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인재 영입
입이 딱 벌어진 광필이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 형님. 그건 단순히 구멍가게 수준이 아닌데요.”
“허허.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벌써부터 사업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존경심이 가득한 동생들의 눈빛들을 보니 내심 뿌듯함이 몰려오는 강태준. 그렇게 부어라 넣어라 마시던 중 너무 마셨는지, 아랫배에 신호가 왔다.
“잠시만, 화장실 좀 갔다 오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밖에서 손님들이 들어왔다.
가죽 잠바에 목에는 번쩍이는 금목걸이를 건 것이 어딘가 불량해 보이는 외양.
헌데 녀석이 오재갑을 보더니 불쑥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여기서 보는군. 재갑이!”
“아. 여기서 뵐 줄 몰랐네요. 선배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당연하지. 잘 지냈나?”
재갑이는 얼떨결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떨떠름한 표정이 별로 내키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예의상 인사를 하는 재갑이. 위아래로 그를 살펴본 녀석이 약간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 후배를 보니 반갑네. 근데 자네 상태가 좀 거시기하구먼. 요새 어디 막노동이라도 다니나 봐?”
“하하. 바로 보셨네요. 요새 여유가 없어서. 이것저것 잡일 하느라 바쁘죠…….”
태연한 답변에 금목걸이를 찬 녀석이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오해는 말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 그래 할 만하나?”
“뭐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경험이라 생각하면 그냥 버틸 만합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항해과로 전과하는 건 어때? 자네 정도 실력이면 취업 자리도 알선해 줄 수 있는데 알다시피 우리 형님이 이 지역서 방귀 좀 뀌지 않나?”
“그건 곤란한데요. 이미 수도 없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 생각이란 게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는 거잖나?”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는지 오재갑의 얼굴엔 성가시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멀뚱히 옆에서 술을 자작하던 김광필이 문득 코웃음을 쳤다.
“허허. 어이없구만 그래. 사람이 똘추가 아니고서야 항해과를 왜 가. 거기 갈 바에야 한국대부터 갔겠지. 안 그래?”
“아니, 넌 뭔데? 시비야?”
옆에 동행한 덩치들이 인상을 썼지만, 김광필은 전혀 쫀 기색이 아니었다.
“시비는 니들이 먼저 걸지 않았나. 가만있으니 누굴 호구로 아는 거 같아서 말이야. 일행이 있으면 정중히 실례합니다 정도는 하고 의견을 묻는 게 도리 아닌가?”
“꼰대가 웃기시네. 거 누군지 모르겠소만 제삼자는 빠지쇼.”
“꼰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건지 아주 싸가지를 밥 말아 드셨구먼.”
“아니, 댁이 나랑 무슨 관계인데 너 따위가 이래라 저래라야?”
“뭐야. 이 자식아?”
김광필이 탁자를 걷어차자 그러잖아도 흉흉했던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떡대 두 명이 손을 풀자 손에 너클을 끼우는 김광필.
침을 꿀꺽 삼키는 이억기의 행동에 김광필이 으르렁거렸다.
“야, 좋은 말할 때 가라. 분위기 곱창 내지 말고.”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겪은 몸이 작정하고 살기를 띠니 분위기부터가 장난이 아니다.
몰려오는 위압감을 떨쳐 내려는 듯 상대가 버럭 소리를 내며 센 척을 했다.
“이 새끼가? 뒤질려고?”
“형님한테 뭐 하는 짓거리야?”.
그렇게 일촉즉발의 순간 강태준이 불쑥 앞으로 끼어들었다.
“거, 무슨 소란들이야?”
상대와 동수라는 걸 확인하자 상대방의 눈에 낭패감이 스친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강태준이 쯧쯧 소리를 내며 조용히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지금 식당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이게 대체 무슨 추태야?”
“죄송합니다. 형님.”
“그쪽은 보아하니 같은 학교 후배님들 같은데, 우리 재갑이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
말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전혀 온화하지 않다.
장시간 대치 상태가 계속되자, 눈싸움을 하던 녀석이 침을 탁 뱉더니 성질을 부리며 밖으로 나갔다.
“아. 재수 없게. 딴 데 가자!”
“아놔. 저 새끼가.”
“참아.”
불끈한 김광필이 불쑥 튀어 나가려 했지만 팔을 붙든 강태준이 강하게 제지했다.
눈을 부라리던 김광필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소주를 병째로 들이킨 광필이가 거칠게 팔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닦았다.
“저런 싹퉁머리 없는 자식을 봤나. 야리는 꼬라지가 확. 그냥 눈깔을 뽑아 버릴까 부다.”
“거 잘 참았다. 그보다 저 자식은 누구야?”
그러자 오재갑이 얼른 답했다.
“아, 항해과 2학년인 이억기입니다. 큰형이 이억수라고 부산에서 이름난 유지라서. 이번에 교사 가건물 지을 때도 꽤 많은 액수를 쾌척했다 하더라고요.”
“이억수라면 설마, 발해출판 이억수 말인가?”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이야.
강태준이 이마를 찌푸리자 김광필이 짐짓 흉을 보았다.
“아. 형님도 아시는군요. 그 자식 진짜 거지 같은 새낍니다. 학교 교잿값이 이리 비싸진 것도 그 자식 때문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이억수 그노마가 판매지역 제한을 이용해 책값에 장난질을 친다는 말이죠. 연구비 명목으로 책값 일부를 교재 선택권을 쥔 학교나 일부 교사에게 떼어 주거든요. 그러면 그 출판사에서밖에 책이 안 나옵니다. 그런 다음 총판을 맡은 업체를 선임해서 판매수익을 도매상이 확실하게 챙길 수 있도록 규제하는 거죠.”
대형 출판사들이 서로 권역을 나눠 먹고 불공정 거래를 일삼다 보니 책값이 무지하게 뛰었다는 소리였다.
“허어. 그런 일이…….”
“개중에 발해출판 저놈들이 제일 악질이에요. 얼마나 서점 주인들을 들들 볶아서 통제하는지, 표시된 지역 밖으론 책이 함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비표까지 붙여 놓는다니까요. 일단 책을 들여놓으면 무조건 그 가격에 팔아야 하고 안 그러면 물량 못 넣게 압박을 넣는답니다. 서점 간 경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죠.”
“그런 일이. 난 전혀 몰랐군.”
“덕분에 서점 주인들도 울상이더라고요. 그러잖아도 수익이 적은데 와리를 왕창 떼가기까지 하니, 재고도 팔아치우기 어렵고 힘들어서 폐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기다 더해 이억수는 직영점을 운영하며 상대를 망하게 하는 수법에 도가 텄다
예를 들면 노른자 땅에 서점을 내고 한번 상대가 망할 때까지 출혈 경쟁을 해 문을 닫게 만드는 것이다.
교재 유통과 관련해 칼자루를 쥐고 있는 데다 한 번 찍히면 망할 때까지 주구장창 괴롭히기까지 하니, 영세 서점으로서는 더러워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강태준으로서는 아까 광필이를 말린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이억수 그 씹어 죽여도 모자랄 놈의 동생이라, 그냥 흠씬 패 버릴 걸 그랬나?
슬쩍 살기가 솟는 강태준이었지만 그는 애써 노기를 억눌렀다.
애초에 복학한 지 며칠도 안 돼서 사고를 치는 건 그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광필이 너도 재갑이랑 올래?”
“예? 저도 말입니까?”
“그래, 서점이 그 모양이면 니 목도 간당간당하지 않겠냐. 마침 따로 시킬 일도 있고.”
“그거, 정말입니까. 형님?”
“그래. 정리되면 출근해. 거기보단 많이 챙겨 주마.”
광필이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사흘 뒤 새벽. 김광필을 대동한 강태준은 함께 부산항을 찾았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1년이 넘었지만 북적거리는 항구는 새벽에도 활기가 넘쳤다. 당시 대외 원조에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정부로서는 수출 주도로 경제를 키우고자 했고, 수출 물량이 부산항으로 집중되다 보니 물동량이 급속도로 증가 중이었다.
서늘한 바닷바람을 뒤로하고. 트럭이 부둣가에 도착하자, 벌크선 위에서 새치가 희끗희끗한 탁 사장이 지팡이를 짚은 채 하역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거 빨리빨리 못 나르나? 임마들 완전 굼벵이일세.”
목소리가 큰 것이 성질은 여전하군. 반가운 마음에 강태준이 손을 흔들자 탁 사장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이구 태준이. 어째 신수가 볼 때마다 훤해지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이니야. 내 딸 하나 있어도 함 소개시켜 주는 건데. 아쉽군. 근데 그보다 거기는 못 보던 얼굴인데?”
“아, 김광필이라 합니다. 어르신.”
목장갑을 낀 김광필이 꾸벅 인사를 하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탁 사장.
강태준이 친절하게 그를 소개했다.
“제 친한 학교 후배입니다. 군대 있을 때 장교까지 해 먹은 인텔립니다.”
“오, 참전 용사라니,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거 팔뚝이 튼실한 게 일 잘하게 생겼구먼.”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돌쇠처럼 마구 부려 주십시오.”
우렁차게 목청을 높인 김광필이 깍듯이 인사를 올리자 손을 내젓는 탁 사장이었다.
“어르신은 무슨, 나 아직 젊다. 이왕 부를 거면 탁 사장이라고 불러.”
“예. 탁 사장님!”
“허허, 젊은이가 시원시원해서 좋구먼.”
“근데 어디 다치셨습니까? 발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복대까지 하고 절뚝이는 모습이 어딘가 정상이 아닌 듯하다.
“그게 신삥들 앞서 시범 보인답시고 가마니를 좀 들다 삐끗했지.”
“허, 그럼 병원부터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냥 조금 삐끗한 거 뿐이여. 찜질 몇 번 하면 금방 나아.”
“아이구야. 그래도 그렇지. 너무 무리하시는데요.”
“그래두 하역 일은 내가 눈을 부릅뜨고 감독해야지. 알아서 하라고 내비 두면 시간만 하염없이 때우면서 농땡이를 까거나 물건 빼돌리는 놈들이 부지기수야. 특히 군수물자 하역은 중간에 삥땅치려는 것들이 많아 직접 감독해야 안심이 돼.”
“그래도 쉴 때는 푹 쉬셔야죠. 무리하심 나중에 골병들어요.”
“임마, 왕년에 일본군 때려잡은 사람이여. 아직 팔팔하당께! 어억!”
호기를 부리던 탁 사장이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자, 깜짝 놀란 강태준이 부랴부랴 부축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아이구, 아이구. 허리야. 나 죽겄네.”
“저런 어서 여기 앉으십시오.”
낯빛이 창백해진 것이 정말로 많이 아픈 모양. 걷지도 못할 것처럼 부들대는 탁 사장을 의자에 앉힌 강태준.
허리를 의자에 붙여 세운 다음 양손으로 복부 근육을 쓰다듬듯 마사지를 해 준다.
거친 선원 일을 하려면 몸 관리가 필수. 예전에 요통으로 고생했을 때, 알고 지내던 마사지사에게 전수받은 방법이었다.
‘복부에서 5센티 정도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면 된다고 했지.’
장요근과 이상근이라고 했나.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암튼 그쪽을 풀어 주면 된다고…….
복부 주변을 몇 초간 문지르자 한결 얼굴이 편해진 탁 사장.
서서히 안색이 돌아온 탁 사장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허. 시원하구마. 자네 요령이 좋구먼.”
“그냥 민간요법이죠. 가끔 이렇게 허리가 결릴 때 풀어 주면 좋습니다.”
“감사하이. 한결 낫군.”
“통증만 완화해 주는 거니 별로 대단할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객기 부리지 마시고 댁으로 들어가시라니까요.”
“거 시끄럽게, 우리 마누라처럼 잔소리하긴. 그보다 태준이 자네, 말한 물건은 가져왔나?”
“예. 트럭 뒤에 실었습니다.”
“그래, 일단 함 보자고.”
강태준이 함께 온 직원들이 트럭 뒤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자, 비릿한 냄새와 함께 말린 건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