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유류 비리
강태준의 뜬금없는 질문에 정성택의 눈이 가늘어졌다.
“니가 부탁을? 어떤 일인데?”
“뭐 약간 돈세탁도 필요한 일이라서. 일단 대호자원 쪽 정보부터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쪽과 거래하는 업체들을 알고 싶군요.”
“대호자원? 거기 양아치들 집단 아닌가?”
“이미 아시는군요.”
“꽤 유명한 곳이지. 안 좋은 의미로. 거기 사장 놈이 김무룡이던가. 지 형 빽 믿고 날뛰는 꼬락서니가 같잖다고 적이 많거든. 근데 갑자기 왜.”
“그쪽에 빚진 게 있어서 말이죠. 제가 뒤끝이 좀 심한 사람이라서. 당한 건 반드시 갚아 주는 성미라서요.”
“허어, 그거 곤란하군. 난 뒤탈 날 물건엔 손 안 대는 주의라서.”
튕기는 것이 꽤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강태준은 개의치 않았다.
“큰 건수인데 아쉽네요. 그럼 다른 사람에게 의뢰해야 되나?”
“허! 크기가 문제가 아니야. 공권력과 척을 지면 골치 아프니까. 일단 영업이 걸려 있지 않나.”
“그래도 최소 수천 달러 이상은 남을 텐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마치 그런 답변을 예상했다는 듯 깨끗하게 포기해 버리는 강태준. 하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정성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수천 달러짜리? 그게 뭔데?”
“아니, 안 한다면서요?”
“임마. 사람 약 올려놓고 말은 끝내야지. 어디 말해 봐. 들어나 보게.”
강태준이 슬쩍 이야기를 풀어 놓자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마지막에 유류 탱크라는 말을 듣자. 정성택은 헤에 하는 표정이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논두렁에 노다지가 있었군.”
“그래서 어쨌든 안 할거죠? 위험한 일이니 말입니다.”
“어이, 이 사람이 정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거 언제부터 하면 되나?”
이야기에 혹한 정성택은 두말없이 합류했다.
며칠 후, 정성택으로부터 은밀하게 호출이 왔다.
“그간 사정은 좀 알아보셨습니까?”
“아무래도 청일물류라는 회사가 그쪽과 거래선으로 유력하네. 거기도 유통업체인데 휘발유 연료 공급 및 도매상을 담당하는 모양이야. 그런데 이 회사 사업모델이 많이 의심스러워. 거래는 외상거래로 진행되나 보더군.”
“외상이라. 유용한 정보로군요. 감사합니다. 넙치 형님.”
“무슨 소리. 이제 우리도 한배를 탄 사이 아닌가?”
강태준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청일물류에서 사용하는 차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표식을 하고 있고 혹여 일이 문제 될 때를 대비해 동원되는 인력이 주기적으로 바뀐다. 이런 거래 자체가 위험을 동반하는 만큼 혹여나 거래 실수가 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다는 거지.’
강태준은 카발에서 특별히 차 한 대를 빌려 그쪽서 쓰는 차량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는 작업을 했다. 껍데기만 씌우는 일이었지만 손이 많이 갔다.
“뭐 이렇게 귀찮게 요구사항이 많아?”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어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대체 뭔 짓을 하려고 이런 거창한 걸 시켜?”
“그게 궁금하면 어디 들어 보실려우? 대신 한 번 들어오면 낙장불입이요.”
“거, 됐어. 내 거기까지 알아야 할 것도 아니고.”
“아니 진짜 안 궁금해요?”
“내가 안다고 할 일이 달라지진 않잖은가. 원래 이런 거는 안 되는 거지만 자네니까 특별히 봐주는 걸세.”
박진환은 은근 짜증을 내면서도 요구사항을 충실히 반영했다. 청일에서 나온 차와 번호판까지 똑같은 차량은 마치 처음부터 깔맞춤을 한 듯이 거의 동일했다.
결과물을 본 정성택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면 야간에는 절대 구분 못 하겠군.”
“그래도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됩니다.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으니. 그래서 대충 놈들 거래방식이 어떤진 알아봤어요?”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반반한 애들 투입해서 옆구리 찔러 봤더니 헬렐레하면서 다 불더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느낌인진 알 거 같다. 그렇게 강태준은 청일물류에서 쓰는 거래법을 확인해 달달 외웠다. 상대 물량을 가로채기 위해서는 그쪽에서 쓰는 수신호나 거래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 놔야 했던 것.
물론 일대에 기름탱크가 된 논을 무장한 경비들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수시로 보고 받는 와중이었다.
‘일단은 기다려야지.’
그렇게 상황을 관망하던 중, 마침내 기회가 도래했다. 청일물류에서 움직인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정성택 쪽에서 보낸 사람이 시작을 알렸다.
“청일 쪽에서 최종 거래를 준비 중인 것 같습니다. 카고 트럭을 따로 한 대 빼놨더군요.”
“시간은?”
“내일 자정쯤에 움직일 거 같습니다.”
“좋아, 우리도 거사는 내일로 당기기로 하지요.”
예전처럼 작업을 마친 강태준은 바로 복귀했다. 창고 안에는 철민이가 모은 목책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강태준이 아이들을 모아 두고 하나씩 주의를 주었다.
“다들 뭘 해야 하는지는 알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차량이 지체되게 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해.”
강태준은 소년들을 앞에 두고 앞으로 할 일을 반복적으로 숙지시켰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청일물류에서는 예정대로 트럭에 오일펌프와 200리터 드럼통과 20리터 자바라 통을 가득 싣고 출발했다.
망을 보던 소년들이 차량이 오는 도로변에 날카로운 못을 가득 뿌려 놨던 것.
야밤이라 밑을 확인하지 못한 차량은 그대로 못을 밟았다.
푸쉬쉭 소리를 내는 차량이 심하게 흔들리자, 운전대를 잡은 직원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량이 급정거하는 모습에 서둘러 차에서 내리는 운전사.
밖으로 뛰쳐나온 직원이 바람이 빠진 타이어 상태를 확인하곤 인상을 썼다.
“씨발 어떤 미친 새끼들이. 여기 못을 뿌려 두었어! 이거 빵꾸났네.”
“젠장 할. 때울 거는 있고?”
“이미 한 통 다 썼지. 이거 야단났군. 거래가 코앞인데”
“또 한마디 듣기 전에 서두르자고.”
차량이 귀한 시절인 만큼 스페어 같은 걸 들고 다닐 리가 없는 노릇.
투덜대던 직원 하나가 좌석 아래 휴지처럼 둘둘 말아 놓은 고무를 꺼냈다.
접합제 튜브를 꺼내 꾹 눌러 보니 양이 간당간당하게 남아 있었다.
“다행히 조금 남긴 했군. 이봐 동춘이, 뒷바퀴를 고정시켜 봐.”
“예이.”
구시렁대면서도 작업에 들어가는 녀석들. 애초에 제대로 포장도로가 없는 상황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던 만큼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기색이다.
하지만 녀석들의 고난은 시작일 뿐.
타이어를 빵꾸 냈단 소식을 확인한 강태준이 바로 대체 차량을 출발시켰다.
트럭에 예정된 장소로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던 대호 직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수신호를 마친 강태준 일행이 자리에서 내리자 수염이 듬성듬성한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누구야?”
“누구긴 누구요. 청일물류에서 왔소이다. 석진교라고 하오.”
수염을 숭숭 붙인 강태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석진교라고? 거참 처음 보는 얼굴인데, 동춘이 녀석은?”
“급한 일이 생겨서 대타로 왔소이다.”
“뭐…… 알았네. 오늘 필요할 양은 얼만가?”
좌우를 둘러보던 강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한 차 꽉꽉 채워 주시구려.”
“한 차를 전부? 아니, 뭐 그렇게 많이 필요해?”
“요새 정부에서 유류세를 2배로 올린다고 무척 시끄럽소. 자네들이야 모르겠지만 여기서 떼이고 저기서 떼이면 나름 타격이 크니까. 허니 이참에 부지런히 팔아먹어야지 않나.”
“하여간 나랏일 한다는 놈들이 제일 큰 도둑이라니까. 고생이 많구먼.”
“원래 정부 놈들이야 뜯어먹을 생각밖에 안 하지. 그러니 우리 같은 선량한 상인들이 고생하는 거 아니겠나. 아무튼 오늘 담아 갈 양이 많으니 좀 도와주슈.”
“끙, 알았소다.”
강태준의 자연스런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직원들.
의심을 하기엔 너무 천연덕스러운 모습. 무엇보다 달고 있는 번호판까지 동일하지 않은가.
강태준이 준비한 케로센 펌프를 작동시키자 꿀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탱크가 차오른다. 사이펀 원리로 손잡이를 잡아 돌리면 손쉽게 일정한 양을 퍼 올릴 수 있었다.
펌프로 빨아들인 휘발유를 물통에 담아 차량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자, 삼십 분도 되지 않아 트럭 한 대가 꽉 찼다. 마침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은 직원들이 더운 숨을 토했다.
“휴우. 힘들다.”
“다 되었수다. 거참, 많이도 가져가는군.”
“고생했소. 자 이건 수고비요.”
강태준이 1달러짜리 지폐를 앞주머니로 꽃아 주자 기분이 좋아진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런걸.”
“고생 많았소. 머, 그럼 수고하소.”
강태준 일행이 유유히 사라지자, 남아 있던 대호 직원들이 기지개를 켰다.
“하이구야. 오늘은 이걸로 끝이네.”
“철수하자고.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뒷정리를 시작하는 직원들. 하지만 차량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저편에서 다른 트럭 한 대가 달려왔다. 헐레벌떡 달려온 트럭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직원들이었다.
“아니 동춘이?”
“너무 늦었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 안 갔군.”
“그러게요. 없던 웅덩이가 생기지 않나, 야밤에 헤맸어. 미안하이.”
서둘러 트럭에서 내린 두 명이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돌렸다. 그 말에 대호자원 직원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아니, 그게 뭔 소리여. 조금 전에 청일에서 기름통 가져갔는데?”
“엉?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어안이 벙벙한 두 명이 서로 마주 보는 모습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얼굴.
잠시간 정적이 흐른 뒤. 문득 엄청난 것을 깨달은 녀석들이 소리를 질렀다.
“엉? 설마!”
“그럼 아까 그 인간들은?”
사태를 파악하기 직전.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와 코를 간지럽혔다.
“불이야!”
갑작스레 번진 화재 사고에 갈팡질팡하는 직원들.
어떻게든 모래를 부리며 꺼 보려고 했지만, 논두렁 전체에 발화 물질이 가득한 마당에 어설픈 대응이 통할 리가 없다.
무서운 속도로 번지는 화재에 결국 포기한 대호 직원들이 앞다투어 차에 올랐다.
“도저히 안 되겠군. 당장 탈출한다.”
“그럼 기름은요?”
“시부럴. 지금 그게 문제야? 일단은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화재는 계속 번져 근처의 초목에까지 엉겨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논밭을 뒤덮자 노란 화염이 멀리서도 환히 보일 정도였다.
“아니 저게 뭐시여!”
“아니, 산불 아닌감?”
그때 펑 하는 폭발 소리와 함께 불꽃이 밖으로 번지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몰려든 주민들이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가운데, 지나던 행인들 역시 구경에 바쁘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 화재에 밖의 소란이 커지자, 밤 귀가 얇은 김무룡이 졸린 눈을 비비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게 지금 저쪽 산에서 화재가.”
“저기 우리 기름 창고 있는 쪽 아니야?”
“예. 그래서.”
“이노무시키야! 그게 말이야 방구야. 당장 가서 확인해 봐!”
그때 끼익 소리와 함께 트럭이 도착했다.
검댕이 묻은 듯 검게 그을린 차량은 중간에 충격이 있었는지 앞 범퍼가 볼품없이 찌그러져 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산불이 터졌습니다.”
“워어. 진정하고, 이, 일이 어떻게 된 거야?”
“그게. 갑작스러운 화재로 논밭이 싹 다 타 버렸습니다. 기름 창고까지 전부 다요.”
“뭐라고! 그게 어떻게 된 건데?”
“거기서 불날 일이 뭐 있겠습니까?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화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뭐, 이런 쳐죽일! 범인이 누구야! 대체!”
어떤 쌍노무 새끼가 내 사업에 재를 뿌렸나?
분기탱천한 김무룡이 씩씩대는 찰나, 순식간에 들이친 MP(군 경찰) 차들이 대호자원 주변을 포위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