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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30화 (30/361)

30화 비밀 창고

강태준의 돌발 행동에 놀란 복만이가 뇌까리듯 낮게 외쳤다.

“형님! 대체 어쩌려고.”

“뭐긴 뭐야. 저놈들 안에 든 게 뭔지 확인부터 해야지.”

“아니 잘못 걸리면 다 뒈진다면서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고민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강태준에 춘삼이도 불쑥 일어나 창고로 향했다.

“이봐, 춘삼이 너까지?”

“일단 갑시다. 지금이 기회잖습니까?”

“젠장, 이젠 하다 하다 괭이새끼 노릇까지 하네.”

낮게 욕설을 지껄이던 복만이는 투덜거리면서도 뒤를 따랐다.

다행히 창고 뒤편의 경계는 허술한 듯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 안구가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연하게 비치는 한줄기 달빛이 창을 타고 스며들었다.

달빛을 따라 정체를 드러내는 그림자. 가로등 기둥을 비롯해 양계장용 파이프나 고추 말뚝, 호미나 삽 같은 갖가지 고철들이 쌓여 있다.

녹이 슨 물건들 탓인가 비릿한 쇳내가 창고 안을 진동한다.

조심스레 고철 더미를 뒤져 보는 강태준.

최근에 도착한 물량이든 맨 앞에 널브러진 더미가 익숙하다.

자기가 표시해 둔 백묵 표시에 강태준의 눈이 커졌다.

“이건 죄다 우리 거군요. 이런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다 훔쳐 온 건 아니겠지. 근데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그러게요. 철자재 말고 딱히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그렇다면 뭔가 쌈짓돈이라도 숨겨져 있다던 생각은 기우였던가?

그때 긴 광목천을 덮은 곳을 킁킁대던 춘삼이가 개처럼 코를 벌름거렸다.

“저기, 이쪽에서 기름 냄새가 좀 나는데요?”

“뭐?”

뒤따라온 강태준이 천막 천을 조심스럽게 들치니, 55갤런짜리 드럼통 수십 드럼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났다.

“미군 쪽에서 공수한 물건이군. 이 정도 양이면 꽤 짭짤하겠는걸.”

“그러게. POL(미군 유류 보급창)에서 나온 건가요. 미군부대 마크가 찍혀 있군요.”

그때 춘삼이가 잠시 드럼통을 만져 보더니 이상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저기요. 이거 안이 꽉 차 있는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가락을 튕긴 강태준이 드럼에 귀를 대보니 안에서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이게 다 기름이라고?’

빈 드럼이 아니라면 설마 이건?

생각이 이어지기도 잠시, 잠시 안내를 맡은 거지 소년이 다급히 신호를 보냈다.

“사장님! 사람 옵니다.”

강태준 일행이 서둘러 천막 아래로 숨었기 무섭게 들려오는 엔진음.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이 도착하자 아까까지 졸고 있던 경비원이 벌떡 일어나 번 서는 척을 했다.

잠시 후, 덜컥 소리와 함께 차에서 내린 인원들이 가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야. 성가신 새끼들. 일을 두 번 시키네. 처음부터 그냥 부으면 될걸.”

“만사 불여튼튼이지.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그러는 거지.”

“거 공자님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째깍째깍 움직이슈. 무룡 형님한테 처맞기 전에.”

드럼을 차 한 대에 꽉 채운 일행이 사라지자, 경례를 붙이는 경비원.

뒤이어 야적장을 빠져나온 강태준 일행은 서둘러 덜컹거리는 차를 쫓았다.

진흙 묻은 바퀴 자국을 따라 한참을 추적해 보니, 어느새 수풀이 무성한 논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명히 이 길로 갔을 텐데?”

“잠깐, 당장 머리 숙여!”

강태준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타난 트럭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이 지나간다.

길목을 간신히 벗어난 강태준 일행은 포복 자세로 꼼짝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엄폐물 하나 없는 논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들켜 버릴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차량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강태준이 이마를 훔쳤다.

“십년감수했군.”

“갔군요.”

인기척이 사라지자, 강태준은 트럭이 지나간 장소를 되짚어 추적을 계속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바퀴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 보니 방치된 논밭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6.25 이후라서인지 주인 없이 버려진 휴경지들.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 장소에 도착하자, 군화를 벗어 던진 강태준이 버려진 논두렁 밑을 향해 조심스레 내려갔다.

흙과 소나무 가지나 짚 등이 쌓인 휴경지.

다짜고짜 흙더미를 헤집는 강태준의 행동에 복만이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형님?”

“일단 망보고 있어.”

뭔 짓인가 싶었지만 진지한 강태준의 태도에 잠자코 침묵하는 복만이.

불안한 듯 지켜보던 일행은 다음 순간 숨을 헛 하고 들이켰다.

논에 쌓인 흙 아래 방수포로 된 천막 천이 나타난 것.

이윽고 덮개를 벗기는 순간, 역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코를 씰룩이던 복만이가 기침했다.

“쿨럭, 아니 이거 전부 폐윱니까?”

“아니, 위에는 대충 슬러지로 덮어서 폐유인 것처럼 위장한 거지. 바로 옆 구덩이에는 폐유가 아니라 휘발유야. 진짜 기름이라고.”

논 한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천막 천을 깐 다음 휘발유를 붓고, 비닐로 다시 덮는다.

그리고 흙과 나뭇가지 등을 뿌려 위장해 놓은 것이다.

그야말로 논 자체가 훌륭한 저장 탱크가 된 셈.

규모로 보니 비닐 구덩이로 만든 유류 탱크는 최소 반 마지기를 넘어설 규모.

상상을 초월하는 물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일행이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요. 이 미친놈들. 대체 얼마를 빼돌린 거야?”

보초도 하나 없이 철수한 것을 보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양을 보니 그 큰 구덩이는 반 이상 채워진 채 강태준이 양을 가늠해 보았다.

“앞으로도 몇 번 더 왔다 갔다 할 텐데…… 이 정도 휘발유량이면 적어도 1,500배럴은 넘게 들어가겠어.”

“그럼 대체 돈으로 얼마죠?”

“시가가 한 배럴당 최소 10달러라는데, 원가대로만 팔아도 일만오천 달러는 족히 넘겠지.”

“허……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먼요.”

그때 덜컹 소리와 함께 다시 차량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눈치를 깐 강태준 일행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대편 논두렁을 거쳐 서둘러 빠져나왔다.

트럭에서 내린 인부들이 콸콸 기름을 붓는 모습을 보며 복만이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어? 저쪽이 우릴 건들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이봐 거기 소년 철민이라고 했지?”

“예. 맞습니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도와줄 수 있겠나? 사례는 톡톡히 하지.”

“걱정 마십쇼. 이 정도까지 했는데 지도 빈손으로는 못 끝내죠.”

철민의 눈빛 역시 간만에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밥 빌어먹는 생활만 수년째. 꿈도 희망도 없던 철민이에게 있어 하늘이 준 기회.

눈앞에 닥친 기회를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럼 일단 철수하지. 일단 계획을 짜야 하지 않나.”

“빨리 뽑아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 어디 처분하기라도 하면.”

“걱정 마. 이 정도 물량을 소화할 곳이 그렇게 많진 않지. 분명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업체가 있을 테니. 당분간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기회를 보자고…….”

이렇게 큰 물량을 한 번에 처리하려면 그만한 인력과 전문가들이 필요한 법.

이번 일을 깨끗하게 처리할 인물은 단 한 명뿐.

마침 대성기원에 들어간 정성택은 막 시작하는 바둑의 저변을 높이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로 일하는 중이라 들었다.

강태준이 도착해 보니, 사람들의 열기로 그득한 기원 안은 승부욕으로 달아올랐다. 핏발이 곤두선 눈빛들. 아무리 봐도 단순한 바둑 팬들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와 대단하네. 역시 넙치 형님, 수완이 보통내기가 아니네요.”

“그러게. 짭새는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적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계시는구먼.”

이렇게 아주 대놓고 영업장을 운용 중이시군.

칙칙한 분위기. 매연같이 짙은 담배 향이 뇌를 혼미하게 한다.

마치 훈연 중인 소시지가 된 기분. 아니, 뇌에 니코틴을 직접 투하하는 느낌이랄까.

그때 목이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거한 하나가 강태준을 알아보곤 금세 친한 척을 했다.

“오, 태준 형님?”

“거 오랜만이다. 곰손아.”

“곰손은 머리 가운데 빵꾸 난 애고 지는 석두입니더.”

“그래, 석두야 넙치 형님은 어딨냐?”

“넙치 형님은 지금 업무 중이셔서요. 잠시만 구경하고 계십시오.”

뒷짐을 진 강태준이 대국을 살펴보는 사이, 시합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패색이 짙은 경기를 훔쳐보는 강태준.

두한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에서 육수를 흘리던 남자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이, 이럴 수는 없어!”

대국에서 패한 남자가 좌절한 듯 머리를 쥐어뜯자 몰려드는 시선들.

낯익은 거한 두 명이 나타나더니 솥뚜껑만 한 손을 어깨에 얹고 주의를 주었다.

“대국할 때는 절대 정숙. 룰을 모르십니까?”

“죄, 죄송합니다.”

“규칙은 규칙이니 오늘은 이만 퇴장하시죠. 자, 손님을 정중히 모시게.”

잠시 후, 체념한 남자가 순순히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대국에 집중했다.

이런 규칙이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물리력이 동원되었을지 안 봐도 뻔할 뻔 자.

보기만큼 아름다운 과정은 아니었겠지.

그때 돌아온 석두가 강태준을 불렀다.

“자, 들어오시랍니다.”

석두가 안내한 곳은 한국기원 사무처란 작은 안내판이 적힌 사무실.

실내에 들어가자 정성택이 손을 벌리며 반갑게 맞는다.

“넙치 형님?”

“오, 태준이, 이거 얼마 만이냐? 사업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자 앉아.”

몇 달 만에 본 정성택은 줄무늬가 섞인 말쑥한 양복 차림이다. 소파에 앉은 강태준이 인사를 올렸다.

“미리 찾아오지 못해 죄송하네요. 조 선생님 밑에 들어가셨다 들었는데 그간 기력은 많이 늘으셨습니까?”

“덕분에, 요새 학교 다시 다니는 기분이더구먼.”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고풍스런 소파부터 탁상까지.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널려 있다. 오크목으로 된 책상 위 사무처장이라 적힌 명패가 꽤 근사해 보인다.

“여기가 형님이 근무하는 방이군요. 사무처장이라. 신임이 두터우신가 봅니다.”

“막 시작하는 기원이라 그런지 운영할 사람이 없더군. 덕분에 과분한 지위를 맡았지.”

“과분하긴요. 우리 형님만큼 관리 잘하시는 분이 또 어딨습니까?”

“칭찬 고맙네. 이왕 온 거 한판 두겠나? 요새 기력이 많이 늘었다고.”

“사양하지 않죠.”

바둑판을 꺼낸 둘이 간만에 서로 마주 앉았다. 흑돌을 집은 강태준이 대국 도중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밖을 보니 꽤 판이 커졌던데. 밖에는 다 회원들인가요?”

“그럴 리가. 옛적부터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놈들이 태반이야. 고맙게도 내가 이쪽으로 옮겼다는 이야길 듣고 다들 따라오더군.”

“이런 장사는 손 턴다 들었는데 계속하는 겁니까?”

“그랬지. 근데 현실은 이상과 다르지 않나. 딸린 식구들도 있는데 땅만 파고야 살 수는 없지. 당장 그만둬도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 마음 저도 이해합니다.”

“다행히 요새 진지하게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지. 그래서 일본에서 국수들이랑 비공식 대전을 가져볼까 하이. 특히 기타니 선생께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시고.”

“꽤 큰 걸 노리시는군요.”

“아무래도 바둑 저변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이벤트가 필요하지. 대신 사람을 초빙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나. 저쪽에서 방문하려 해도 최소한 숙소나 뱃값 정돈 마련해야 면이 서니 말이야.”

자조적인 말투에 강태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좀 쉽겠군요.”

“뭐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혹시 일 하나 같이 안 하실렵니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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