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42화 (42/361)

42화 과거의 인연

웃음기를 띤 양재문이 칭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튜나잡이를 해 본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군. 자네. 이런 걸 어디서 다 배웠나?”

“우연히 수입한 서적을 보다 배웠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멸치어업을 하셔서 수산업 관련 서적들이 많았거든요.”

“학구열이 뛰어난 친구로구먼. 자네 이름이?”

“강태준입니다.”

“그래 태준이 자넨 내 따로 기억해 두지. 이 학생의 말이 맞네. 지금 해외의 수산업자들은 튜나잡이에 사활을 걸고 있지. 특히 튜나는 고부가가치 어종인 데다 활동 범위가 넓어. 무려 1,000마일 수역을 회유할 만큼 활동 범위가 넓은 어종이랄까 그야말로 전 세계가 생활권인 셈이지.”

강태준의 대답에 탄력을 받은 양재문은 수업을 계속 이어 갔다. 강의의 주된 요지는 근해 어업에 몰두하기보다는 원양 어업에 뜻을 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학생들에게는 사실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GDP가 10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원양어업이라. 솔직히 너무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던 것.

하지만 강태준을 비롯한 극소수의 학생들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주의 깊게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지금 업계의 최신 동향이 어떤지 알 귀중한 기회였던 것.

처음 튜나에 대해 대답했던 학생 역시 그중 하나. 강의 중 새로 의문점이 들었는지 녀석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교수님, 한국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원양 어업 진출이라니 그가 가능하겠습니까?”

“하하.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닐세. 우리 태동산업에서도 이번에 정부로부터 230톤급 신형 선박을 인수했거든. 지평호라고 시애틀 수산시험장의 연구를 위하여 종합 시험선으로 건조한 선박이지. 앞으로 미국 쪽 전문가를 대동하고 조만간 대해에 나가 시험 조업을 할 계획일세.”

그러자 아까 손을 들었던 학생이 다시 질문했다.

“그래도 대양 진출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조업하려면 어업권 협상도 필요하고 판매처도 확보해야 하니 말이죠.”

“그거 아주 좋은 지적이야.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 해무청을 별도로 설립하기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나왔네. 원양 어업 투자와 관련해 중앙수산시험장 쪽과 긴밀히 연결하기로 했으니 예전보다 정책 추진 과정상 추진력이 생길 걸 기대하고 있네. 아마 주한 경제 조정관실(OEC: office of the Economic Coordinator for Korea)에서 허락이 나면 농림부 수산국과 공동 사업으로 시험 조업을 실시할 예정일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라. 그거 고무적인 내용이군요.”

“맞아. 앞으로 대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 아니겠나. 아차, 시간이 너무 늦었군. 오늘은 이쯤에서 강의를 마치도록 하지. 아까 태준 학생을 포함해 질문에 대답했던 학생들은 이쪽으로 오게. 따로 체크를 해야 할 테니 말이야.”

시계를 보니 정해진 수업보다 무려 1시간을 초과한 뒤.

양재문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해방된 학생들이 서둘러 밖으로 몰려나왔다.

“끄, 끝났어.”

“아 죽는 줄 알았네.”

시원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온 김광필이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 무슨 강의를 연강으로 5시간이나 하나. 아까는 오줌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힘들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출출해 죽겠다.”

“그럼 이번엔 곱창전골 어떻습니까? 제가 또 깔쌈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번엔 니가 쏘는 거다.”

“아니, 돈도 많으신 분이 치사하게 와 그러십니까?”

“아니, 매번 얻어먹는 놈이 양심도 없나? 그게 니 돈이야? 내 돈이지.”

투닥거리는 둘이 시장으로 향하려는 찰나 홀연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흙이 묻은 몰골이 볼품없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선배님.”

“누구?”

“아, 수업 같이 듣던 후뱁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강태준은 상대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아 아까 수업 때 봤네. 튜나가 뭔지 대답했던?”

“네. 그게 접니다.

“그래 똘똘한 후배구먼. 혹시 우리 후배, 이름이 뭔가?”

“네. 선배님, 오재갑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강태준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사람이 한국 수산계의 전설이자. 원양 어업계의 개척자인 오재갑이라고?

후일 국내 굴지의 대그룹인 해신그룹 총수가 되는 인물.

강태준이 전생에 죽기 직전 스카웃을 받긴 했지만, 사진으로만 접했을 따름이지 직접 만난 적은 없었던 만큼 새삼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러자 사정을 모르는 김광필이 불쑥 아는 척을 했다.

“아! 보아하니 니가 그 녀석이구만? 한국대 농대 걷어차고 여기 들어온 괴짜.”

“음, 무슨 소린가 그게?”

“아 그게 장학금 받고 한국대에 합격해 놓고 여기 들어온 녀석이 있다고 한동안 소문이 자자했거든요. 그래서 학과에서 난리도 아니었지요. 엄청 똑똑한 녀석이 들어왔다고. 바로 저 녀석이 그 주인공입니다.”

“민망하군요. 그런 거창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합격한 곳은 농대였고요.”

자서전을 봤어야 했나? 아무리 농대라지만 한국대는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대학.

거기에 합격해 놓고 진로를 바꾸기란 그리 쉽지 않은 만큼 그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무슨 볼일이신가?”

“사실 아까 튜나에 대해 여쭤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혹시 튜나에 대한 서적이 있다면 제목이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미안한데 어쩌지? 나도 파본으로 본 게 전부라. 게다가 그 책은 동란 중에 분실했다네.”

“저런…… 그거 유감이군요.”

얼핏 둘러대기는 했지만 사실 구라다. 실제로 없는 책을 소개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럼에도 마치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오재갑에 강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기억하고 있지. 뭐 사실 나도 추가로 관심 가는 부분이 많아서 관련 서적을 좀 더 찾아보는 중이야. 마침 여기 광필이 이 녀석이 서점에서 일하거든.”

“오, 그렇습니까?”

“뭐 알아서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알고 싶은 정보가 있다면 가감 없이 알려 주도록 하지. 그래,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식사라도 같이하는 게 어떤가.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야?”

약간 주저하는 듯한 오재갑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우리 과 학생이면 후배 아닌가. 내가 밥 한 끼 정도야 사 줄 여력은 있네.”

“그건 좀. 초면에 너무 실례가 아닐지…….”

여전히 망설이는 오재갑에 광필이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이쪽 물주께서는 꽤 여유가 있으신 분이라. 몇 번 벗겨 먹는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네.”

“뭐…… 그러면 염치 불고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김광필까지 독촉하니 차마 거절하기 힘들었는지 따라나서는 오재갑이었다.

그렇게 영도 근처의 전골집에 들어간 강태준.

잠시 후 보글보글 끓인 찌개가 도착했다. 돼지 등갈비로 끓인 김치전골은 아삭한 야채에 다시마를 넣어서인지 국물이 시원하고 감칠맛이 났다.

매콤한 냄새에 강태준이 국자로 한가득 고기를 퍼 그릇에 덜어 주었다.

“자자, 맛나게 먹게. 부족하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그동안 배가 고팠는지 별다른 말 없이 식사에만 열중하는 세 사람.

배를 좀 채웠겠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강태준이 슬쩍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사나이답게 식성이 좋구먼, 근데 대체 왜 한국대를 때려치고 여기 온 건가. 농촌에는 동일계 특차 제도란 게 있어서 우수한 농촌 학생이라면 동일계 학생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진학이 가능한 걸로 아는데? 그러면 장학금도 잘 나오고 취직도 잘 되잖아?”

“제 담임 선생님께서 한국대 문리대 출신이십니다. 그분이 항상 말씀하시길 일류 대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넓게 보고 인생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분께서 제 졸업 선물로 지구본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걸 보니 바다가 땅보다 몇 배는 넓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고민해 보니, 문득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해 보는 것이 어떤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산대를 선택했다?”

“예. 고래로 대양을 제패한 국가가 세계를 제패하지 않았습니까? 이왕 바다로 나갈 생각이라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거 상남자네. 그렇다고 한국대를 포기해?”

“뭐. 세상 사는데 간판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포장지일 뿐이죠. 중요한 건 내용이지. 누군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인생의 큰 도약은 통념을 뛰어넘는 결단이 만드는 거라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적지요. 더욱이 수산대도 충분히 좋은 학교 아니겠습니까?”

“허, 이 자식 맘에 드네, 자 마셔라.”

대폿잔에 술을 부은 김광필이 한가득 잔을 건네자 오재갑이 정중하게 사양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좀. 아침 일찍 인력소개소부터 나가야 해서 과음을 하면 힘들거든요.”

“아니, 장학금 받는다지 않았나? 너 정도 성적이면 생활비도 추가로 지원해 줄 텐데.”

“그게, 학비를 아껴서 택지 구좌를 구입해서요. 사실은 거기다 집을 짓는 중이라서 여유가 없네요.”

“뭐? 집을? 그거 부모님도 아시고?”

그 말에 오재갑이 씁쓸하게 웃었다.

“고향에는 말 안 했죠. 한국대 안 간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무척 실망하셨는지 쌀 외엔 생활비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 천명하셨거든요. 원래는 애 딸린 하숙집이라도 구해서 개인 교습이라도 할까 했는데 이쪽이 원체 교통이 안 좋아서 자리 구하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혼자서 집을 짓는다니 말이 쉽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 역시 될성부른 싹은 다르다고. 혀를 내두르는 김광필이었다.

“이 자식 겁나 열심히 사네.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

“그럼 잠자리는 어디서 해결해?”

“뭐 간이 텐트 치고, 담요를 바닥에 깔고서 자죠.”

“맨바닥에 군불도 없이? 아서라, 너 입 돌아간다.”

“맨바닥은 아니고 목재 합판 하나 깔지요. 뭐 아직은 별로 춥지 않아 견딜 만합니다.”

말은 덤덤했지만 어지간한 고생길이 아닐 터라. 행색이 남루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그 말을 들은 강태준은 이거야말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지금 자금 사정이 빠듯하겠군. 그렇다면 부업이라도 한번 해 보겠어?”

“부업이요? 저야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학교생활을 계속하면서 시간을 맞추는 건 조금 어려울 거 같아서요.”

“사실 내가 소규모 사업체 하나를 운영하는데 일손이 부족해서 말이야. 혹시 자네가 도와줄 수 있나 해서 말이지.”

“어떤 일을 말입니까?”

“면도기 품질 검사. 사실 내가 사업을 하나 운용하는데, 거기서 면도기를 만들어 팔거든.”

“정말입니까. 형님?”

깜짝 놀란 김광필이 되묻자, 강태준이 말했다.

“뭐, 어쩌다 보니. 어때 너도 생각 있어? 시간당 수당은 뭐 과외 교습비 정도는 챙겨 줄 수 있지.”

“품질 검사라 그런 걸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혀 해 본 적 없는 일이라서.”

“뭐 어려운 일은 아니고 날과 규격에 흠이 있는지만 살펴보면 돼. 면도기란 피부에 대는 물건이라 품질이 불량하면 쉽게 베이거든.”

잠시 갈등하던 오재갑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은 조건이기는 한데, 현장을 봐야 할 거 같은데요. 일단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지 알아야 할 거 같습니다.”

“좋아. 그럼 우리 회사로 함 와서 확인해 봐. 일단 뭔지부터 알아야 작업이 될 테니.”

“근데 정말 궁금한데요. 대체 무슨 사업을 하시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뭐 이것저것 하지. 대충.”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기에 들어가자 광필이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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