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영도회 창설
“부르셨습니까. 교수님?”
“항해과랑 실습선을 걸고 경기를 치렀다지?”
“들으셨습니까?”
“들었고 말고…… 영도 시내에 소문이 다 났는데. 그걸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전에는 패싸움까지 했고?”
신교수가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허락도 없이 학교 기물로 시합이라니, 자네가 정신이 없어, 있어? 복학한 지 대체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대형 사고를 치나?”
“죄송합니다.”
“지금 난리도 아닐세. 이억기 군은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군.”
“그노마, 아니, 이억기 녀석이 무슨 소릴 했길래요?”
“몰라서 묻나? 문병 다녀온 학생들 말로는 몰골이 영 아니더구만. 얼굴이 멍투성이에 퉁퉁 붓고 갈비뼈까지 나갔다는데. 어금니도 두 개나 흔들거린다더군. 폭행으로 고소할 거다, 말 거다, 난리도 아닐세. 자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물에 빠진 놈 구해 줬지요. 사실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그 정도면 싼 거 같은데 그냥 익사하게 내버려 둘 걸 그랬나?”
감정이 실려 너무 세게 때렸나?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대 더 팼을 텐데.
한 점 후회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신 교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군, 그게 자네가 할 말인가?”
“뭐 독단적으로 시합을 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발단은 학교의 부당한 처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시합 과정에서 불거진 분쟁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니 무슨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처벌이든 받겠다? 그 말 진심인가?”
“예. 학교를 그만두라면 그만두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죄가 없으니 처벌은 저 하나로 끝내 주십시오…….”
“허어, 무책임하긴! 이보게 강군 자네야 어차피 학교를 때려쳐도 겁날 게 없으니 상관없다는 심보인가? 어차피 벌인 사업이나 하면 되니 학업에는 별 미련 없다 그런 생각이야?”
“그건 절대 아닙니다.”
“쯔쯔, 얌전한 사람이 사고 치면 무섭다더니 자네가 그 짝이군. 그만두긴 뭘 그만둬. 자네가 이렇게 그만두면 자넬 복학시킨 내 꼴이 뭐가 되나?”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던 신영우 교수가 불쑥 서류를 던졌다.
“3주간 정학 처분일세.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지. 당분간 자숙하고 있게나.”
“예? 그게 답니까?”
학교의 규정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든 데다 안전사고까지 발생한 만큼 이번 문제는 얼마든지 큰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중징계까지 각오했던 만큼 이렇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건 뜻밖이었다.
그러자 신 교수가 담담히 말했다.
“어젯밤에 학교에서 징계위가 열렸다네. 항해과 쪽에서는 예상대로 강도 높은 처벌을 요구하더군. 근데 김재덕 교수가 길길이 날뛰지 뭔가. 그래 자넬 징계하면 교편을 내려놓겠다며 극구 반대하더군. 이런 일로 잘린다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이야.”
“그런 일이…….”
“김 교수가 그렇게 노발대발한 건 처음 봤어. 애초에 실습선 배정에서 형평성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이니 교육자로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이야. 학과 간에 분쟁이 벌어진 이유는 분쟁을 방치한 학교 책임도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걸세.”
“제가 교수님께 폐를 끼쳤군요. 면목 없습니다.”
짐짓 누그러진 신 교수가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김 교수님께 감사하다 전하게. 강군. 그분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두리뭉실 끝날 일은 아니었을 걸세. 자네가 총대를 맨 이유는 십분 이해하지만, 해결 방식이 잘못됐어. 다툼을 키우기보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자네가 다툼을 중재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튼 당분간 자숙하고 조용히 있게. 제발 더는 사고 치지 말고.”
“예.”
이어지는 잔소리에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강태준은 솔직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과연 자기가 가만있었다면 이렇게 일이 해결되었겠는가? 하지만 반성하는 척을 해서 나쁠 건 없는 만큼 일단은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면담을 마친 강태준이 학장실을 나오자, 부리나케 달려온 오재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3주 정학으로 끝났네. 김 교수님께서 적극 옹호해 주신 덕이지.”
“휴우. 그 정도 선에서 끝나서 다행입니다. 혹 선배가 잘못될 경우 어로학과 학생들을 모아 공동으로 탄원서를 제출할 생각이었습니다.”
“탄원서라니. 뒤에서 고생이 많았구먼.”
“아닙니다. 어로과 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그렇게 싸우다니 정말 용감한 일을 하셨습니다.”
오재갑은 십 년 감수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습 과정이 없는 1학년인데다 습격 사건 때 빠졌던 만큼 이번 일에 빚을 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김광필은 뭔가 맘에 들지 않는지, 입을 비죽거렸다.
“젠장. 연대 책임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솔직히 지들이 먼저 단초를 제공해 놓고는 뻔뻔스럽긴.”
“사람이 죽을 뻔했으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그보다 실습선 배정은 어떻게 되었나?”
“갸들도 사람인데 여기서 뺄 수 있습니까. 이번 실습선은 우리 어로학과 쪽에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군.”
“결과가 명명백백한데 더 개겨 봐야 쪽팔리기만 하죠.”
“이억기 그노마는 어떻게 됐나?”
“뭐 이번에 완전 찍혔습죠. 지가 항해과 대표랍시고 어떻게든 해 보겠다 나온 건데 지 때문에 진 거나 다름없으니 이미 학과에 소문이 다 나서 아주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는 중입니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진 만큼 학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양 과에 쌓인 불만이 이렇게 표면적으로 터져 나오자 그간의 부조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송규익과 이억기도 강태준과 같은 처분을 받았다. 사정을 들은 오재갑이 말했다.
“전복한 뱃값은 이억기 측에서 물어내기로 했답니다. 아무래도 학교 기물을 파손한 건 그쪽이니, 교내 교재 판매를 전담하는 것도 이원화할 예정이랍니다.”
그 말에 김광필이 뿌듯한 듯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우리 쪽에 청구했음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그보다 성적 장학금은 물 건너가서 아쉽네요.”
“얼씨구? 니가 장학금 받을 실력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아니, 사람 무안하게 시리. 말이라도 이쁘게 해 주면 덧나지 말입니다.”
“왜 이래. 이번에 많이 벌었지 않나? 그래서 이번에 얼마 걸었어?”
“에이 와 이라십니까. 쪼끼. 소고기 사 먹을 값 정도만 벌었죠.”
멋쩍게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에 웃던 강태준이 지갑을 꺼냈다.
“능구렁이 같긴. 옛다. 이걸로 애들이나 불러 모아 봐.”
“아니 뭔 돈을 이렇게 많이 줍니까?”
두툼한 지폐뭉치에 놀란 광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긴 왜야 이번에 고생한 애들 밥이라도 사 줘야지. 그걸로 먹을 거 사 오고. 어로학과 애들한테 공지 때려.”
“얼마나 말입니까?”
“오늘 저녁 시간 되는 애들이면 다 불러.”
강태준이 학생들을 초대한 곳은 그가 운영 중인 고물 창고였다. 마침 쓸 만한 고철 스크랩들이 전부 팔려나간 터라 대인원을 모일 장소가 생긴 것이다.
저녁 시간 초대를 받고 회식 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버러진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바비큐 그릴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 가고 있다. 토치를 들고 불을 붙이는 강태준에 코를 벌름거리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오오. 이게 다 뭐 신가, 냄새가 아주 좋군요”
“초벌구이 중이지 돼지 바비큐라고 아나?”
“와우 맛있게 생겼네요.”
“자자. 오늘은 내가 쏘는 자리니 아무 걱정 말고 맘 것들 드시게. 고기 말고 다른 것도 많아.”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진 통삼겹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참석 인원은 서른 명. 맥주와 막걸리를 비롯한 푸짐한 먹거리들이 무한으로 제공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막걸리를 나누는 도중 이번 일에 대해 성토하는 자리로 변했다. 이야기 주도하던 오재갑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일을 무척 통쾌하게 귀결되었지만 언제라도 또 이런 일이 반복될 확률이 높다는 게 문젭니다. 이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무래도 항해과 놈들이 학생회부터 교수회까지 꽉 쥐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이야 양보했지만, 매번 합리적인 결과를 기대하긴 수도 없는 일이고.”
“맞아요. 제 놈들도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아마 앙심을 품고 있을 겁니다. 이번에 면목이 상했으니 후일 기회를 포착하면 언제든 보복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결론은 힘이죠. 힘. 우리도 뭉쳐야 합니다. 다시 또 호구가 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 우리가 이렇게 계속 역차별을 받는 이유가 뭐겠나? 학내에 우리의 권익을 대변할 모임이 없어서가 아니겠나? 그럼 뭐라도 하나 만들어야지.”
“그냥 동창회도 있지 않나?”
“조직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산으로 가는 법이지. 게다가 같은 학과라는 걸 빼면 소속감도 없는 사람들 아닌가. 무늬만 그럴듯한 동창회 말고 소수 정예가 필요하이.”
“옳소!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부당하게 차별을 받거나 부조리를 강요받았을 경우. 최소한 협상을 시도할 주체는 있어야죠.”
그 말에 재진이가 탐탁잖은 듯이 말했다.
“사조직을 만들자는 겁니까. 제2의 학생회 같은 느낌이라면 학교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을 거 같은데?”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거 없네. 애초에 학교랑 척지고 대립하자는 게 아니야. 단지 우리 목소리를 내자는 거지. 애초부터 학교의 주인은 학생 아닌가?”
“거, 지들이 뭘 어쩔 겁니까? 애초에 불법도 아닌데, 우리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지요.”
“좋아. 그럼 모임 이름은 뭘로 하는 게 좋겠나?”
“흠. 영도회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너무 색깔이 드러나지 않게. 초대 회장은 여기 계신 태준 형님으로 어떻습니까?”
“그거 찬성입니다.”
“태준 형님이라면 믿을 만하지요.”
분위기가 요상해지자 술잔을 홀짝이던 강태준이 짐짓 부담스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잠깐, 당사자 의견도 듣지 않고 다들 뭐 하는 건가?”
“에이. 형님도 참. 여기까지 와서 빼는 건 아니죠.
“이미 낙장불입입니다.”
재진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모두 박수!!! 그럼 우리 초대 영도회 회장님. 취임식에 앞서 취임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못 이기는 척 맨 앞에 떠밀려 나온 강태준이 한숨을 푹 쉬더니 소주잔을 들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중임을 맡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어로학과의 권익을 대변하느니 저항이니 그런 거창한 대의는 잘 모르겠지만 노땅 복학생으로서 학과를 위해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장 자격으로서 첫 특명을 내리겠습니다! 일단 오늘 하루는 다 잊고 코 삐뚤어지게 마십시다. 어로학과를 위하여!”
“위하여!!”
짝짝짝짝짝~~~!!
광필이의 선동에 휩쓸려 거하게 박수 치는 학생들.
바비큐의 뜨거움이 뇌로 전염되어서일까. 머리가 술기운에 돌아 버린 탓일까.
이후 밤새도록 이어진 파티는 그야말로 광란의 장이었다.
부산 카바레 홀에서 빌려 온 축음기 스피커에 맞춰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진 것.
머리에 넥타이를 맨 채 손짓 발 짓을 해 가며 흥겹게 춤을 추는 광필이.
반쯤은 취해서 맛이 간 학생들 대다수는 다음날 일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이때 결성한 영도회가 후일 한국 사회에 어떤 지각변동을 가져오게 될지는.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