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3화 (23/361)

23화 수출 구상

오징어 수출이라.

특히 오징어 하면 쌀과 함께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한국의 주요 수출품으로 통하던 몸 아닌가.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어찌하면 뚫어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좋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보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장부부터 볼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대령하는 황 서방. 꽤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사전에 언급한 대로 장부에는 그간의 운행 기록과 항해 일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간 승선 인원이 꽤 늘었군요. 대부분의 항차가 만원이라니.”

“예. 시간표에 맞춰서 정기 운행하고 있다 보니 입소문을 탄 모양입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딱히 관리상의 문제는 없었나요?”

“선체 부분에 비틀림이 있어서, 파트를 교체한 걸 빼면 대체로 양호합니다.”

강태준이 보기에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운영이다.

소식을 들었는지 어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버선발로 뛰어나온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몇 주 안에 온다더니, 출장이 길었구나. 얼굴이 많이 상했어.”

“그럴 리가요. 별일 없었습니다.”

“편지라도 한 장 쓰지 그랬느냐. 무던한 녀석.”

“이렇게 오래 머무르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젠 네가 가장 아니냐. 바깥일 하는 양반에 쓸데없이 신경 쓰게 할 이유야 없지. 다만 몸은 좀 챙기고 살아야지. 축난 게 어디 가지 않아.”

“유념하겠습니다. 그보다 소개해 드릴 사람들이 좀 있어요.”

“소개?”

“안녕하세요. 여사님.”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춘삼이와 동생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어머니였다.

“이 애들은?”

“인연이 생겨서 제가 거두기로 한 녀석들입니다.”

안방으로 들어간 강태준이 어른들을 앞에 두고 그간 일어난 일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는 골동품을 판매한 대목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어, 세상에 그런 일이. 9천 불 말이냐?”

“네, 어머니 저도 깜짝 놀랐지 뭡니까. 사실은 값을 더 받을 수 있는데 혹시 몰라서 빨리 팔아 치운 겁니다.”

“암, 잘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귀물은 빨리 손을 떠나는 게 낫지. 그보다 그런 귀물이 네 손에 들어오다니, 정말 하늘이 도우셨구나. 조상님이 우리 집안을 망하게 두지 않으시려나 보다.”

그러나 외삼촌은 감격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흠. 그런데 왈패들이라고 했느냐? 그리 험악한 놈들이랑 척을 졌다니 좀 그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런 불한당 놈들이 나중에 출소하면 어떻게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 일 아니냐.”

“그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빨갱이로 찍혀 붙잡혀 갔으니 그렇게 쉽게 나오지 못할 겁니다. 나와도 반병신이 될 텐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이제 어쩔 요량이냐. 이 동네서 사업을 추진하기엔 덩치가 커진 것 같은데. 무엇보다 트럭 운송이나 철물 관련 일을 하려면 대도시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말인데, 근거지를 아무래도 부산으로 옮길까 합니다.”

“부산으로 말이냐?”

“예. 무안에 있어 봐야 더 사업을 확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사업을 하려면 더 큰물에서 놀아야죠.”

그 말에 어머니가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목포도 충분히 큰 도시 아니니. 굳이 먼 곳까지 나갈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목포도 큰 도시긴 하지만 부산만큼은 아니죠. 게다가 앞으로 대일 교역을 하려면 부산 쪽에 근거를 두는 것이 유리합니다.”

당시 목포는 국내 6대 도시에 들어갈 만큼 번성한 곳이었지만 강태준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에 전라도는 근거지로 삼기에는 선천적인 한계가 있을뿐더러, 국토 개발 계획에서도 여러모로 소외당하는 지역 아닌가.

그에 비하면 경남은 아직 발전 가능성 면에서 훨씬 유리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미국 원조 물자와 군수기지 역할을 통해 발전한 부산항은 앞으로도 일선의 물류 산업 도시로 당분간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더욱이 수산대에 복학하려면 부산에서 근거를 두는 편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학업을 잇기에도 좋고요.”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복만이 니도 같은 생각이냐.”

“암요.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소. 끝장을 봐야지요.”

그러자 외삼촌이 걱정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그럼 무안에서 운행하는 정기선은 어찌하려고? 그쪽도 처분할 생각이냐?”

“이제 자리를 잡아 가는데 포기하는 건 아깝지요. 그건 황 서방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혹시 외삼촌께서 관리 좀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 같은 늙은이가 뭘 안다고.”

“일지 확인이랑 운항 점검만 정기적으로 해 주시면 됩니다. 장부가 맞는지만 확인해 주세요. 급여는 면장 급여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농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눈이 돌아갈 조건이었지만 하지만 외삼촌은 여전히 신중했다.

“흠…… 생각을 해 봐야겠구나. 농사에 지장이 가면 좀…….”

“아부지도 참, 괜히 튕겼다 후회하지 말고 형이 준다고 할 때 덥썩 받아 두십쇼. 걍 부업 하는 셈 치고 도와주면 되잖습니까?”

“복만이 이 녀석이.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복만이의 투정 어린 성화에 도끼눈을 뜨는 외숙모.

움찔거리는 아들의 행동에 외삼촌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겠다. 이놈아. 어린애처럼 보채기는 뭐 그 정도야 나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니. 대신 복만이 이 녀석을 잘 부탁하마.”

“감사합니다. 외삼촌. 그럼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가능하면 부산으로 모시고 싶지만 원치 않으신다면 재고해 보려고요.”

그 말에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뜻한 바가 있을 텐데, 어미로서 자식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구나. 네가 가장이니, 네 뜻대로 하자구나, 돌봐야 할 식솔들이 늘었으니, 집안 대소사를 살필 사람도 필요하겠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럼 대략 결정 난 거 같고. 그럼 조만간 서둘러야겠구나.”

“제가 먼저 가서 정리할 일이 있으니, 어머니께선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정리가 끝나면 따로 모시겠습니다.”

“알았다. 그편이 네게 편하다면야 네 말대로 하마.”

몇 주 후 준비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세간 자체가 얼마 안 되는 데다 건장한 남자들이 많아

황 서방과 새로 뽑은 직원들이 트럭에 짐 싣는 것을 도왔다.

“아니 진짜로 가시는 겁니까?”

“가야죠. 뭐 아버지께서 뿌린 씨앗을 지금 거두리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이 아직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강태준이 채무자 중 하나가 찾아와 빚을 갚았다고 대충 둘러대자 황 서방은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아쉬운 듯한 시선을 보냈다.

“좋은 일로 가시는 거지만 좀 섭섭합니다. 저 혼자 일을 어찌하라고.”

“두 달간 훌륭히 잘하셨으니 앞으로도 잘하실 겁니다. 외삼촌과 잘 상의해서 운영하시면, 앞으로도 별 탈 없을 겁니다.”

“에이, 형님도 참, 내심 좋으면서 아닌 척하지 마시고. 계속 그러면 자리 뺏어 갑니다?”

김복만의 익살스러운 말투에 황 서방이 어깨를 으쓱했다.

“크크 들켰군요. 알았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고 내지 말고 안전 운행하십쇼. 황 선장님.”

무안을 떠난 강태준은 부산으로 향했다. 새벽 항구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산 중턱부터 굴 껍데기처럼 계단 위에 판자촌들이 산자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한때 그가 머물기도 했던 영도 근처 초량동의 이바구길을 뒤로하고 강태준 일행은 동래로 갔다.

동래구 온천동은 일본 강점기부터 내려온 부촌으로 적산가옥들이 즐비한 지역이었다.

대문을 갖춘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가운데, 일본의 무가를 닮은 쇼인즈쿠리가 나타났다.

지붕이 뾰족하고 처마가 긴 이 층 식 구조 빈틈없이 짜인 창호에 동판을 붙여 고급스럽게 치장한 고택이 웅장하다. 시멘트 담벼락에 붉은 벽돌담들이 고풍스러워 보였다.

“와, 이 동네는 동네가 으리으리 하군요.”

“예전부터 부촌이었다는군. 왜정 때 사업가들이 주로 살던 곳이라더군.”

구부러진 거리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큼직한 양옥 한 채가 서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분재가 놓인 화원이 정성스럽게 꾸며진 것이 격식 있어 보인다.

“설마 이런 곳에 내가 살게 된다니.”

“진짜 좋네요.”

아이들 역시 눈앞에 삐까뻔쩍하게 2층 양옥집에 무척이나 맘에 드는 듯 감탄을 연발한다.

하지만 그건 흥분도 잠시 강태준이 말했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바로 저기 건너편 말이야.”

“네?”

강태준이 가리킨 곳엔 전혀 다른 한옥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듯 홀로 외따로 떨어진 건물은 을씨년스럽게 그지없다.

지붕은 하중에 내려앉았고, 기와 일부도 깨져 있어 더욱 볼품없어 보인다고 할까.

그나마 다행인 건 서까래는 멀쩡하다는 것.

물이 고인 장독대 옆엔 주인 없는 개집 하나가 있고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근처의 주택이 족보 있는 양반댁이라면 여긴 머슴 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아까까지만 해도 들떴던 아이들도, 복만이도 모두 안색이 좋지 않다. 하지만 강태준은 떳떳했다.

“원래는 별채였는데 앞에 주택을 신축하면서 창고 대신으로 남겨 둔 거야. 주인은 서울 가서 안 돌아올 생각이고. 덕분에 아주 싸게 샀지. 땅까지 포함해서 고작 삼만육천 환밖에 안 들었어.”

“아니, 이런 쓰레기 같은 폐가를 삼만육천 환이나 줬다는 말입니까?”

“임마. 이 동네가 얼마나 비싼 줄 아냐. 이건 거저야. 방 다섯 개짜리 주택이 이 가격이라니 엄청난 거지.”

“참나. 형님도 참. 치매가 벌써 오신 것도 아니고. 눈탱이 제대로 맞았구려.”

“두고 봐라. 내 말이 틀리나 맞나.”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1953년에만 무려 52프로가 넘게 상승했고 전시인 51년에는 390프로가 넘을 만큼 살인적이었다. 매해 평균 20프로가 넘는 살인적인 물가에 58년이 되면 봉천의 고작 두 칸짜리 방을 빌리는데 월세 2천 환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강태준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

내심 잘 투자했다 자화자찬하는 강태준이었지만 기대에 부풀었던 아이들로서는 내심 실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춘삼이의 반응은 오히려 호의적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요. 청소하면 제법 그럴듯하겠네요.”

“그러게. 우리 집이 생긴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맞아! 우리 집!”.

곧 정신을 차린 아이들이 씩씩하게 집 안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돌아보는 춘삼이가 몹시 불퉁해진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거…… 좋단다. 허…… 벌써 태세전환인가?”

“얌마, 너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해?”

“알았어요. 갑니다 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듯 먼지가 쌓여 있는 방과 마루. 잠시 후, 부엌에 들어갔다 나온 복만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물독에 물이 말라 누런 거미줄이 쳐져서 도저히 저장하긴 어렵겠네요. 아, 형님. 이건 좀 너무하잖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집수리 업자 불렀으니 좀 참아. 당분간 목욕이야 대중목욕탕 가서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럼 손은 어디서 씻고요. 게다가 밥은 안 합니까?”

“아이구 이 화상아. 앞마당에 우물은 왜 있는데. 온수야 물 데워서 쓰면 되고, 낼부터 집수리할 테니 알아서 고쳐서 써.”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지. 너, 서울서 건물 수리해 봤잖아. 너무 구시렁대지 말라고.”

강태준의 뻔뻔스런 말에 복만이는 기막혀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돈 없는 것도 아니고 이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투정 그만 부려라. 아낄 때는 아껴야지. 트럭 불하받을 자금하고 공장 부지 살 자금 빼면 여윳돈이 없어. 추후에 운영비는 필요할 게 아니냐. 이 동네 딱지도 3구 좌 사 놨으니 나중에 추가로 여유 생기면 좋은 기와집으로 지어 주마.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 전까진 참아.”

“아~ 예에~ 형님이 까라면 까야지. 저 같은 고용인 따위가 뭔 투정을 더 부리겠습니까.”

구시렁대면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작업 준비부터 시작하는 복만이. 과연 적응력 하나는 갑이랄까. 안방에 짐 덩이를 내려놓은 춘삼이와 아이들도 팔목을 걷어붙이고, 집 정리에 나섰다.

짐을 내려놓은 채로 쓸고, 닦고. 폐가 같던 집구석도 한나절 청소하였더니 제법 그럴듯하다. 땀을 훔친 춘삼이가 검게 변한 걸레를 내려놓고는 숨을 골랐다.

“그래도 치워 보니 꽤 널찍하군요.”

“일하고 나니 배고프네. 형님. 밥 안 먹습니까?”

“돈 줄 테니 애들 데리고 근처 청요릿집이라도 가서 짜장면이나 사 먹어. 나는 따로 가 볼 데가 있으니까.”

“밥도 안 먹고 어디 가십니까?”

“일단 카발 자동차 쪽으로 가 보려고. 부산까지 왔는데 안 뵐 수야 있나. 일단 인사부터 드려야지.”

사업상 생각해 둔 구상 덕에 마음이 급한 강태준이다.

강태준은 무안에서 가져온 마른오징어 몇 상자를 들고 국제시장 쪽으로 갔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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