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항해 시합
잠시 후, 쑥덕거리는 항해과 학생들이 한마디씩 지껄였다.
“규익 형님. 까짓것 시합 한번 해 줍시다.”
“그래요. 어차피 항해 경기면 우리 쪽이 질 리가 없잖습니까? 저딴 개소릴 듣고 가만있을 겁니까.”
“그래 한판 뜨자! 아주 묵사발을 내주자고!”
상대의 의도야 뻔히 알고 있지만 이건 학과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포커페이스가 깨진 송규익의 얼굴에는 이윽고 경련이 일었다.
이대로 돌아가는 꼴을 보니 상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꼴이다. 하지만 여론이 이미 넘어가 버린 이상 쉬이 물러설 수 없게 된 것이다.
목청을 높인 강태준이 주위를 돌아보며 선동하듯 외쳤다.
“맞다이 까서 이기는 과가 실습선을 가져간다. 동의하나?”
“좋소!”
“해 봅시다! 시펄!!”
“대답해 송규익이. 동의하나 자네도?”
“……좋다. 원한다면 받아 주지, 그 승부.”
씹어뱉듯 대꾸하는 상대의 모습에 강태준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럼 합의서 갖고 와서 연대로 지장 찍어.”
“지금 당장 말인가? 지금은 곤란한데. 벌써 사무원들이 퇴근했을 텐데?”
“아니, 그럼 말로만 하고 입으로 털려고 했나? 에이 니미 확!”
성질을 부린 강태준이 다시 라이터를 켜는 모습에 기겁하는 학생들.
강태준이 불을 켠 채 협박하듯 소리쳤다.
“나는 인내심이 긴 사람이 아냐. 닥치고. 지금 당. 장. 합의서 작성해서 갖고 와. 거기 재진이?”
“예?”
“니가 퍼뜩 갔다 와라! 아무래도 안 되긋다. 저놈들이 또 말을 바꿀지 누가 아냐?”
“옙! 형님.”
강태준이 다시 담배를 피자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녀석들. 혹시 불씨라도 떨어질까 모두 안절부절못했다.
10분 후, 헐레벌떡 서류를 들고 온 김재진. 서류까지 들이밀자 양과 과 대표와 학생들에게 동의한다는 지장을 받았다.
부둣가에 모인 학생들이 전부 지장을 다 찍은 다음에서야 간판 위에서 내려온 강태준. 강태준이 뭍으로 내려오자마자 몰려오는 항해과에 맞서 어로학과 학생들이 호위하듯 강태준을 겹겹이 둘러쌌다.
앞으로 나온 송규익의 표정은 그야말로 똥 씹은 듯했지만, 목적을 달성한 강태준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강태준이 뻔뻔하게 악수를 청했다.
“눈깔 튀어나오기 전에 눈에 힘 풀어. 합의한 거다, 우리.”
“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지. 하지만 다음엔 억지 부려도 소용없어.”
“그래. 그럼 약속한 시각에 보자고.”
목적을 달성한 강태준이 사라지려 하자. 송규익이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이봐, 이건 어쩌라는 건가. 작업 중 휘발유를 뿌려 재꼈으면 니가 싼 똥 정도는 니가 치워야지. 니들이 싸지른 건 니들이 치우고 가야 하지 않나?”
“아, 그거? 별거 아니야? 노란 염료만 살짝 섞은 거지. 그냥 대충 물 뿌리면 지워져.”
“뭐?”
“그럼 수고.”
속은 걸 알아차린 학생들이 뒤늦게 분해했지만 이미 배는 떠나간 뒤다. 허탈해하는 송규익을 뒤에 두고 강태준을 비롯한 어로학과는 대열을 이루어 후퇴했다. 뒤늦게 학교로 복귀한 강태준에게 광필이가 물었다.
“아 근데 형님. 항해과 놈들이랑 정말 대결할 겁니까?”
“왜? 갑자기 시합한다니까 쫄았나?”
“아니. 그냥 송규익이 저 자식 실력이 장난 아니라고 들어서요. 저 짝 어촌계장 아들이잖습니까? 저 자식 어릴 때부터 배 끼고 놀던 놈이라 보통내기가 아니라던데.”
“그래서. 뭐? 설마 이 형님이 질 거 같다 이거냐?”
“음…… 그런 건 아니지만.”
“임마. 사공이 아니라 사공 할배가 직접 와도 내가 이긴다. 걱정 마라.”
어차피 처음부터 생각한 부분은 완전 양보가 아니다.
그 정도 조건이 아니면 저쪽에서도 승복하지 않았을 터.
전생에서 강태준은 예전에 일을 쉴 때 간간이 해양 레저 인력 양성 교육을 전담한 적도 있다.
스키드 보트를 사용하기 위해 배를 잘 알아야 했던 것.
그래도 나름 프로급으로 면허까지 따서 지도해 본 사람인 만큼 아마추어에게 질 거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예정했던 시합 당일이 되자, 학생들이 하리항으로 무리 지어 몰려나왔다.
하리항은 다대포와 함께 고데구리 어선으로 악명높은 장소로 한때 불령 선인들로 낙인찍혔던 사람들이 일본 항구로 밀항할 때 피난처로 쓰이던 곳.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선원들은 물론 타과 학생들까지 모두 약속했던 시합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강태준 일행이 들어서자 시선은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아니 점마들 뭐 저런 걸 입고 그래?”
“저 짝은 꼭 올챙이 같구마.”
해녀처럼 고무로 된 잠수복을 입은 모습에 피식 웃는 어민들.
꽤 훌륭한 역삼각형 체형을 가진 강태준과 달리 김광필은 동네 마실 나온 아저씨처럼 술배가 툭 튀어나와 있었던 것.
본인도 쪽팔리는 걸 아는지 얼굴이 붉어진 김광필이 귀엣말로 속삭였다.
“이거 너무 끼입니다. 형님, 이 옷 벗으면 안 됩니까?”
“궁시렁대지 말고. 그것도 안 입고 물 빠지면 엇 하는 사이 바로 뒈진다.”
“그래도 이건 너무 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살 좀 빼지. 임마. 술 좀 고만 처먹고.”
해녀처럼 몸이 꼭 죄는 슈트가 불편한지 연신 투덜대는 녀석.
부둣가에 도착하니 어디서 구했는지 군용 드라이슈트를 입은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로 내빼고 뭐라도 핑계 댈 줄 알았더니 제때 나왔구먼.”
“누구처럼 사기 칠 만큼 못난 인간은 아니라서. 학과 대표니 어쩔 수 없이 나왔을 뿐이다.”
“그래도 염치는 있단 건가? 그쪽 선수는 누구냐?”
“나다.”
항해과에서는 예상대로 송규익을 밀었다.
애초에 그보다 돛단배를 더 잘 다루는 사람은 없을 테니 당연한 결과.
그닥 기분이 좋지 않은 송규익의 모습에 강태준이 물었다.
“파트너는?”
“바로 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억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거들먹거리는 모습에 송규익의 이마가 좁아졌다.
그 모양에 눈을 가늘게 뜬 김광필이 중얼거렸다.
“너 따위가 보조라고? 우리는 분명 시합하는 건데,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
“님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저씨. 본인을 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뭐야? 이 자식이!”
다시 싸우려는 김광필에 얼른 말리는 강태준이었다.
“워어. 둘 다 진정해. 여기까지 와서 주먹다짐하면 쓰나? 그보다 배는 준비되었나?”
“물론이지.”
과연 포구 앞을 보니 돛단배 두 척이 정박해 있다.
준비된 선박은 길이 4m에 폭 2m 깊이가 70cm 정도 되는 소형 평저선으로 판자를 맞대고 피새(참나무 못)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완벽하게 같은 걸로 준비했다.”
‘스리랑카 전통 어선과.’
루왈 오루와라 했던가? 처음 보는 배를 감상하는 사이 김광필이 의문 쩍은 어조로 물었다.
“혹시, 노파심이지만 배에 장난치진 않았겠지?”
“허튼소리. 울 할아버지께서 직접 정비하신 물건이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송규익의 할아버지는 어촌계 포구에서 돛단배만 50년 넘게 만들어온 조선 장인인 만큼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별로 배를 운항하기 좋은 날씨로 보이지 않는다.
늦가을부터는 찬 대륙성 고기압이 내려와서인지 파고가 높고, 북동풍이 부는 모습. 너울성 파도가 몰려오며 바람이 거세지는 것을 보던 강태준은 비가 올 것을 직감했다.
송규익 또한 심상찮은 기상을 읽은 듯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날씨가 생각보다 좋지 않군. 파도가 거칠어.”
“겁먹었으면 말하게나. 지금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니까.”
“사돈 남 말 하긴. 댁이나 도망가지 마쇼.”
김광필의 도발에 발끈한 송규익이 곧장 반박했다.
신경전을 펼친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학과의 자존심이 걸린 만큼 물러설 수 없는 법.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선 이억기까지. 두 명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둘을 떼어 놓았다.
“자자, 시합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저기 생도에서 아치섬까지 갔다 오는 거야. 두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항구로 먼저 오면 이긴다. 단, 동력을 쓰면 실격패다.”
하리항에서 1.4km 정도 거리로 태종대 동남쪽으로 바위섬인 주전자섬(생도)이 있고, 미래 영도의 해양대학 자리엔 아치섬이 있다.
후일 해양대학이 직접 들어서면서 아치섬과 육지가 이어졌지만, 당시엔 매립 전인 만큼 육안으로 보기에도 꽤 거리감이 있었다.
눈대중으로 대략적인 거리를 가늠한 송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실력을 확인할 수 있겠군. 감독은?”
“근처 어르신들이 도와주기로 했다. 다들 이십 년 넘게 어업에 종사해 오신 분들이지. 혹시 몰라 망원경도 준비했으니 나중에 딴소리 마라.”
“좋다. 그럼 시작은 언제지?”
“바로 정각에 시작하도록 하지.”
강태준은 출발 전 돛을 당기거나 풀어 보며 미세 조정을 했다.
키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예전에 요트를 몰던 경험이 생각나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때 이걸 운전해 보겠다고 그렇게 졸랐는데. 그러다가 물에 떨어져서 죽을 뻔했지.’
70년대까지만 해도 하중도가 많은 강동 남단 구역은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차보다 배가 흔한 시절이던 만큼, 항구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배 모는 기술에 익숙한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던 것.
출발 직전 양과 학생들이 서둘러 배 띄우는 것을 도왔다. 흔히 보기 힘든 경기에 소문을 들었는지 상당히 많은 수의 어민들도 경기를 보러 몰려나왔다.
같은 시각, 정성택의 바둑 기원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돈을 건 한판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자자, 여러분! 잠시 후 아치섬 경주가 영도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쪽에 돈을 거시겠습니까? 지금 마지막 기회! 경기에 이기면 배당만큼 돌려드립니다.”
“하나에 얼마요?”
“최소 금액은 10환, 최고는 1,000환까지입니다. 여기 선택한 과에 동그라미를 쳐 주십쇼. 1번은 어로학과 2번은 항해과입니다. 경기 결과는 실시간 무전기로 중계합니다.”
정성택은 그와 친분이 있는 도박장마다 미리 준비한 배당 용지를 팔며 호객행위를 했다. 경기 소식을 듣고 며칠간 영도를 돌며 경기를 홍보했던 덕인지 엄청난 숫자가 내기에 가담했다. 가담한 인원만도 천여 명.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번 정성택은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하하, 강태준. 이 자식은 복덩이야 복덩이.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다니.”
“그러게요. 수수료만 먹어도 몇만 환은 나오겠습니다.”
“무슨 소리, 고작 그걸로 뭘 하려고 우리도 돈을 걸어야지. 어로학과 쪽에 다 걸어.”
“넵? 항해과 쪽 배팅률이 세 배 이상 높게 나왔는데요?”
“무슨 소리, 다들 경험해 놓고도 몰라. 태준이 그노마가 질 경기를 할 리가 없지 않나?”
내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사실 부산에서 이런 이벤트가 흔치 않은 만큼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긴장보다 설렘이 앞섰던 것이다.
그렇게 일각에서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동안, 마침내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삐이익~!
김광필과 함께 배에 오른 강태준은 키를 꽂고, 돛대에 돛을 올렸다.
누런 황포 돛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하자 빛에 반사된 황톳빛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비춘다. 배가 물 위에 떠오르자, 강태준이 명했다.
“건넛줄 당기고, 고정해!”
“옛썰!”
강태준과 며칠간 호흡을 맞춘 광필이는 익숙한 동작으로 바삐 움직였다. 돛과 연결된 밧줄을 당기자, 팽팽해진 돛이 바람을 머금고 펄럭이자, 순풍을 받은 돛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형님, 나갑니다.”
“엉덩이 밖으로 빼고 균형을 잡아!”
지시에 따라 비스듬히 상체를 밖으로 눕힌 김광필이 돛을 힘껏 잡아당겼다. 수평을 되찾은 배는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나아가고. 그사이 벌써 바람을 탄 상대는 저 멀리 가고 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