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안전면도기
“왔으면 인사부터 하지. 싹퉁머리 없게 뭐 하는교?”
“거 형 있는지 몰랐지. 또 확장했네. 우리 박 형 수완이 좋구려. 장사가 잘되나 봐?”
“빛 좋은 개살구지. 단속이 심해서. 이윤은 얼마 안 돼. 엠피랑 경찰이 교대로 단속을 하니 살 수가 있나. 저번에도 사세청 놈들한테 거하게 뜯겼어.”
한가운데 누런 금니를 번쩍이는 박진봉이 속 쓰리다는 듯이 지껄인다.
강태준이 카발에 다닐 때부터 단골이던 박진봉은 이제 어엿한 가게 주인이 되었다.
“그거야, 딴 데서 벌충하면 될 걸, 얌생이 몰려나가는 기술은 우리 김 사장이 일등 아닌가?”
“임마는 큰일 날 소리를. 내는 장사 그렇게 안 한다.”
얌생이 몬다는 건 미군부대에 군수품을 빼돌리는 행동을 에둘러 가리키는 말이다. 잿더미에서 기사회생한 한국은 생필품을 만들 여력이 많지 않았기에 대부분 물건은 미군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다. 미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기지촌 양공주와 중간 상인이 결탁해 빼돌린 장물은 시장의 양키 상인들에게로 스며들었던 것.
“내도 이제 체면이 있는데 내가 예전 같은 줄 아나?”
“암요. 우리 박 사장만큼 양심적인 사람이 어딨나? 세금도 재깍재깍 잘 내고 애도 순풍순풍 잘 낳고. 그거야말로 애국자지 애국자.”
“거, 놀리지 말고. 여기는 또 뭐 사러 왔어?”
“셔츠 석 장이랑, 통조림 몇 개 사러 왔지. 그리고 질레트 안전면도기도 하나 주십쇼. 날 두 개까지 포함해서.”
물건을 살핀 녀석이 눈어림으로 계산을 마친 뒤, 손을 건넸다.
“다 합쳐서 12달러만 줘.”
“아니 뭐 그렇게 비쌉니까?”
“면도기가 비싸거든.”
“가격이 얼마길래요?”
“하나에 5달러야. 날은 별도로 한 개에 1달러.”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강태준이 항의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애초에 그냥 보급품으로 풀리는 거 아닙니까?”
“미제 하면 환장하지 않나. 이런 것도 없어서 못 팔아. 군바리 놈들이 쓰니까 다 멋있다고 따라 하더군.”
“아니 그렇다고 어찌 그렇게 받아먹습니까? PX 가면 반값도 안 되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그럼 PX 가서 사던가. 내도 이문이 남아야 생활비 벌고 상점 임대료라도 낼 거 아닌가. 딴 데 가도 여기가 제일 쌀걸. 자네라서 에누리 없이 주는 거야.”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었지만 실제로 가격을 확인해 보니 과연 박진봉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면도날 한 개에 7에서 10달러라고? 이건 미친 거 아닌가?”
“그럴 리가요. 피엑스에서 나온 면도날을 쪼개 문구용 칼로 따로 팔기도 한다데요. 그만큼 수요가 많아서 그렇죠.”
“거참, 허. 그럼 대체 마진이 얼마 붙는 건데?”
천여 명에 달하는 여급과 하우스 보이들이 유통 과정에 개입했다고 할까. 정상적인 유통 경로로 배급된 민간물자는 거의 없고 브로커들이 주무르고 있다고 했다.
강태준이 상인에게 물었다.
“그럼 국내에서 생산되는 면도기는 아예 없소?”
“외날 형식으로 나온 게 있기는 하지요. 다만 일제를 선호하는 편이라 국산은 거의 전멸이죠. 아니면 좀 이름 있는 대장간에서 맞춤형으로 만든 물건을 쓰는 편이죠.”
외날의 경우에도 날이 시원찮아 지면 날을 가죽에 갈거나 녹이 안 나게 관리해야 하는데, 애초에 철의 품질이 조악하다 보니 국내에서 만든 물건은 도저히 신뢰가 안 가는 것이다.
그래서 수염을 수북이 기른 사람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걸까?
상품성이 있다고 여긴 강태준은 도면을 수소문했다. 실제로 안전면도기라는 것은 발명된 지 무려 수십 년이 지난 물건인 만큼 제작 도면 자체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강태준이 의뢰를 넣자 천대광 영감은 흥미로운 듯 턱을 괴었다.
“면도기를 제작해 달라고?”
“네. 이 미제 물건이랑, 이렇게 똑같이 제작 가능합니까?”
“흠. 외날이 아니라 안전면도기라.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겠구먼. 자네가 쓸 건가?”
“아니 본격적으로 상품화해서 팔아 보려고요.”
“면도기를?”
“예. 아직 국내에서 양날 면도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는 없다는군요. 군용만큼 품질은 아니더라도 가성비가 있다면 살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생산을 한번 시도해 볼까 합니다.”
“흐음…… 그건 몰랐는데 가끔 주문이 오기는 했지만 다 거절했거든. 이런 게 그만한 값어치가 있단 말인가?”
천 영감도 관심이 가는지, 제법 구미가 당기는 표정을 지었다.
“이 조막만 한 게 하나에 몇 달러나 한답니다. 우리 천 영감님 실력이면 한번 손대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판로랑 재료는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흠. 손이 많이 갈 거 같은데. 구조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군.”
“그럼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일단 시도해 봐야지. 최소 사나흘은 걸리겠군. 넉넉히 일주일 뒤에 와.”
까다로운 강태준이 단골이 될 정도인 만큼 천대광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며칠 후에 가 보니 핼쑥해진 얼굴의 천 영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얼굴이 왜 이러십니까?”
“뭐랄까. 이 쪼매난 것이 내 승부욕을 불러일으켜서 말이지.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주 까다롭지 않나. 일단 어떻게든 만들긴 했는데 시험해 봐.”
단조로 찍어 낸 칼날은 다소 투박하긴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별로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정밀했다. 이제는 강태준이 직접 면도날을 시험해 볼 차례.
면도 거품을 바르고 일주일간 깎지 않아 까슬해진 턱을 밀자 수염이 슥삭슥삭 잘려 나갔다.
“어때?”
“쥐는 감각은 좋은데 손잡이가 좀 무겁습니다. 그리고 날이 뭐랄까 좀 날카롭네요.”
“그렇다면 좀 더 무디게 만드는 편이 좋을까?”
“흠. 어차피 쓰다 보면 무뎌지지 않겠습니까. 일단 샘플들이 다 이런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고요. 혹 몇 개 더 만드신 거 있습니까?”
“여기 있네.”
스무 개가 넘는 물건들이었다.
“일단 샘플이랑 비슷하게 만들어 보려고 해 봤네만.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더군. 뭐가 좋을지 몰라서 일단 경도나 강도상 차이가 있는 걸로 제작해 봤네.”
“잘하셨습니다. 최 목수님이나 박형 같은 사람한테도 물어보지요. 털이 많고 예민한 사람들일수록 객관적으로 품평해 줄 겁니다.”
이런 제품은 기본적으로 사용감이 중요한 만큼, 최대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강태준이 조언을 올렸다.
“흠. 무게감이 애매하네요. 좀 더 무거운 편이 어떻습니까?”
“무겁게 말인가?”
“아무래도 밀착감이 생기니까. 가벼울수록 손으로 누르는 힘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나 해서요 그렇게 되면 더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고.”
“흠. 그렇게 하면 너무 묵직할 거 같은데…… 게다가 철 무게가 늘어나면 단가도 그만큼 올라가지.”
“그렇다면 플레이트 간격을 조절해 보는 건 어떨까요?”
“플레이트?”
“네. 플레이트 간격이 커지면 바깥으로 날이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공격성이 강해지죠.”
처음 날을 세운 물건이야 잘 써먹었지만 두세 번 쓰고 나니 벌써 날이 무뎌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천 영감이 투덜거렸다.
“역시 수명이 오래 가질 못하는군. 고작 몇 번만 써도 털이 매끄럽게 안 밀리네.”
“그렇죠.”
“잡철로 만들어서 그런지 쓰다가 금방 날이 닳아. 게다가 이렇게 녹이 생겨 버리면 얼굴에 쓰기는 좀 그렇잖은가.”
옆에서 날을 유심히 살피던 복만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쓰면서 날이 문드러지거나 절삭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게 철 품질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철 구조가 치밀하지 못하면 내구력이 떨어지거든. 강도가 물러서 날이 빨리 상하지. 녹도 잘 슬고 말이야.”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철의 품질이었다. 질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면도기의 품질도 제각각이었던 것. 어떤 것은 절삭력이 높지만 밀착력이 부족하고, 어떤 건 밀착력이 너무 높아 쉽게 베이기 일쑤였다.
“결국은 소재가 중요하다 이거군요.”
“그래. 단순하겠지만 재료가 좋아야 요리가 맛있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철의 품질이 핵심이네. 그냥 금속이 아니라 경도가 높은 합금이 필요해. 반합 같은 재질보다는 더 좋은 소재가 있을 텐데 말이야.”
‘스테인리스강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언감생심이겠지.’
안타깝게도 녹 문제에서 자유로운 스뎅은 1960년대 중반이 지나서야 대중화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은 고철 가격을 정부가 나서 통제할 만큼 선철 자체조차 지극히 귀했으니 언감생심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까지 제철소는 삼화 제철소와 대한 중공업 공사 겨우 두 곳. 그마저도 6.25때 폭격을 맞아 개점 휴업 상태에 있었던 터, 복구가 겨우 진행된 후에도 생산량은 부족했다. 해방 초 삼화제철의 생산 능력은 하루 평균 30톤에 5고로까지 가동해도 선철 생산량은 월 3,600톤에 불과한 수준이니만큼 국내 생산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질 좋은 재료를 구하려면 미군부대를 통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확실히. 탄성이 높은 철을 섞으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근데 제대로 된 물량 확보가 가능하겠나?”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명색이 고물상 아닙니까. 일단 걱정 말고 면도날 개발에만 힘써 주십시오.”
강태준은 호언장담하며 일단 개발을 독려했다. 그렇게 회식비를 챙겨 주고 밖으로 나와 보니 며칠간 같이 돌아다닌 복만이는 제법 피곤한 눈 밑이 시꺼매져 있었다.
“형님, 지금껏 형님이 한 사업들이 잘 먹힌 건 알지만 이번에는 잘 모르겠소. 정말 방법이 있는 거요?”
“임마,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일이 어딨겠냐? 일단 이것저것 해 보는 거지.”
강태준이 자신하기야 했지만 실제로 질 좋은 철을 구하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필 미래가 전담하던 미군부대 공사장에서도 큰 문제가 하나 터졌다. 무턱대고 공사 수주를 받아 버렸던 장원영 덕에 철거에 쓰일 인력이 부족해진 것. 조원 중 몇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급히 땜빵 격으로 투입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며칠간 밤샘 작업을 하던 강태준. 집으로 돌아가 보니, 묘하게도 그 귀신 나올 것 같던 폐가가 벌써 그럴듯한 기와집으로 변모해 있었다.
“응?”
“왔는가? 거기”
“아니 최 목수님 여기는 어떻게?”
잠시 후, 지붕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최 목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업무 보고차 며칠 전 들렀는데 댁 상태가 영 거시기하더구만. 이렇게 귀신 나오는 집이라서야. 직원들 보기에 껄끄러울까 싶어서. 그래서 내 조금 손 좀 보탰지.”
“하이구.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에이 무슨, 생각보다 상태가 멀쩡해서 별로 손이 가진 않았네. 외부에 썩은 목재만 몇 갈고, 지붕에 새는 곳만 땜빵했을 뿐이야.”
미안한 마음에 주머니를 뒤지는 강태준이었다.
“이건 그냥 넘어가기 어렵겠는데요. 여기 수고비라도.”
“허허 됐네. 주택 수리는 내 전공 아니겠나. 어차피 한번 시간 내보려던 참이었어. 그보다 요새 일을 크게 벌여서 힘들다면서? 오늘도 공사장에서 오는 길인 듯한데.”
“들으셨습니까?”
“피같이 번 돈 아닌가. 나 줄 돈 있으면 안에 애들 고기라도 사 먹이게.”
한사코 봉투를 사양한 최달건은 피곤하다며 곧바로 퇴근했다.
집 안이 훤한 것이 깨끗이 도배가 끝나 있었다.
그 어두침침했던 공간이 고작 며칠 새, 제법 사람 살 만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던 것.
인기척을 듣고 공부방에서 나온 덕배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춘삼에게 와 안겼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