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7화 (37/361)

37화 파철 거래

“형!”

“그간 공부는 열심히 했고? 학교는 좀 어떠니?”

“공부 재밌어. 신기한 것도 많고.”

신이 나 조잘대는 덕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춘삼이.

마늘을 까고 있던 어머니가 반가운 듯 고개를 돌린다.

“아이구야, 내 정신 좀 봐 이제야 퇴근했니? 거기 밖의 최 목수님은?”

“예. 지금 막 돌아가셨어요.”

“아이구. 그동안 고생하셨는데 간단히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그게 부담스러우셨던 듯합니다. 나중에 고기라도 사서 보내야죠.”

“그렇지 그 양반 고생 많았어. 여튼 잠시만 있어 봐라. 일단 내 과일이라도 까 오마.”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간 어머니가 서둘러 사과와 배를 깎아 왔다.

“아 잠깐만!”

퍼뜩 좋은 생각이 든 강태준이 찬장에서 꺼내 온 건 미군에서 군용으로 나온 과일 통조림이었다. 파인애플과 복숭아가 든 통조림을 까고 얼음이 동동 띄워 넣으니, 그럴듯한 화채 한 통이 완성되었다.

빙그레 둘러앉아 화채를 맛보는 가족들. 복만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 머리부터 확 시원한 게 끝내줍니다.”

“그러게 아주 달달하네요.”

연이은 호평 속에 주름진 얼굴에 약간 안쓰러운 기색이 돋았다.

“역시 사업이란 게 쉽지 않지? 니 아버지도 그렇고. 고생이 많구나.”

“제가 선택한 일인데요 뭘. 그보다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나요?”

“맞다. 명동에서 백종섭 씨가 그림을 하나 보냈더구나.”

“아니. 그 사람도 참,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경양식당 관리직으로 취직한 백종섭은 미친 듯이 창작에 열중했다.

마땅히 취직할 데도 없는 그를 받아 주고,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해 준 고마움에서일까. 이번에 보내온 풍경화는 무려 80호(145x97cm) 정도 중대형 사이즈로 통속화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항구를 배경으로 일본식 건축물들이 즐비한 거리.

그 반대편에는 판잣집을 기워 올린 빈민촌이 보인다.

초겨울 배경에 걸인처럼 남루한 옷차림들, 고무신 하나 없는 맨발 차림의 아이들이 폐지를 줍고,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도 보이고, 드럼통 화로에 장작을 지피는 부두 노동자들 옆으로 오징어를 굽는 모습이 보인다.

산동네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에 늙은 할머니의 수레를 밀어 주는 학생.

고사리손을 보태는 아이들의 얼굴들은 해맑다.

뭔가 세상의 고난과 풍상을 겪으면서도 행복감에 젖어 있는 모습들.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따스해지는 기분이 든다.

“뭔가 기분이 포근해지는 느낌이네요.”

“그렇지?”

“근데 배경이 어딘지 모르겠네. 계속 보니 낯이 익는데”

언제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덕배가 나섰다.

“여기 군산이에요. 이건 조선은행이고. 주한미군 808 공병 항공대대일걸요.”

“어 어떻게 알아?”

“예전에 거기 근처에서 잠시 살았거든요.”

약간 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눈빛. 더는 말을 잇지 않는 걸 보니, 뭔 일이 있었던 모양.

기억을 떠올리니 군산시 중앙로 변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군산이라, 군산이라.’

박원숙 여사의 남편인 윌리엄이 비행장 증축 공사 일로 잠시 출장을 갔다 했던가.

그때 번개처럼 떠오르는 기억, 강태준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렀다.

“앗! 그랬지. 바로 그게 있었어.”

“왜 그러니?”

“이거 종섭 씨한테 보너스라도 줘야겠네요.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거든요.”

강태준의 미소에 의아해하는 가족들.

며칠 후, 박원숙의 아지트를 찾아간 강태준이 상담을 청했다.

“우리 태준 아우님께서 뭔 좋은 일이라도 있나?”

“부군께서 출장 가셨다 해서요. 혹 적적하실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고작 몇 주인데 뭘, 마음은 고맙지만, 이 누님은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에요.”

“하하. 무슨 말씀을. 저도 취향이란 게 있어서요”

“어머. 그건 좀 서운한데?”

농담까지 하는 걸로 보아 여유가 넘치는 듯한 박 여사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흠. 암튼 여러 가지 열심히 하고 있네. 운송업에 여객업, 고물상까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겠어.”

“먹고 살려면 열심히 해야죠. 사실 판만 넓게 벌여 놨을 뿐, 수입은 다들 자잘한 수준입니다. 아직 크게 이윤이 나는 건 없지요.”

“그렇게 고생할 바에야 미공병대 군속에 말뚝 박는 건 어때. 내가 좋은 자리로 추천해 줄 수 있는데? 동생이 오면 내 솔직히 PX 하나 정돈 내줄 수 있는데?”

“하하. 솔깃하긴 합니다만 딸린 입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이미 혼자만 잘 먹고 잘살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역시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네. 하긴 우리 태준 동생이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그릇은 아니지. 그랬으면 애초에 사업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

“하하. 높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파이프를 무는 박원숙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럼 본론부터 이야기해 볼까. 변죽만 치는 건 내 취미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한테 부탁할 게 뭐야?”

“혹 군부대에서 나오는 파철이나 철강 제품을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걸 어디 쓰려고.”

“저도 이제 딸린 식구가 많아져서 공사장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서요. 어미 새 따라다니는 새끼 새처럼 계속 건설 현장만 쫓아다니면서 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독립이라 흠…… 그러면 딱히 추진하려는 계획은 있고?”

“공업사를 열어 볼까 합니다. 일단 면도기 사업부터 해 보려고요.”

“면도기라고?”

“네네. 국내에 칼 만드는 기업은 좀 있어도 면도날을 만드는 업체는 거의 없더군요. 안전면도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상을 들은 박원숙은 꽤 흥미로워하는 분위기였다. 살짝 자세를 비튼 그녀가 슬쩍 물었다.

“흠, 면도기라 그게 돈이 되긴 할까?”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에게는 생활필수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죠. 일단 시중엔 물건이 없어서 못 파니까요. 재료만 안정적으로 수급 가능하다면 공정비와 코팅 비용, 거기에 유통비를 빼도 매출 대비 30% 이상의 수익을 남길 수 있더군요.”

“흠. 조사는 열심히 한 것 같네. 말은 쉽지만, 완제품을 떼 오는 거랑 물건을 직접 제작하는 일은 다른 문제 같은데? 좋은 제품을 만들더라도 베끼기 쉽다면 소용없지. 너나 나나 짝퉁 만들어 팔면 소용없지 않아?”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면도기 분야는 무엇보다 기술과 자본 투자에 진입장벽이 있어서 한 번 선점하면 아무나 들어오기 힘들 겁니다. 애초에 자본력을 가진 계층 입장에서는 널린 사업도 많은 판에 그만큼 매력 있는 시장은 아니겠고요. 물론 그러려면 질 좋은 파철이 필수지만 말입니다.”

“흠, 무엇이든 질 좋은 철 재료가 문제라는 거네. 애초에 철로 만드는 거니까. 그럼 시제품 품질은 확실한 거야?”

“아직 개발 중입니다만 일단 순조롭게 풀리는 중입니다.”

확신 어린 강태준의 말투에 다리를 포갠 박원숙이 가만히 담뱃대를 물었다.

“자신감 넘치네. 하지만 어쩌지, 파철 수거와 관련된 업체는 이미 내정된 곳들이 있어서. 이런 부분까지 내가 함부로 개입할 수 없어. 유감스럽지만 그 계획은 보류하는 게 좋겠어.”

에둘러 거절하는 박원숙이었지만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바. 강태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야 그렇겠지만 지금은 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요새 들리는 소리론 요새 군산 비행장 공사가 한창이라던데. 유류 운송을 위해 군산내항부터 공군비행장 구간까지 송유관 공사를 계획하고 있다 하던데요. 그 정도 규모라면 파철도 엄청나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찻잔을 들다 멈칫한 그녀가 슬쩍 되물었다.

“어머나, 우리 동생 생각 이상으로 마당발이네. 그런 귀한 정보를 대체 어디서 들었어?”

“철거반 일을 하다가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듣자 하니 한국 정부랑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이라고 들었는데요?”

“흥. 지금 같은 세상에 어떻게 모든 일을 다 협의로 결정하겠어. 다 유도리 있게 사는 거지.”

“맞는 말씀이죠. 다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한국 정부랑 협의 없이 매립한 구간이 무려 12km가 넘는다던데. 그 정도면 정부로서도 좀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주한미군이랑 한국 정부랑 협의해서 처리될 일이지. 우리 태준 동생이 관여할 부분이 아닌 거 같은데?”

“박 여사님, 근래에 매축지 마을에서도 송유관 수리하다 기름이 새어 나오는 바람에 무려 640가구나 되는 집이 잿더미가 되지 않았습니까? 꼬박 한 해 전 구정을 앞두고 국제시장에도 불이 났지요. 그 여파로 가건물에 빠락이 쓰는 게 금지된 게 몇 달 전이죠. 그 정도면 정부로서 신경증이 생길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시끄러워서 좋을 것이 없다 이 말인가?”

“송유관 묻을 때 겸사겸사 폐기물이랑 쓰레기도 묻고 할 텐데, 이게 지역 주민들에게 소문이 나 보세요. 책임자 입장엔 꽤 피곤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기름 유출이나 토양 오염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말이죠.”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박원숙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해당 공사를 담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중령.

이런 걸로 커리어에 금이 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일이 커질수록 귀찮아지는 것은 사실.

잠시 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그녀가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동생,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동생. 많이 컸네.”

“협박이라뇨. 감히 제가 누님에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다만 송유관 매립 소문이라도 잘못 나면 각지에서 유류 절도범들이 개떼처럼 송유관 털러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동란 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기름 빼먹고 팔자 고치려는 놈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사실 미군이 송유관을 몰래 매립하는 것은 행정처리에 부수한 서류 작업이 까다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보상 외부에 군사시설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혹시 송유관로 건설계획이 유출되어 송유관 루트가 탄로 난다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

“그래서 그 문제를 덮는 대신 이번에 파철 수거 관련해 편의를 봐 달라?”

“공짜로 받아먹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려 12킬로나 되는 구간을 관리하려면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준공 후에도 상시 관리가 필요할 테니 저희 쪽에서 유지 관리에 소정의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미군을 상시 주둔시키는 것보다야 한국인 노동자한테 경비 업무를 맡기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요.”

“흠. 그보다 더 쉬운 방법도 있지 않겠어? 예를 들면 그쪽이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던가?”

표정은 웃는 낯이었지만 눈빛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정도 협박은 예상했던 만큼 강태준도 지지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지요. 게다가 전 혼자 죽는 취미는 없는 사람이라. 불행히도 저희가 엮인 일이 좀 많습니까?”

“흐음…… 난 입질하는 사냥개를 키우는 취미 따윈 없는데. 귀엽고 폭실폭실한 고양이라면 몰라도. 이제 보니 개를 잘못 키운 거 같아.”

“그럼 지금이라도 익숙해져 보시죠. 그 개가 어디서 큰 사냥감을 물어다 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개가 아니라 늑대의 본성을 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핥는 박원숙.

왼쪽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짐짓 화난 듯. 하지만 잠시 후 순식간에 표정이 고친 박원숙이 이내 싱긋 웃었다.

“재미없게…… 농담이야. 내가 동생을 어떻게 해코지하겠어? 이렇게 귀여운데?”

“그 말씀은?”

“제법 머리도 쓸 줄 알고. 다시 봤어 동생. 좀 거슬리긴 해도 틀린 소린 아니야.”

“선은 넘지 않았다 이 말씀이시죠?”

“아슬아슬했지만 뭐, 다만 이쪽에서 호의를 베푼다면 비밀 엄수는 철저히 해야겠지?”

“그거야 당연하죠.”

“그럼 너 따라다니던 녀석, 이름이 복만이라던가? 사촌이랬지?”

“네. 맞습니다.”

“그럼 걔를 우리 쪽으로 보내. 어차피 현장 잡일 처리할 녀석도 필요할 테니, 추후 송유관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고 말이야.”

그냥 일을 맡기기엔 못 미더우니 입막음 조로 인질을 묶어 두겠다는 소리.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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