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5화 (25/361)

25화 캠프 하야리아

“관사가 아주 좋네요.”

“응. 새로 인테리어한 건데, 맘에 들어. 내가 꽤 신경을 썼지. 바깥양반도 맘에 들어 하더라고.”

“과연, 능력자십니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자, 앉아. 아줌마, 손님 왔으니 차 좀 내와요.”

“예. 마님.”

하녀 복을 입은 중년 여인이 꽃이 그려진 포트메리온 다기 세트를 가져왔다.

앙증맞게 생긴 다기를 본 복만이가 눈치를 보자, 박 여사가 손짓했다.

“들어요. 우유는 취향대로 넣어 먹으면 돼요.”

“예. 감사합니다. 사모님.”

얼떨떨해하는 복만이가 조심스럽게 잔을 잡았다.

여주인이 찻잔을 들자 강태준도 따라 잔을 들었다.

그윽한 홍차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쿠키를 집어 먹는 복만이를 옆에 둔 채 강태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흠. 그래서 미군기지 일을 맡고 싶다고?”

“예. 듣자 하니 고물상을 하려면 공사장부터 돌라고 조언하시더라고요. 고물이나 폐품 배출업체 확보가 우선이라고. 일단 차근차근해 나가려고 합니다.”

캠프 하야리아는 한미 원조를 담당하는 유솜 부지가 내정된 만큼 하루가 멀다고 공사가 이어지는 중이다. 목재, 철근, 플라스틱은 물론 알루미늄, 특수강까지. 자원이 쏟아져 나오는 건설 현장은 그야말로 노다지 그 자체.

미군과의 거래로 신용을 인정받는다면 규모를 확장하기 쉬운 만큼 강태준으로서는 꼭 필요한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 자리 청탁하러 왔다?”

“뭐 그렇지요.”

“근데 어쩌나? 내가 동생을 사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좀 어려운 일인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라고.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게 있지 않겠어. 동생?”

그 말에 강태준이 눈짓하자 복만이가 가져온 액자를 하나 꺼냈다.

“뭐야? 이게.”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말씀드릴 타이밍을 놓쳤네요. 그림입니다. 이건.”

액자의 포장을 뜯자, 낯선 화풍의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복사꽃이 피어 있고, 달구지를 태운 가족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

푸른 바다와 노란빛의 색감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물장구를 치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이고 복사꽃 위에 앉은 새가 그 모습을 내려다본다.

각 장면만 떼고 보면 삽화처럼 묘한 느낌을 주는 색채에 그림을 주시하던 박 여사가 무거웠던 말문을 열었다.

“대단한데, 보통 그림이 아니네. 이거 누가 그린 거야?”

“백종섭이라고 제가 후원하고 있는 화가분입니다. 메이지 대학 출신의 인텔리인데 저랑 연이 닿아서 그림을 한 점 선물 받았지요.”

“호오. 독지가 흉내도 내고 우리 강 기사가 많이 컸네. 근데 그림 보는 재주가 있는지는 몰랐는걸.”

“하하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사교 모임에도 면이 설 것 같은데 아닐까요.”

박 여사는 사실 이런 교양 같은 부분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박원숙이 운 좋게 장교 하나를 유혹해 후처 자리를 들어먹었다고 생각하지만, 미군도 영관급 장교의 정도 되면 아무 여자랑 상대하지 않는다.

하룻밤 상대면 몰라도 배우자감으로 현지인을 고른다는 건 보통의 경우에는 벌어지기 힘든 일이다.

그러니 술집 마담 출신으로 후처 자리를 꿰찰 정도면 사람 후리는 솜씨가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거다. 미모도 미모지만 배짱이 남자 못지않은 그녀가 가장 목숨을 거는 부분이 다름 아닌 교양이었다. 돈 많은 사모님 사이에서 큰 손으로 행세하려면 예술적인 감각은 필수. 특히 그림은 좋은 자산 증식 수단인 동시에 화젯거리다.

하지만 좋은 예술품이라는 것은 애초에 돈 주고도 구하기가 어려운 물건인 만큼 항상 목마르던 부분이었다. 대번에 표정이 달라진 박 여사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이래서 내 동생을 좋아해. 어떻게 내 맘에 쏙 드는 걸 골라 가져왔을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부군께 그런 말씀은 삼가주시길. 영창 갈까 두렵군요.”

“사리기는. 암튼 우리 동생이 성의를 보였으니 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네. 한국인 하면 정 아니겠어?”

“그러면?”

“이번에 미군 부대에서 진행 중인 사업이 하나 있지. 거기 철거 반장 자리 하나 비워 놓으라고 할게. 내 소개로 왔다고 해.”

“감사합니다. 누님.”

눈을 찡긋하는 것이 꽤 점수를 딴 듯하다. 다음날 GMC에 탄 그는 미래건설 사무실로 행했다. 공사를 위해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가자 미래건설 장원영 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신문 1면의 단골이었던 얼굴을 마주하자, 강태준은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장원영은 미래건설 장두영 회장의 7번째 동생으로 대학 졸업 후, 미 8군에서 통역관 일을 하던 그는 미래건설의 이인자로 군림하다 1970년대 중동 진출을 놓고 형과 갈등을 빚은 끝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백두건설을 세운다.

이후 승승장구하던 백두건설은 한때 건설 도급 3위, 재계 서열 12위 안까지 치고 올라가는 등 기염을 토했다.

‘물론 IMF 때 완전히 폭망해서 회사가 공중 분해돼 버렸지만…….’

덩치를 보니 과연 체구가 크고 다부지게 생겼다. 그런 감상도 잠시 고개를 든 장원영이 대뜸 말했다.

“자네가 강태준인가?”

“예. 그렇습니다.”

군복을 물들인 작업복에 군화를 신은 모습에 장원영이 말했다.

“차림은 그럴듯한데, 철거 경험은?”

“철거 경험은 없습니다만, 건물 재건축 현장 정도는 다녀봤습니다.”

일단 공사를 하긴 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자 장원영이 난색을 표했다.

“흠…… 여기 추천서에는 철거 반장이 어울린다고 쓰여 있는데…… 철거 반장직은 경험 없이는 곤란해. 박 여사가 소개해서 믿었는데 이거 많이 난감하구만.”

그렇다고 특별히 부탁받은 사람을 일용직으로 채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망설이는 장원영에 강태준이 씩씩하게 말했다.

“무슨 보직이든 좋으니 일단 일부터 시켜 주십쇼. 이래 봬도 몸도 건강하고 눈치도 빠릅니다. 막일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일단 알았네. 그럼 우리 신익현 주임 쪽에 말해 둘 테니 일부터 익숙해지시게나…… 적당히 눈치를 봐서 반장으로 보직 변경해 주겠네.”

“네, 그 정도면 만족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로 잘할 수 있을까. 얼굴만 봐서는 못 미더운 장원영이었지만 미군의 실세인 박 여사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다. 한숨을 쉰 그가 곧 신색을 되찾고 조용히 경고했다.

“패기는 좋구먼. 다만 철거 작업이라고 쉽게 보다간 큰코다쳐. 요령 피우면 아무리 박 여사 추천이라도 바로 나가리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럼 나가 봐.”

강태준은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미래에서 맡은 철거는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을 해체하는 작업으로 톱다운 방식에 따라 굴착기로 때려 해체할 예정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들어서자, 주의가 한쪽으로 쏠렸다.

“저 인간인가? 박 마담이 꽂아 줬다는?”

“시팔, 상전 오셨군. 여기가 무슨 낙하산 받아 주는 곳도 아니고.”

“반반한 게 기둥서방이라도 되나?”

수군대는 사람들. 날이 선 눈빛에 적의가 가득하다.

군기가 바짝 든 복만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어째 분위기가 별로 호의적이지 않군요.”

“애초에 밥그릇 싸움인데 당연하지. 신경 쓰지 마. 애초에 이 정도는 각오하고 온 거 아닌가. 철거 기술도 익히면서 틈틈이 고철이랑, 폐품 매출 규모도 자세히 확인해 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걸 보니, 앞일이 깜깜한데요. 텃세가 장난 아니네.”

“그래 봤자, 어차피 뒤에서 나불대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이 있나. 대놓고 뺀찌 부릴 만큼 강단 있는 녀석은 없으니 염려 마라.”

실제로 철거 작업은 고만고만한 고물상들이 흔하게 하는 일이 아닌 만큼 생초보인 강태준으로서는 처음부터 몇 단계는 건너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텃세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철거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철거 작업은 해풍이 불어서인지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당시까지는 중장비가 상당히 귀한 시절이었기에 해머나 산소절단기를 사용한 수작업이 주를 이루는 중이었다. 당연히 최대한 빨리 잔해를 치우고 철근을 챙겨야 했지만. 처음 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마음먹은 대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참 빨리빨리 갑시다!”

트럭 기사가 짜증스럽다는 듯 경적을 울릴 때마다 이마에 땀이 솟는 강태준. 몸은 힘들고 노곤했지만, 죽어라 손을 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뽀얀 먼지로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음들이 귓가를 내리치는 통에 정신이 산란했다.

어마어마한 업무 강도였다.

새로 온 불청객에 빈정 상한 작업자들이 강태준을 제일 힘든 파트에 배정한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은 아무런 불평 없이 손을 놀렸다.

최소한 갑판 청소 때처럼 물싸대기를 맞거나 익사할 위험 따윈 없지 않나.

함께 온 춘삼이 역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묵묵하게 제 몫을 하며 힘을 보탰다.

똥지게까지 지며 작업에 쫓기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나자 고작 하루 반나절 만에 군화는 완전 재투성이, 장갑은 걸레가 되어 있었다. 기진맥진한 일행이 지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가자. 그때까지 야근 중이던 장원영이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생긴 건 완전 샌님이라 못 버틸 줄 알았더니 제법 하는군. 요령도 안 피우고 말이야.”

“그럴 거 같았으면 여기까지 안 왔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 입꼬리를 들어 올린 장원영이었다

“제법 깡다구가 있구먼. 앞으로 밥은 알아서 챙겨 먹으시게. 위에서 따로 주지 않으니까. 가끔 회식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정해진 출근 시간은 없습니까?”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근무가 원칙이지. 하지만 애초에 철거는 경쟁이니 뭐, 늦게 오면 본인만 손해 아니겠나? 더 일찍 오면 주워 먹을 게 많을 테니. 알아서 하게.”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강태준 일행은 샤워를 마친 즉시로 완전히 대자로 뻗었다.

피곤함에 몰려와 잠에 곯아떨어진 것.

다음 날 아침 기적처럼 눈이 떠진 강태준이 복만이를 깨웠다.

“일어나 임마.”

“형님…… 벌써요?”

“그래 출근이다.”

“아. 젠장 할…….”

천근만근 무거운 몸이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속으로 육두문자를 내뱉는 복만이었지만 먼저 일어선 춘삼이가 이불까지 개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다.

시장에서 새벽밥을 챙겨 먹고 아침 6시 전에 출근하고.

원래 노동이란 습관처럼 몸에 배기 전까지는 힘들 수밖에 없는 법.

더욱이 기존에 철거 일을 하던 철거 반원들은 자신의 밥그릇에 수저를 얹는 신입들에게 자비를 베풀 인심 따윈 전혀 없었다.

“아따, 느려 터져서는 언제 이거 다 옮길래, 일 그따위로밖에 못 하나?”

“젊은 놈이 힘이 그거밖에 없어? 칠칠치 못하긴.”

견제와 비난에 열불이 치솟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강태준은 묵묵히 그 모든 걸 감내했다.

일을 배우기 전까지는 싸워 봐야 손해니 일단 고개를 숙이기로 한 것.

하지만 작업 반장에게 일장 연설을 듣고 온 복만이는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툴툴거리기 일쑤였다.

“거참 더럽게 땍땍대네요. 저렇게 잔소리하면 입 안 아프나.”

“웃어. 임마. 웃으면 복이 온다지 않나. 게다가 틀린 소린 아니잖나.”

“지들도 일당 받고 온 주제에, 싸가지 없이 구니까 그렇죠.”

“더럽고 치사해도 어쩌냐. 일단은 배워야지. 배워서 남 주냐?”

둘이서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배춘삼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보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그래…… 어여 움직여. 오늘 할당량은 채워야지.”

날도 춥고 몸도 힘든 강행군이었다. 철거 작업이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 특히 공사를 수주한 미래건설 입장에서는 수익을 내려면 공기를 단축해 공사 속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철거는 시간과의 전쟁이 될 수 없었다.

“응? 저건?”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업을 계속하던 무렵, 강태준의 눈에 갑작스레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작업에 동원된 크레인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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