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한판 승부
갈 지(之)로 꺾어 달리는 배를 따라 강태준의 배가 뒤를 쫓았다.
“좌현 60도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돛단배는 달리면서도 속도가 거의 줄지 않았다.
과연, 뱃일을 오래 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숙련된 솜씨.
김광필이 혀를 내둘렀다.
“송규익 저 자식 제법인데요. 배 몰이 실력이 장난 아니네.”
“제법 바람을 탈 줄 아는군.”
항해과에서 대표로 내세운 것이 그저 겉멋은 아니었는지 태킹 실력부터가 장난이 아니다. 몇 차례 방향을 선회하며 꺾어 달리는 배.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자 김광필이 말했다.
“쫓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 거리는 괜찮아. 무리하게 쫓아가려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되어 있지. 아직 목적지까지 많이 남았으니 꺾어 가는 것보다 일단 거리를 벌리지 않은 것이 좋아.”
강태준은 생각이 달랐다. 뱃머리를 바람에 바짝 대 갈 수 있지만, 너무 가까이 대어 가면 속도가 오히려 감퇴하는 법.
“이미 늦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나중을 위해 체력을 아낄 필요가 있어.”
저런 식으로 선회를 자주 하게 되면 그만큼 체력이 빨리 깎일 수밖에 없다. 바람 방향에 맞춰 중심을 잡느라 배 안에서 잠시도 쉴 틈 없이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
막판 스퍼트를 내려면 지금은 힘은 아껴 두는 것도 전략이다. 강태준은 무리하지 않을 생각으로 이물돛을 당김과 동시에 허리돛을 약간 흘리면서 균형을 맞췄다.
그사이 배는 빠르게 항주했다. 애초에 배의 경우 코스의 각 구간을 직선으로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지그재그로 가는 것이 지름길.
맞바람이나 옆바람이 불 때는 배의 방향을 과감하게 전화하거나 급선회를 하는 것이다.
이물이 풍상으로 들어갔다. 허리돛에 풍압이 걸리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다.
가속도가 붙은 송규익의 배가 점점 거리를 벌렸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이억기는 뒤를 보며 의기양양해 했다.
“큰소리쳐 놓고는 저 꼬라지를 보십시오.”
“실력도 없는 것들이 말이 앞서는 법이지. 여기서 세 창 이상 거리를 벌린다.”
송규익은 호기롭게 외쳤다. 무리가 될지언정 여기서 거리를 벌려 승부를 결정지을 참. 그렇게 두 척이 생도를 넘어 아치섬에 닿을 무렵, 송규익의 배는 벌써 멀찌감치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형님, 이러다 싸워 보기도 전에 지겠소!”
“걱정 마라. 아직 채 절반도 안 왔어.”
“그래도!”
“우리는 우리 페이스대로 간다.”
초조해진 김광필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강태준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현대적인 요트의 경우 설계 자체가 경주에 최적화가 되어 있어 바람에 가깝게 대며 항해하지만 이렇게 오래된 평저선의 배는 횡류 방지 장치가 없어 훨씬 더 흐름을 타기 까다롭다. 게다가 속도를 내면 낼수록 컨트롤이 힘들어지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
과연 강태준의 생각대로 승부를 과하게 의식한 상대방은 벌써 마스트 앞쪽이 심하게 펄럭이며 물보라가 일고 있다. 돛대 꼭대기에 엄청난 힘이 가해지자 배의 이물이 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저러다 훅 가지.’
그 사이 돛단배가 바다 위 부표를 돌자 진행 방향이 바뀌며 역풍으로 변했다. 귓불로 바람을 느끼자 고개를 돌렸을 때 양쪽 귓불에 바람이 비슷하게 와 닿는다면 그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다.
뒤바람이 몰려오는 것을 알아챈 강태준이 서둘러 선회를 명했다.
“양쪽 돛을 반대로 펴!”
키를 밀며 뱃머리를 바람의 정면으로 돌리니 반대 현 측으로 뒤틀린 돛이 바람을 받으며 세차게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 강태준은 키와 아딧줄을 당겼다. 활대가 순식간에 180도까지 돌며 선회하자 옆바람을 흠뻑 머금은 돛이 복어처럼 크게 부풀며 속도가 붙었다.
돛이 바람을 잃는 시점과 배가 바람을 완전히 거스르는 시점을 일치시킨 것. 순풍을 받은 삼각형 돛은 앞쪽으로 조금 부풀어 올랐고 바람에 탄력을 받은 배는 수면 위를 스치듯이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저쪽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아치섬을 돌던 와중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주의력이 흐트러진 이억기가 결국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이런!”
“정신 못 차려? 속도가 떨어지고 있지 않나!”
바람길에 따라가던 선체는 힐링하며 돛이 크게 펄럭인다.
맞바람에 밀려 물보라를 일으키는 배. 배를 점점 더 풍상으로 향하도록 조정하면서 바람 방향과 너무 가까워졌다.
뱃머리가 자꾸만 바람길로 들어가려 하자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송규익. 마음이 다급해진 이억기의 손이 분주해졌지만 지친 탓인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경기 초반에 범주를 하며 너무 많이 힘을 써 버린 탓이다.
“뒤 돛을 내려!”
그새 바람을 고물 쪽으로 바싹 붙인 강태준은 양쪽으로 돛을 펼친 채 상태로 항주하고 있었다. 상대 배와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자 강태준이 본능적으로 기회를 직감했다.
“여기서 잠그고 간다! 돛을 2단으로 묶어!”
옆심이 없는 배의 무게중심이 쏠리자 순식간에 옆으로 기울었다.
멍애가 물에 닿을 정도로 누운 배. 이윽고 옆바람을 받아 달린다.
돛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자 바람의 압력으로 인하여 키가 떨린다. 그 진동이 손잡이까지 느낄 정도. 잠시 후 창다리(방향키)로 울림이 오자 김광필이 다급히 소리쳤다.
“형님. 이건 너무 빠른데요. 여기서 최소 한 줌은 늘어 주고 가야 합니다,”
“아직이다. 속도가 충분하지 않으니 더 올려!!”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배가 전복될 위험이 증가한다. 원칙대로라면 여기서 풍압을 낮추기 위해 돛을 더는 게 상식적이지만 지금은 승부수를 걸 때.
바람이 강해지자 상체를 뱃전으로 내민 강태준. 강태준이 속도를 더 높이자 풍압에 의해 부풀어 오른 돛이 세차게 떨렸다.
쏴아아아아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투툭투둑 떨어지는 빗소리. 돛이 물에 젖어 무거워지자 오히려 속도가 배가 되었다.
쏴 하며 물살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파도를 가른 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사이 부랴부랴 배의 고삐를 잡은 송규익이 다시 방향을 잡아끌고 나갔다.
“저기, 저기 보인다!”
“대체 누가 앞서는 거야?”
배와 상대의 물표가 차근차근 불거지고. 기다리던 학생들의 시야에 잡힌다.
육안으로 본 두 배의 속도는 비등비등한 수준. 휘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배들. 가까워지는 두 배의 모습에 부둣가에 선 사람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어렸다.
‘제기랄!’
송규익은 초조했다. 겉으로 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이미 강태준의 속도가 배가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 강태준의 배가 추월하는 모습에 허리돛을 당긴 송규익이 승부수를 걸었다.
“돛을 더 풀어!”
“여기서요?”
바람에 평행하게 맞춘 돛이 수직 방향으로 부풀어 오르며 압력을 머금었다.
그때 갑자기 오른쪽에서 강한 돌풍이 불었다.
배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흔들리는 통에 곧장 체중을 반대로 싣는 강태준.
하지만 여전히 돛이 크기 때문에 휘청임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비바람이 치는 상황에서는 조종조차 쉽지 않은 법.
“어엇!”
때마침 큰 너울이 밀려오며 송규익의 배가 다시 갸우뚱하고 흔들렸다. 파도에 배가 출렁이며 균형이 흐트러지자 돛대가 세워진 멍에의 왼쪽에서 풀려나오는 용두줄.
당황한 이억기가 줄을 잡기 위해 허공을 허우적거렸지만 반 박자 늦게 빠져나가는 줄이 그대로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 용두줄이 풀리는 순간 활대가 반대편으로 넘어가 버린 배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전복해 버렸다.
“앗, 저런!”
“사람이 물에 빠졌어!”
항구의 아우성에 뒤를 돌아본 강태준은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뒤를 보니 물에 빠진 두 명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 자꾸 물속으로 빠져드는 다리에 열심히 헤엄쳐 보는 송규익이었지만, 이억기는 쉬이 물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저런!”
상대가 위기에 빠진 것을 감지한 강태준은 배를 급선회했다. 돛을 접지 않고 그대로 급선회한 튼 강태준이 서둘러 구명줄을 던졌다.
“어서 잡아요!”
송규익은 간신히 구명줄을 붙잡았지만, 이억기는 물속으로 가라앉은 듯,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벗겨진 구명조끼를 본 강태준이 혀를 찼다.
“이런 칠칠치 못한 놈이!”
“형님!!”
고민할 틈도 없이 강태준이 물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자. 입안으로 짠물과 함께 세찬 물결이 흘러들어 온다.
흐린 날씨에 어두운 물속이지만 아직 시야로 확인할 만큼은 되었다.
쥐가 났는지 버둥거리는 그림자에 다가서는 강태준.
버둥거리던 녀석이 손사래를 치자 강태준이 뒷 목을 휘어잡았다.
“이 새끼가, 가만 안 있어?”
자꾸 목을 감아 들려는 녀석이 저항하자 관자놀이를 후려치는 강태준.
몇 대를 연거푸 얻어맞은 이억기가 젖은 빨래처럼 늘어지자, 강태준이 멱살을 끌고 물 위로 솟아올랐다. 그제서야 강태준을 본 김광필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얼른 올라오십쇼. 어서!”
그새 배가 전복되는 광경을 눈앞에서 본 부두 쪽은 이미 난리도 아니였다.
구조대가 출동하고, 곧바로 엔진을 켠 발동선이 몇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둘러 갑판 위로 이억수를 끌어올리자 녀석은 이미 의식이 없다.
곧이어 흉부 압박을 실시하는 강태준이 강하게 가슴을 눌렀다.
“커어억!”
심장 어림에 가해지는 강한 압박에 바닷물을 한 됫박 토해 내는 이억기.
맹해 보이는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자, 화딱지가 난 강태준이 싸대기를 후려갈겼다.
“아 띨띨한 자식이 정신 못 차려? 이 새끼야, 눈 똑바로 떠!”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제서야 숨을 토해 내는 녀석.
다행히 생명이 지장이 없는 듯하자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내쉰 강태준이 녀석의 볼을 툭툭 치며 말했다.
“경기는 어떻게?”
“지금 그게 문제야? 시합 끝났으니 닥치고 병원부터 가라. 임마.”
숨이 돌아온 이억기는 들것에 실려 도립 병원으로 옮겨졌다. 뒤이어 항구로 귀환한 강태준에 박수를 치는 사람들. 시합 결과는 강태준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찝찝한 승리였다. 위기를 넘긴 강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잡을 뻔했구먼. 아, 이게 무슨 낭패야.”
“그러게 말입니다. 거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결과가 좋으니 되었지. 그보다 항해과 송규익 그 양반은?”
“저기 있소이다.”
어깨에 수건을 걸친 송규익은 뭔가 허탈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심정을 헤아린 강태준이 따뜻한 차를 건넸다.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소. 자네 잘못도 아닌데.”
“아니야……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거지.”
“당신 탓이 아니야. 원래 뱃놈 일이란 게 한 치 앞을 모르는 일 아닌가?”
답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힘이 없었다. 배 한 척을 수장시켜 버렸으니 뒷일이 걱정된 것.
멍 때리는 송규익을 두고 돌아선 김광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시팔 것, 행정처에서 또 지랄하겠군요.”
“하는 수 없지. 일단 각오하는 수밖에.”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버렸지만 하는 수 없지 않나.
이미 벌어진 일 후회야 소용없다.
며칠 후, 학장을 맡은 신영우 교수가 학장실로 그를 호출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