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고철 도둑
도끼눈을 뜬 박원숙의 표정이 새초롬하기 그지없다.
눈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복만이.
한참 동안 아무 말을 안 하던 박원숙이 휴 한숨을 쉬더니 한마디를 뱉었다.
“태준 동생, 깡패야? 날 이렇게까지 수고시키다니. 이건 좀 아닌데. 얌전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거 실망이야.”
“면목 없습니다.”
강태준이 고개를 숙이자 박원숙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농담이고 잘 때렸어. 사내라면 그런 깡은 있어야지.”
“네?”
“뒤에서 알아보니, 김무룡 그 인간 평이 무지 안 좋더라. 그런 양아치랑 어울리면 함께 쓰레기 취급받는 거 한순간이야. 내 얼굴 봐서 더는 싸우지 마.”
“네, 박 여사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들어가서 쉬어. 내가 장원영 소장에게 말해 뒀으니, 오늘 쉬고, 내일 출근하면 돼.”
미리 이야기해 두었으니 걱정 말라는 박원숙. 차로 돌아온 일행이 집에 도달하자 춘삼이가 강태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너도 수고했다. 춘삼이가 있어 든든하구먼. 덩치만 큰 풍선 덩어리랑은 다르게 말이야.”
“아니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하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뭐래? 내가 너라고 했나?”
억울한 듯 항변하는 복만이.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즈음. 저 멀리 춘삼이의 동생인 덕배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릎이 살짝 까진 것이 중간에 몇 번 넘어진 듯. 놀란 춘삼이가 동생을 챙겼다.
“무슨 일이냐? 그 상처는. 혹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
“크, 큰일 났어요. 형.”
“무슨 일이야.”
“창고가! 창고가 싹 털렸어요!”
“뭐라고?”
강태준이 다급하게 봉래동으로 가 보니 과연 창고 앞은 엉망진창이었다.
활짝 열린 창고 안에는 텅텅 비어있다.
이포 제련소 쪽에 판매를 위해 쌓아 두었던 고철은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허,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어제 하룻밤 사이에 싹 털어 갔어요.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확인까지 했는데…….”
울먹이는 덕배를 끌어안으며 진정시키는 춘삼이.
창고를 잠글 때 쓰는 큼직한 자물쇠는 베어 낸 무의 단면처럼 매끈하게 잘려 있었다.
울기 직전의 덕배를 감싸며 춘삼이가 자책했다.
“이건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경황이 없어서,”
“누구 잘못도 아니야. 이건 대놓고 조직적인 범죄지.”
“어떤 자식이 이런 짓을? 경찰부터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 너도 경찰 놈들 믿을 수 있겠어? 이런 일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오히려 증거인멸 할지도 모르지.”
“하긴…….”
김무룡과의 일로 경찰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
흥분을 가라앉힌 강태준은 찬찬히 현장을 살폈다.
창고 근처 입구부터 도로 주변까지. 샅샅이 현장을 뒤지던 강태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적장 근처의 진흙 길에서 바퀴 자국을 찾아냈다.
“아. 저기도 바퀴 자국이 있습니다.”
“자국을 보니 제무시 트럭인 거 같군.”
모양이 뭉개지긴 했지만 대충 육안으로 구별은 가능한 수준.
그때 실내에 들어갔다 돌아온 춘삼이가 보고를 올렸다.
“여기도 족적이 여러 개 있네요. 아무래도 떼거리로 와서 급히 나갔나 봅니다.”
과연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는 것이 한두 명이 아니다.
“군화를 신고 들어왔군. 이거.”
“이 정도면, 좀도둑 정도가 아니라, 전문 털이범들 수작인데요. 아주 돈 될 만한 물건만 싹 골라서 가져갔습니다.”
“그나마 남은 증거가 있어 다행이긴 합니다만 이걸로 범인 특정이 가능할지.”
“아마도 어렵겠지. 일단 이 근처에서 자주 출몰하는 녀석한테 조언이라도 구해야지. 혹여 넝마주이라던지, 거지라던지. 아마 목격자가 있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 춘삼이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네가?”
“예. 이쪽 거지 녀석들이랑 친분을 만들어 뒀거든요. 혹 보초가 필요할 거 같아서. 그쪽에 물어보면 대충 뭐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재주가 좋구먼. 그럼 당분간 너는 아픈 걸로 해 둘 테니 출근하지 말고. 일단 누가 그랬는지 따로 추적해 보는 게 좋겠어.”
“그럼 경찰에는요?”
“일단 형식적으로 신고는 해야지. 별 기대는 안 되지만 말이야.”
다음날 철거장으로 가니 이미 소문이 쫙 퍼진 상태.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황철득이 위로할 겸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괜찮나? 자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지나간 일은 잊어야죠.”
“훔칠 게 없어서 고철을 훔치다니 별일이 다 있구먼.”
“누군가 평소에 절 주시하고 있었나 보지요.”
의미심장한 말투에 황철득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때마침 보기 싫은 얼굴들이 등장했다. 김무룡이 제 똘마니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번에 처맞은 일이 충격이었는지 이번에 데려온 똘마니들은 하나같이 어깨가 넓고 험악하게 생긴 놈들이었다. 강태준을 본 녀석은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듯 거들먹거리기 바빴다.
“이봐 돌팔이, 창고 털렸다며? 그러게 작작 나대고 다녔어야지. 사람이 그렇게 까칠하니 매를 버는 게 아닌가?”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김 사장님 코는 괜찮습니까? 콧대가 아주 없어진 것 같은데.”
“허허. 뭔 소리야? 그게.”
시치미를 떼는 김무룡에 강태준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모른 척하시긴, 그러잖아도 답 없는 상판 아입니까? 더 못생겨지기 전에 관리 좀 하셔야죠.”
강태준의 비아냥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
못 들은 척했지만 다들 귀가 있다. 김무룡이 처맞았다는 소식에 은근히 고소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김무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는 새끼들 나와! 이게 웃겨?”
씩씩대는 김무룡의 눈빛에 딴청을 부리는 인부들.
강태준을 돌아본 김무룡이 두 손가락을 눈에 대며 중얼거렸다.
“두고 봐. 이 새끼. 언제까지 그렇게 나대는지 보겠어.”
양철통을 쾅 하고 발로 찬 그가 씩씩대며 사라지자, 복만이가 눈을 흘겼다.
“새끼,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저 인간이 우리 고철 창고 털렸는지 어째 알고서 나불거리는 걸 보니 범인인 거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물증이 없지 않나.”
“그럼 어떡합니까.”
“차근차근 확인해 봐야지.”
강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에 열중했다.
업무를 마친 강태준이 돌아오자, 춘삼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경찰은 그냥 대충 보는 시늉만 하다 돌아갔습니다.”
“그 자식들이 뭐라던?”
“주인 표시도 없는 도난된 고철을 어떻게 찾냐고, 신고해도 답 없으니 걍 포기하라네요.”
흥분한 복만이가 씨근덕거렸다.
“이 개아들놈의 시키들. 거봐, 짭새들이 하는 게 없다니까?”
“그래도 대신 실마리는 잡았습니다. 한 녀석이 봤다네요. 화물차 빠져나가는 거.”
“정말?”
고개를 빼꼼히 내민 녀석을 소개했다.
14살 정도 되었을까.
풀죽도 못 먹은 듯 빼빼 마른 녀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제가 봤어요,”
“철민이라고 저 목책교 아래서 사는 녀석입니다. 근처에서 폐지랑 깡통 수거로 먹고사는 녀석인데 가끔 물건 가져오면 오징어를 나눠 주곤 했어요.”
슬쩍 눈치를 보는 춘삼이의 말에 강태준은 약간 짠한 감정이 들었다.
본인이 워낙 고생하며 살다 보니, 불쌍한 애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잘했다. 그래서 뭘 봤다고?”
“네. 봉래동 근처에서 깡통을 줍다가. 갑자기 트럭 한 대가 지나가더라니까요. 그랬더니 렌치로 자물쇠를 부수고 창고 안에 들어가더라고요.”
“확실해?”
“네. 확실해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딴 건 몰라도 시력은 좋거든요.”
“그럼 어디로 가든?”
“바로 저쪽이요. 혹시 몰라 따라가 봤어요.”
녀석이 가리킨 장소는 근처의 야산 중턱으로 산 넘어 고추밭 근처
과연 그쪽으로 가 보니 과연 긴 홈과 함께 타이어 자국이 나 있다.
주위를 살피던 강태준 일행은 오래지 않아 근처에서 마실을 나온 듯한 농부를 발견했다.
“어르신, 혹시 근처에서 지나가는 차 못 보셨습니까?”
“언제 말인가?”
“어제 새벽 정도요. 한 3~4시쯤?”
“아, 대호자원 트럭 말인가? 어제 새벽에 부릉 소리가 나서 깼지. 갑자기 뭘 왕창 싣고 가더니 어디론가 빠지더군.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 너무하더구먼. 사람이 잠은 재우고 부려 먹어야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뭐 뻔하지. 여기서 2km쯤 더 가면 폐목재랑 고철 쌓는 야적장이 있네. 대호에서 빌려 쓰는 곳이야.”
“감사합니다. 어르신.”
인사를 마친 강태준이 긴급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어쩔까요?”
“당장 그쪽으로 가는 건 위험부담이 커. 일단 으슥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지.”
그날 밤, 강태준은 야음을 틈타, 야적장 쪽으로 향했다. 녹슨 자물쇠가 잠겨 있는 정문을 돌아 살금살금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얼기설기 쳐진 펜스 안쪽 부지에 폐목재가 한가득 쌓여 있다.
머뭇거리는 일행에 거지 소년이 손을 까닥했다.
“자, 이쪽으로, 길이 하나 더 있어요.”
야적장을 우회해 돌자 일부 지역에 철조망이 벽 대신 설치되어 있다. 잠시 거리를 가늠하던 소년이 몇 발짝을 가늠하더니 철조망 근처에 놓인 판자를 치웠다.
판자 아래 감쪽같이 숨겨진 개구멍 하나.
개구멍을 나와 야적장 부지로 들어서니 엉성하게 쌓은 가건물 옆으로 남자 두 명이 번을 서고 있다.
초소 옆 낡은 트럭을 확인한 철민이가 흥분한 어조로 속삭였다.
“저겁니다. 바로 어제저녁에 봤던 차예요.”
“망할 개자식. 저놈들을 그냥!!”
흥분한 복만이가 당장 튀어 나가려고 하자 강태준이 서둘러 제지했다.
“임마, 정신 차려. 지금 나가서 뭐 하게.”
“당장 가서 돌려받아야죠.”
“어, 니들이 우리 고철 훔쳐 갔으니 당장 내놔. 그렇게 설득할 요량인가?”
“그…… 그건.”
정곡을 찔린 복만이가 할 말을 잃자 강태준이 핀잔을 주었다.
“인마, 생각 좀 해. 애초에 고철이 우리 거라는 물증도 없는데, 가서 뭐라고 따질 건데? 잡아떼면 그만이지. 지금 쳐들어가 봐야 우리만 바보가 될 뿐이야.”
“그럼 여기 왜 온 겁니까?”
“누가 범인인지 확인하러. 누가 빼돌렸는지 알아야 향후 대응책을 생각할 게 아닌가. 근데 폐고철 지키는 놈들치고는 좀 경계가 삼엄한 거 같은데. 고철 말고 귀한 것이라도 보관해 둔 건가.”
“그러게요. 뭔가 이상하긴 하군요.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 놨나?”
“그러게. 굳이 폐목재만 밖에 둘 이유가 있나?”
“자. 소리 죽여요. 누가 옵니다. 쉬!”
인기척이 느껴지자 신호에 따라 일행은 덤불 속으로 숨었다.
잠시 후 번을 서던 녀석 앞으로 구부정한 자세의 동료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교대는 아직 멀었나? 여긴 겁나게 썰렁하군.”
“으슬으슬한 게 좀 춥지? 불이 날까. 모닥불도 못 피게 하니 원.”
“고생이 많아. 자. 이거 마시고 해.”
평범한 물병을 받은 경비원이 냄새를 맡더니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술 아닌가?”
“고급 위스키일세. 군부대에서 쌔벼 온 거지.”
“이렇게 귀한걸.”
“몸 좀 데우면서 하게. 도수가 높은 물건이니 조금씩만 마셔.”
“역시 자네밖에 없군. 고마우이.”
인사를 마친 동료가 자리로 돌아가자 조금씩 물병을 홀짝이던 경비원.
얼굴이 발그레해진 녀석이 은근슬쩍 등을 기댄 채 잠을 청한다.
낮게 들려오는 코골이에 슬그머니 일어난 강태준이 창고 뒤편으로 향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