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고물상
해안가 가까이 거처를 옮긴 카발 수리소 공장은 몇 달 새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어느새 바꿔 끼웠는지 ‘카발 자동차 공업사’라는 문구가 위풍당당하게 보였다.
강태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를 맡던 직원이 아는 척을 했다.
“어, 태준이 아니여?”
“네. 연 주임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와따. 훤칠해졌구만. 여긴 우예 왔나.”
“사장님 좀 뵙고 인사드리려고요. 혹시 안에 계십니까?”
“좀만 기달리라우. 남포동 쪽 주문 일로 사람이 와서. 최 대표가 무지 좋아하겠네.”
때마침 지즐을 든 직원 하나가 안전장비도 없이 드럼통을 잘라내는 모습이 보였다. 가죽 장갑을 끼고 있긴 하지만 망치를 치는 폼이 어딘가 어설픈 모습이다. 불꽃이 튀기며 일에 열중하던 녀석이 땀을 훔치자, 그 모양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친절하게 다가가 충고했다.
“조심해야지. 너 신입이지?”
“어, 예. 근데 누구십니까?”
“여기 정비소에서 일했던 사람. 너 그렇게 작업하면 손 다친다.”
아까부터 용을 쓰고 있었지만, 별반 성과가 없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자, 손잡이 보고 정확히. 그리고 철판 자를 때 치즐을 비스듬히 눕혀서 쳐야지, 생짜로 망치를 치면 절단부가 매끄럽지 못하니까. 선임이 그런 말 안 해 주든?”
“아, 아니요. 아직은 제가 초짜라.”
“그럼 한번 줘 볼래?”
약간 망설이던 녀석이 자리를 양보하자 가죽 장갑을 낀 강태준이 철판에 대고 시범을 보였다.
“자, 이렇게 치즐을 약간 눕히고. 손목 스냅으로 자연스럽게. 어때. 따라 할 수 있겠어?”
“오, 확실히 힘이 덜 드네요.”
“그리고 여기 끝에 두꺼운 부분은 산소 용접기로 불어 달라 그래. 그게 품이 덜 드니까.”
경청 모드가 된 어린 정비공 견습생이 개인 교습을 받는 사이, 어느새 나타난 최대길 이사가 뒷짐을 진 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최 이사님 오셨습니까?”
“허허, 내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몰라.”
“간만에 보는데 어째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대표라니.”
“이쪽 방면은 내가 맡기로 했지. 창렬이 형님께서는 영도 쪽을 전담하고. 오기윤 공장장이 서면 쪽을 맡기로 했지.”
“그럼 이제 사장님이시군요.”
“사장이라니. 무슨. 그냥 감투만 씌운 거지.”
그 말이 싫지 않은지 입꼬리를 올리는 최 이사.
어깨를 토닥여 준 최 이사가 덕담을 건넸다.
“자네야말로 꽤 듬직해졌구먼. 근데 모친이 사는 외가에 간다더니 여긴 웬일이야? 가족들은 어쩌고?”
“같이 왔습니다. 이참에 부산에 눌러앉으려고요.”
“그래? 이거 반갑구먼. 가끔 이 녀석 좀 봐 주시게. 아직 배울 게 많아.”
“제가 뭘요. 이 친구도 아주 잘하던데요.”
“퍽이나 잘하겠다. 재범아 니 태준이 노하우 잘 배워라. 이렇게 어려 보여도 나름 여기 에이스였어.”
“아, 역시 그랬군요.”
존경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를 하는 그를 보고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참에 아예 눌러앉는다면 잘됐네. 마침 일손도 딸리는데 우리 회사로 다시 들어오는 거 어때?”
“저 말고도 능력자가 많지 않습니까.”
“에이, 기계를 자네만큼 아는 사람이 적으니 문제지. 마땅한 사람이 없어. 사실 승합차를 자체 제조해 보려고 하거든.”
“승합차를 말입니까?”
“그래. 전쟁도 끝났으니 계속 고물차 부속품만 조립해서 팔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엔진을 만들어야 진짜 차를 만드는 거지.”
허무맹랑하게 들릴 소리겠지만 강태준은 비웃지 않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카발이 역설계로 정말 엔진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굳이 그 고생길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던 강태준으로는 냉정하게 득실을 파악하는 데 바빴다.
‘어차피 엔진을 개발해 봐야 수제 차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어.’
카발의 문제점은 대다수 작업이 수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실제로 카발이 망하기 전까지 10년간 생산한 완제품 차량은 많아야 3,000대 정도에 불과했다. 버스 사업을 일찌감치 시작해 다각화의 틀을 마련하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수준이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면 도저히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도움을 구하러 와서 굳이 그런 생각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엔진 제작이라니. 야망이 크시군요.”
“이번에 이차동이라고 내연기관 전문가도 새로 영입했어. 자네가 도와주면 좀 더 빨라질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어떤가, 다시 우리 회사에 입사하는 건? 경력직 대우를 해 주지.”
“제안은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칼같이 자르는 걸 보니 서운한데. 설마 벌써 다른 곳에 스카웃 제의라도 받은 건가?”
“그럴 리가요. 복학도 해야 하고, 미리 생각해 둔 사업이 있어서요. 사실 그 때문에 왔습니다.”
“그래, 사업이라고? 그게 뭔데?”
강태준이 지나간 일을 약간 각색해서 풀어놓았다. 대충 도망갔던 채무자 중 하나를 찾아 돈을 돌려받았다는 식으로 둘러댄 것이다.
“이야, 인생이 그렇게 풀리네. 사람이 죽으리라는 법은 없구먼.”
“네. 운이 좋았죠. 이걸 어찌할까 하다가 트럭을 불하받아 운수업에 뛰어들어 보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외자청 쪽에 연락을 해 뒀습니다.”
“운수업이라, 나쁘지 않지. 그럼 강 기사도 곧 사장님 소리 듣는 건가?”
“사장은 사장인데 구멍가게 사장이죠. 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에이, 무슨 소릴. 요즘 같은 세상에 차 한 대만 있어도 어엿한 사업가지. 그럼 트럭은 언제쯤 불하되나?”
“몇 달은 더 걸릴 겁니다. 일단 서류는 구비해 놨지만, 별도의 심사가 남아서요.”
“몇 달씩이나? 오래 걸리는군. 그럼 그동안은 어쩌게?”
“여유도 있으니 고물상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서울에 가 보니 넝마주이들이 많이 돌아다니더군요. 트럭 사고 좀 남은 돈으로 폐품 야적할 창고를 하나 임대했습니다.”
“호오, 고물상까지? 아이디어 좋네.”
“예. 아무래도 운수업은 경기를 타는 사업이 아닙니까? 리스크를 줄이려면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것이 좋지요. 천진운송에서도 인견사 유통으로 꽤 재미를 보지 않았습니까. 구제 의류나 중고 물품을 받아 유통하면 꽤 괜찮을 것 같아서요.”
한국 운수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천진그룹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천진그룹은 해방 이후 강원도 삼척에서 카바이트를 사다 도매상에 넘긴 뒤 그 돈으로 인견사를 수입하는 방식을 써서 방직 공장에 유통시켰고, 그 덕분에 계절에 따라 자금을 원활하게 회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듯 운수업과 유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만큼 뭘 주력으로 팔 것인지도 생각해 둬야 한다. 그런 면에서 고물상은 재활용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다 다루는 만큼 운송업을 위한 보조로 꽤 궁합이 좋았다.
팔짱을 낀 최 이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몸은 고되긴 하겠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꽤 쏠쏠하지. 근데 그렇게 하면 사람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거야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 물량을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야 환영이지. 지금 그러잖아도 철이 부족해서 난리라서. 대신 정기적으로 납품을 하려면 물량이 일정해야 하네.”
“그럼 이사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려. 건투를 빌겠네.”
최 이사는 헛말을 하지 않는 사람인 만큼 첫 단추는 잘 끼었다. 카발 자동차로부터 확약을 받은 강태준은 곧바로 봉래동 일대 창고 단지를 수소문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싸개 매물로 나온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다. 공장을 처음 본 춘삼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이게 다 공장 부지라는 말입니까?”
“엄청 넓군요.”
“원래 고물상을 하려면 최소 500평은 기본이지. 어때 놀랐나?”
복만이도 혀를 내둘렀다.
“짠돌이라고 생각했는디 능력 좋네. 확실히…… 남은 돈이 없을 법 하구만.”
“널찍한 게 좋네요, 근데 직원들은 어쩌죠?”
“그러게요. 형님 직원 하나 뽑지 않고 이거 이렇게 막 열어도 되는 겁니까? 아직 마땅한 거래처도 없이 일부터 벌여 놓는 건 좀.”
“야적장으로 쓸 테니 문제없어. 일단 철거장부터 따라다니면서 일 배워야지.”
일단 이 시대에는 차량 자체가 전국 대수를 다 합쳐도 1만 대도 안 되던 시절인 만큼 용달차 한 대라도 귀중하다.
강태준이 찾은 캠프 하야리야는 부산진구 범전동 및 연지동에 걸쳐 있는 약 543,360m² 규모의 주한 미군의 군영이었다.
이곳은 부산항 제8 부두와 김해 국제공항, 제55 보급창을 관리하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고베 자본가 중심의 부산진 매축 주식회사가 매립을 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관계를 담당할 유솜(USOM) 들어오기 전이었지만 이미 부대 내에는 이미 수천여 채의 군인 숙소와 학교, 병원, PX, 식당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외곽 테두리 즉 담장을 살펴보니 철조망 형태로 설치된 담벼락이 선 가운데 미군 캠프를 경계하는 보초병들의 초소가 있다. 강태준이 차를 몰고 정문으로 가자 경계를 서던 병사가 막아섰다.
“정지, 무슨 사유로 오셨습니까?”
“박 여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여기 출입증입니다.”
강태준의 행색을 살핀 경비병이 전화기를 돌렸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녀석이 그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랍니다.”
하야리아 캠프 미군 부대는 부산에 주둔한 미군을 총괄하는 사령관들의 숙소이다. 부전동에서 양정으로 넘어가는 작은 산 언덕배기에 두 가구가 살 수 있도록 건축되어 있었다. 단층으로 붉은 기와를 얹은 외벽은 깨끗하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건물 앞에는 한 그루의 고목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처음 대령급 사령관이 보임했을 때는 사령관 혼자 관사를 다 썼지만, 지휘관이 중령급으로 하향되면서 항만부대 사령관과 합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본국에 처자를 두고 기러기 생활을 하는 사령관 덕분에 이곳의 안주인은 박씨 한 사람뿐.
강태준과 함께 들어간 복만이의 눈이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여기가 관사군요, 완전 별세계네.”
“궁전처럼 꾸미고 사는구먼.”
정원 앞 뜨락에서 가위를 든 사용인들이 조경 작업을 하고 있다. 군속이라고는 하지만 다들 세련된 옷에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에 미군 중령이라고 하면, 한국 삼성 장군과 맞먹는 지위다. 극동의 소국에 장교 따위야 한두 명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여기 이곳에 살 정도라면 실세 중의 실세인 것.
밖에서 사용인들을 관리하던 박원숙이 강태준을 보더니 반갑게 맞았다.
“박 여사님! 오랜만입니다.”
“이거 누구야. 강 기사 아니야?”
그간 잘 먹고 잘살았는지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올라 있는 박원숙은 혈색이 더욱 좋아 보였다. 호들갑을 떠는 것이 정말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수더분한 행동에 강태준도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강녕하셨습니까. 사모님?”
“나야 뭐 잘 지냈지. 부산에 돌아왔다며. 집은 구한 거야?”
복만이가 우와~ 하며 집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다.
프랑스식 샹들리에부터, 고급 목재로 만든 책장, 서재부터 응접실까지. 장인의 손길이 묻은 응접실엔 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