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49화 (49/361)

49화 데이트

영도회 결성 후, 사흘이 지난 시점.

촤르르륵. 책상 위에 펼쳐진 동전을 하나하나 세고 있던 강태준. 주변에 둘러앉은 직원들이 열심히 매출을 정리하고 있다.

“역시, 마음의 상처를 가라앉히는 데는, 돈 세는 소리가 최고야.”

“근데, 정말 생각보다 항해과에 배팅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군요.”

“원래 잘못된 선택은 대가를 치르는 법이지.”

수북이 쌓인 동전 더미를 차곡차곡 자루에 담을 때마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기분.

저번 항해 시합 때 어로학과 대 항해과의 배당률은 무려 1대4 가까이 차이가 났다.

배당차가 그렇게 난 것은 아무래도 상대가 항해과라 그랬다던가. 하긴 할아버지가 조선장에 대대로 천생 뱃놈인 지역민 출신이랑, 외지인 출신의 도련님이 상대라면 누가 봐도 전자를 찍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결과는 강태준의 압승, 항해과는 배까지 잃고 실격패를 당했다.

덕분에 정성택과 5대5로 대금을 나누고도 무려 30만 환이 넘는 수입을 올린 것이다. 손가락에 침을 묻히며 지폐를 세던 김광필이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보다 형님, 계속 이렇게 일만 하니 무료하군요. 기분도 꿀꿀한데 이참에 아가씨들이랑 미팅이라도 하는 건 어떻소?”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거참 형님도, 대학물 먹으며 자유 연애 한 번 못 해 보면 그것만큼 아쉬운 게 어딨소? 인생 팍팍한데 이럴 때일수록 미팅이라도 한번 해 봐야지. 요 근처에 부산은행 직원들이 무척 참하다던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오재갑. 강태준도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임마, 정신 좀 차려라. 니가 그런 짓 할 군번이냐. 일없다.”

“그럼 형은 빠지쇼. 재갑이 너도 대학생인데 미팅 한 번은 해 봐야지.”

“글쎄요. 저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게다가 집안에서 약혼 이야기가 나오는 판이라.”

“임마, 연애 한 번 못 하고 바로 결혼이라니 너무 슬프지 않아?”

“결혼도 생각하지 않고 교제를 청하는 건 실례지요. 혼인을 빙자 간음죄 모르십니까?”

“야, 임마, 니는 마, 나이도 어린 게 왜 이렇게 꽉 막혔나?”

돈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일행 앞에 여자 한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챙 넓은 모자에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플레어스커트.

천생 아가씨 같은 차림이 되려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아가씨였다.

“이야, 저 아가씬 누구? 어디 양갓집 규순가?”

“그러게요. 이 근방에서 보기 드문 처자인데? 옷이 참 샤방샤방하네.”

누굴까 생각도 잠시 잠시 강태준을 먼저 알아챈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태준 씨?”

“아니 유하 씨, 여긴 웬일로?”

수줍게 머리를 넘긴 그녀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 징발 재산 보상 청구와 관련해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번에 서류 수속이 완비되었거든요.”

“아 그래요? 근데 여기까지는 왜?”

“집으로 찾아갔더니 부재중이라고 하셔서. 덕배라는 아이가 대뜸 이쪽 주소를 알려 주더라고요.”

서류를 내미는 설유하의 행동에 얼른 봉투를 받아든 강태준.

잠시 무안해진 강태준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었다.

“앗, 죄송합니다.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아녜요. 업무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근데 이분들은?”

“아니 학교 후배들입니다.”

“오재갑이라고 합니다.”

“김광필입니다. 레이디,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우리 형님과는 혹시 무슨 관계가?”

“아 예전에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도와주셔서…….”

“호오. 그것참 공교롭군요. 은인이라. 뭔가 핑계로 삼기 좋은 관계네요.”

“네? 그 무슨”.

후후 의미심장한 웃음에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설유하.

눈치 빠른 오재갑이 서둘러 광필이를 잡아끌었다.

“허허, 이 형이 갑자기 헛소리를.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 나누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

“아니, 왜 분위기 좋았는데? 야, 너는 등 밀지 마.”

“형님. 쓸데없는 짓 말고 그냥 가요.”

일행이 자리를 피하고 나자, 둘만 남은 남았다.

민망한 듯 귓불 주변을 매만지는 설유하.

어색함을 피하려는 듯 딴짓을 하던 강태준이 입을 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항상 똑같아요. 공부와 일, 일하다 공부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이죠.”

“공부랑 병행이라니 바쁘실 텐데 너무 시간을 뺏은 게 아닌가요?”

“괜찮아요. 사실 오늘은 바람 쐬러 나온 거예요. 요새 삼촌한테 민법을 배우는 중인 스파르타식이라 엄청 무섭거든요.”

혀를 살짝 내밀고 웃는 모습에 은근 마음이 편해진 강태준.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한 강태준이 서둘러 말했다.

“그럼 이왕 마실 나온 김에 시장 구경도 할 겸 차 한 잔 어떻습니까?”

“흠…… 그럴까요? 하지만 오후에도 밀린 공부가.”

“원래 공부란 게 적당히 쉬어 주면서 하는 게 더 효율이 좋지 않습니까. 고무줄도 매번 팽팽하게 당기면 끊어지는 것처럼. 하루쯤 일탈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럴까요?”

“그런 겁니다. 자.”

손을 내미는 강태준에 설유하도 못 이기는 척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

방향감각을 잊을 만큼 붐비는 시장 안.

수산시장 한 편엔 펄떡거리는 생선과 살아 움직이는 대게가 기어가고 있고, 한 편에는 갓 따온 생굴이 그득그득했다. 몸빼를 입은 자갈치 아줌마들 사이로 경쟁하듯 목청을 높인 호객꾼들이 보인다.

“자자. 골라 골라! 한 마리에 3환!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돌문어요.”

“문어가 흐느적거리는 게 신선한 거 맞소?”

“에이, 요놈이 죽은 척하는 거지. 쿡 찌르면 보소. 아주 펄펄한 거?”

“거, 한 마리 주이소.”

“예에! 여기요. 앗, 어이, 이런 망할 괭이 새끼를 봤나? 야 거기 안 서?”

물건을 파느라 한눈을 팔던 사이, 생선을 낚아챈 고양이가 부리나케 내달린다.

그사이 쿡 찔린 문어가 덮고 있는 뚜껑을 열고 스르륵 빠져나가는 통에 난리가 난 상인들. 연이어 몰려드는 인파에 놓치고 말았다.

낮에 찬거리를 사러 온 주부들과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은 활어와 선어, 키조개와 홍합, 말린 멸치 등 온갖 해산물이 넘실대었다.

한눈팔린 사이 신기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어머, 저거 보세요.”

듬성듬성 쪼갠 참나무를 나무째로 가져다 놓은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참나무 위에 갓을 드러낸 버섯이 무척이나 싱싱해 보인다.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는 설유하.

모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와, 버섯이 나무에서 자라네요. 이런 거 처음 봐요.”

“그러게. 표고가 탐스럽게 익었네요.”

과연 수확 후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더욱 생기 있어 보이는 버섯.

눈치 빠른 상인이 갓머리 하나를 똑 따서 앞으로 내밀었다.

“한번 드셔 보소. 아가씨. 영도 봉래산에서 오늘 새벽에 따온 물건이외다. 보소, 맛도 좋고 영양도 끝내줍니다.”

“어머 이거 그냥 먹어도 돼요?”

“물론이요. 사비스요. 사비스! 아가씨가 이뻐서 주는겨.”

버섯을 잘게 찢은 그녀가 시식대에 놓인 간장에 찍어 슬쩍 맛을 보았다.

오물오물 맛을 보던 설유하가 강태준의 입가에 버섯을 들이밀었다.

“자, 태준 씨도 아- 해요.”

엉겁결에 버섯을 받아먹고 보니 입안에서 은은한 향이 흘러나온다.

곱씹을수록 풍부해지는 향. 고기같이 탄력 있는 식감이 맛이 좋다.

흐뭇한 눈으로 그 모양을 지켜보던 상인이 한마디 했다.

“거, 꿀 떨어지는구먼. 색시랑 신랑이 잘 어울려.”

“아저씨도 참. 저 처녀거든요?”

“어이쿠, 이거 몰라 봤구만. 이녁의 입방정 보소. 주책없이 미안허이.”

“괜찮아요. 뭐. 우리가 잘 어울리나 봐요. 그쵸?”

웃는 낯으로 팔짱을 끼는 것이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다.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진 강태준이 지갑에서 지폐뭉치를 꺼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이거 다 주십시오.”

“이야, 손이 크시구만. 복 받으소.”

“거, 많이 파십쇼.”

한 아름 버섯을 챙긴 강태준. 그사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설유하가 손가락을 들었다.

“우리, 저기! 저기도 가 봐요.”

“어디 말입니까?”

가리킨 곳을 보니 꽃가게 하나가 보인다.

가을 향기를 가득 담은 국화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듯 바람에 살랑거린다.

고개를 들여 숨을 들이쉬자 진한 국화 향이 온몸을 적셨다.

한동안 꽃구경에 빠졌던 둘은 다시 주위를 돌아다니며 시장 구경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설유하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피곤해요?”

“이렇게 오래 걷는 게 간만이라 어디 좀 쉬어 가죠. 좀 출출하지 않아요?”

“그러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품에서 시계를 꺼내 보니 벌써 6시가 넘었다.

“그럼 배고픈데 요기라도 하고 갈까요?”

“요기보다는 식사하고 가죠.”

굴다리 위를 지나가다 보니 판잣집 사이로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가 찾은 곳은 평소 맛집으로 잘 알려진 부전 경양식당.

당대에는 고급스럽고 깔끔하기로 입소문이 나 강태준도 자주 찾았다. 간이 잘 되어 까다로운 강태준의 입맛에도 잘 맞고 다른 곳보다 위생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평소보다 사람이 드문드문한 것이 딱 식사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여기 돈가스 두 개 주세요.”

뜨끈뜨끈한 김을 내뿜는 돈가스에 카레를 얹은 모습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나이프로 슬쩍 잘라 낸 강태준이 소스를 찍어 입 안에 넣었다.

‘음?’

한 입 다시 먹어 보니 이게 웬일? 육질은 괜찮았지만, 카레에서 특유의 감칠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이드 디시로 나온 스프는 역시 밍밍하기 짝이 없다.

수저를 뜨다 말고 슬쩍 눈치를 보니, 먹성 좋은 설유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에 열중했다.

“이거 평소보다 간이 좀 안 된 거 같은데.”

“음, 담백하긴 해도 먹을 만한데요? 매번 잘할 수야 없는 거죠.”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거 같아 괜스레 더 미안해진 강태준이었다.

“맛없으면 안 먹어도 됩니다. 딴 데 갈까요. 그럼?”

“에이, 정말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주인장이 준비한 성의가 있는데 그냥 가면 그렇잖아요.”

배시시 웃는 설유하에 여전히 미안해하는 강태준. 분위기를 알아차린 그녀가 슬쩍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복학했다면서요. 다시 학교 다니니까 어때요?”

“뭔가 젊어지는 기분이더군요. 젊은 사람들이랑 어울리니 활기도 생기고. 새로 친구도 사귀고 여러모로 자극되는 거 같지요.”

내심 진지한 소리였지만 강태준의 말이 웃겼는지 그녀가 호호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하, 뭔가 늙은이 같아요. 그래 봐야 고작 몇 살도 차이 안 나잖아요.”

“재학생으로서 3년 차이는 완전 노땅이죠. 그게 부담스러운지 꼬박꼬박 선배 대우해 주는데 그게 좀 부담스럽더군요.”

“하긴 이해가 가네요. 그 나이 또래에는 몇 살도 큰 차이일 테니, 그럼 학업 하랴 사업까지 같이하려면 힘들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뭐 이번에 여유가 생겨서 괜찮습니다. 의도치 않게 강제로 몇 주 쉬게 되어 버렸지만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실습 문제로 좀 트러블이 생겼거든요.”

강태준이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자, 의문부호가 생긴 눈동자에 궁금증이 어렸다.

잠시 후 잠자코 이야기를 경청하던 설유하의 얼굴에도 노기가 서렸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경우가 있어요? 그렇게 차별적일 수가. 실습 배정을 그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요?”

“부조리가 원칙을 덮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죠.”

“하긴, 학교에서만 부조리가 있는 것도 아니죠. 저번에 합격하신 이해연 변호사님도 여자라는 이유로 판사 임관이 거부되었다 하더라고요.”

“이해연이라면?”

“이번에 고등고시에 최초로 합격하신 여성 변호사님이세요.”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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