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5화 (35/361)

35화 부경 법률 사무소

다음날, 동래 연제면.

100년이 되어가는 오래된 청사 옆, 엄숙해 보이는 법원 주위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동래 부사였던 지석영을 초대판사로 했던 역사적인 건물.

6.25 때 임시정부 청사로 쓰이기도 했던 부민동 법원과 비교하면 낡고 고풍스러운 외관.

돔형의 장식 위에 달린 뾰족한 첨탑이 세월의 흐름을 알리는 가운데, 비교적 신식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새로 지은 신작로 앞을 걷다 보니 부경 변호사 사무소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간판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가자 데스크 앞에 있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손님을 맞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사건 의뢰를 구하려고요. 변호사님 계십니까?”

“이거 어쩌죠. 지금 점심시간인데…… 변호사님은 외부에서 고객분과 식사 약속이 있으셔서 늦게야 돌아오십니다.”

“언제쯤요?”

“한 3~4시는 정도는 되야 올 거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거 공교롭게 됐네요. 혹시 연락처나 주소지를 남겨 주실 수 있나요.”

난처한 듯 이야기하는 비서에 난처해진 강태준. 오늘은 괜스레 헛걸음한 걸까.

“송아 씨. 잠깐만 그분은 내 손님이신데? 내가 담당하도록 할게.”

“예? 주임님이요?”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아보자 안경을 쓴 얼굴에 빙그레 웃고 있다.

약간의 위화감이 사라지자 강태준은 곧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유하 씨?”

“네. 태준 씨, 저번에 뵙고 오래간만이네요.”

“연락처를 찾아서요. 마침 법률문제로 논의할 문제도 있고 말이죠.”

“오, 그렇나요? 그럼 기본적인 상담부터 시작해 보도록 할까요?”

익숙한 솜씨로 강태준을 응접실로 안내하는 설유하.

꽤 법률소송 건수가 많은지 사무실은 널찍하고 깨끗하다.

화분에 꽂힌 난을 살펴보던 사이, 밖으로 설유하가 잔을 내왔다.

“오미자차예요. 변호사님이 목 관리에 신경을 쓰셔서.”

“감사합니다.”

투명한 자줏빛의 색감이 찰랑거리는 잔.

김이 나는 찻잔을 입을 가져다 대는 강태준. 향긋한 과일 향과 함께 산미가 느껴지는 맛에 마음이 절로 가라앉았다.

“달달하고 맛있네요.”

“사실 그거 제가 직접 달인 거예요.”

“오, 정말요? 능력자신데요. 밖에서 팔아도 될 수준이에요.”

칭찬이 듣기 좋았는지 그녀가 입을 가리며 후후 웃었다.

“이 정도야 기본이죠. 그보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소식이 없어서 깜빡하셨나 했어요.”

“설마요, 제가 유하 씨를 잊을 리가 있나요?”

“말로만? 거의 1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는, 그럼 여태 뭐 하고 계셨는데요?”

“이것저것 바빴지요. 사업을 하느라. 뭐 돈 모으랴. 일하느라 정신없었어요.”

“호오, 그래서 진전은 좀 있으셨나요?”

“물론이죠. 좀 길 텐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강태준이 그간 경험한 일들은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물론 법적으로 문제 될 부분은 빼놓은 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경청하던 설유하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와, 그렇게 단기간에 사업체를 키우다니. 수완이 대단하시네요.”

“수완은 무슨, 운이 좋았죠.”

“운도 실력이죠. 그럼 누구든 다 하게요? 그럼 부산에 정착하신 건가요?”

“예. 온천동에 가족이랑 살려고 집을 마련했습니다. 임시 거처죠. 근데 유하 씨는 여기서 일하시는 건가요?”

“임시직이에요, 사무 행정으로 삼촌 일을 돕고 있어요. 시험준비도 할 겸 법무 실무를 배워 두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무슨 시험 준비요?”

“네, 고등고시 준비 중이에요. 저희 집안이 사실 법조인 집안이거든요. 오빠도 올해 합격했는데 그걸 보니 저도 왠지 부럽더라고요.”

설유하는 약간 부끄러운 듯이 해맑게 웃었다. 해방 이후 대법원에서는 사법 요원 양성소를 신설했는데 1949년 8월 「고등고시령」이 공포되면서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이 출범한다. 이를테면 사법 사업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그제야 응접실을 둘러보니 정갈하게 놓인 법전과 고시 서적들에 시선이 갔다.

절반 정도는 일본어로 된 서적들. 딱 보기에도 어려운 책들이었다.

“다 일본어로 되어 있네요.”

“아무래도 한국에는 판례가 적다 보니 사례집이 부족해서요. 오빠도 일본 책으로 공부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고시 공부라니, 대단한 결심을 하셨군요. 아무나 보는 시험이 아닌데, 이건 남자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죠.”

“아무래도 제가 가사 일엔 성미에 안 맞아서요. 몇 년 전, 사법과 최초로 여성 합격자가 나오기도 했고 말이죠. 사실 여성 최초가 목표였는데 아쉬워요.”

선구적인 여성 법조인의 출현이 그녀의 목표 의식에 불을 붙인 모양.

의욕이 넘치는 눈빛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진력이 대단하시군요. 그거 부모님께서 쉽게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엄청나게 졸랐죠. 뭐. 아빠는 딱 3년만 지원해 준다고 했어요. 그 안에 합격 못 하면 얌전히 집에서 정해 주는 짝이랑 결혼하라더군요. 그래서 휴학하고 여기 내려왔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꼭 붙어야겠군요.”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보다 태준 씨는 뭐 때문에 오셨다고 했죠?”

“예. 징발 보상 건 때문에요.”

“한번 보여 주시겠어요? 설경국 변호사님은 워낙 바쁘셔서 사무장님이 나가시면 제가 정리해서 드리거든요.”

강태준이 가져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준비서면과 사무 행정서류를 꽤 봐 온 듯 서류를 살피는 폼이 능숙했다. 안경을 다시 쓴 그녀가 서류를 대충 확인해 보더니 이내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흠. 요사이 꽤 문의가 잦은 부분이네요.”

“그렇습니까?”

“네. 특히 토지 보상 관련된 문의가 많죠. 헌데 이번 건은 꽤 크네요. 장평동에서 수용된 토지 3만 평에, 징발당한 배가 무려 5척이라. 이건 흔치 않은 규모인데요…….”

“덕분에 아버지께서 화병으로 돌아가셨지요.”

강태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뒷골을 짚고 넘어갈 일이다.

공사대금이 똥값이 된 것도 모자라, 강제 징발까지,

전쟁 한 방에 집안을 아주 말아먹게 생겼으니 화병으로 넘어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나마 강씨 가문 사대 독자라고 군대에 안 뽑힌 게 다행인가?’

눈치를 보던 설유하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필 본진이 거제 쪽이라 운이 안 좋으셨네요. 수용소 설치까지 그래도 관련 자료는 충실하네요. 보상 증권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달라고 떼쓰거나 서명 날인도 없는 서류만 가져온 분도 많은데 말이죠.”

“그럼 보상 신청은 가능한 겁니까?”

“흠, 추가 보완 서류가 좀 더 필요해요. 군에서 발부한 징발 확인서만으로는 부족함 감이 있으니 징발건물과 징발토지 일람표, 그리고 지적도 사본도 있어야 해요. 징발 대상 목록과 확인서, 지번에 가옥 수, 건평, 구조, 대지 평수까지 정확히 맞아야 신청서를 접수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보상액 산정도 직접 계산해야 되고요.”

“흠. 그건 이상하네요. 제가 정확히 본 건진 모르지만 징발법상 보상 요율은 국방부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원칙은 그런데 정해진 기준이 무척 애매해서 말이죠. 보상 요율이 불분명한 경우 법원이 석명을 해서 요율을 밝혀야 해요. 근데 법원에서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그렇게 품이 드는 일을 해 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저희가 그 요율대로 액수를 일일이 맞춰 가라?”

“네. 뭐 아쉬운 쪽이 알아서 준비하란 거죠. 아니면 인지대도 못 받아요.”

6.25 전쟁 중 등기소가 소실된 부분도 뼈아팠다. 전후 국가를 상대로 한 토지 및 건물 소유권 확인 소송이 폭증하는 것도 권리자를 확인할 길이 마땅찮았기 때문. 가만히만 있어도 불어나는 상황이다 보니 이렇게 복잡한 민원 보상까지 살펴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거 복잡하군요.”

“토지 브로커나 이때다 싶어 사기 치는 인간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예산도 부족하고, 정부 입장에선 신중할 수밖에. 확실한 근거 없이 보상금을 선뜩 지급할 수가 없겠지요.”

“그럼 추가로 필요한 서류까지 등록하면, 보상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저희도 장담할 수 없죠. 보상절차가 복잡하고, 순서가 한참 밀려 있는 터라. 단계적으로 수용이 해제되면 그때부터 순차적으로 보상이 이루어질 거예요. 이런 건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겠죠.”

솔직한 어투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과의 싸움이라…… 길게 볼 수밖에 없겠군요.”

“일단 정부가 보상할 여력이 없으니 어쩌겠어요. 다만 징발된 동산은 보상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특히 징발된 선박의 경우에는 전쟁 중 막 굴리는 바람에 훼손 시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돌려받는다 해도 별 쓸모없을 가능성이 커요. 이미 다른 곳에서 돌려막기 용으로 보상처리 되었을 수도 있고, 곤란하다 싶으면 침몰했다고 입 씻어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니까요.”

눈뜨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다.

시절이 시절이던 만큼 부조리가 판을 치는 시대.

강태준도 그런 일에 실망할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전부 보상받는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부만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지요.”

“좋아요. 그럼 변호사님이랑 상의해서 보상 청구 신청 건은 접수할게요. 추가로 필요한 서류는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설유하에게 당부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보니, 시간이 제법 남았다.

곧바로 공장으로 복귀하려던 강태준.

문득 복만이의 볼에 난 상처가 생각에 미쳤다.

“녀석 수염이라. 마침 시간도 남았으니 면도기라도 사 갈까?”

조금 시장한데 요기라도 하고 갈까. 내친김에 강태준은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한 번 큰 화재를 겪고 난 국제시장은 화마의 상처를 딛고 다시 번성했다. 양철지붕을 얹어 만든 판잣집들과 급조된 상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거리는 그야말로 번화함 그 자체.

길을 걷다 보니 눈동자가 새파란 미군과 팔짱을 낀 유한마담들, 곳곳에 파이프를 빼쭉이 입에 문 외국 선원들이 보이고 곳곳에 마카오 양복지로 옷을 맞춘 신사들이 눈에 띈다.

혼잡한 골목 노점과 쏘다니는 행상들. 좌판을 깔고 앉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흥정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거기 바깥양반, 샤쓰 하나 안 살려?”

“일 없습니다.”

“어이쿠.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 말고.”

“이 아줌니가 어딜 만지고 그러나? 나 참 남사스럽게.”

북국의 펭귄처럼 배가 뚱뚱해 뵈는 아줌마들 몇 명이 시전 앞에서 호객행위에 열중해 있다. 사실 통통한 몸빼 바지 아래는 애가 아니라 양키 물건을 한 아름씩 숨기는 장소들이었다.

호객행위를 피해 강태준은 대동 상회라고 적힌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상점 안은 바깥과 달리 깨끗하고 널찍했다. 가판대에는 미제 화장품부터 카메라, 만년필까지. 고급 옷감이 진열장에 전시된 가운데, 재킷과 방한 단화, 군용 외투나 전지, 하의, 럭키 스트라이크 같은 담배와 알싸한 맥주까지 등등 없는 게 없다.

그렇게 상점을 한 바퀴 둘러보던 찰나 어디선가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