에서 얼마나 원조 자금을 받고 있는지 아나. 총국민소득의 10%가 넘어. 그런데 협상장을 이렇게 파토 내다니 이건 현명하지 못한 처사지.”

“원래 협상에서 많은 걸 얻어 내려면 때로는 무리수도 필요하죠.”

“그렇긴 하다만 이번엔 선을 넘은 거지. 미국 입장에서는 제대로 체면을 구겼으니 이대로 가만있겠어? 백 프로 원조 자금 문제로 걸고넘어질걸?”

그 말에 보리차를 마시던 광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맞습니다요. 미국 같은 부국이 쩨쩨하게. 설마 그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오겠습니까? 명색이 패권국인데?”

“뭘 모르는 소릴. 사람도 열 받으면 뚜까 패기 마련인데, 국가라고 다를 것이 없지 않나?”

그러자 춘삼이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우짭니까?”

“어쩔 수 없지. 순응하는 수밖에. 그건 그렇고. 복만이 니는 대체 몇 그릇째야? 이 자식이 뱃속에 그지가 들었나?”

“야, 보채지 좀 마소. 이것만 더 먹고요.”

서둘러 식사를 끝낸 일행은 곧장 부산항으로 향했다. 오전에 오징어 하역을 위해서는 노동에 투입할 인원이 많이 필요했던 것.

평소보다 많은 배들이 정박한 항구엔 각지에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이 유난스럽게 부산을 떠는 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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