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경양식당 개점
“네 소라고요? 명동 한복판에 소는 좀 촌스럽지 않겠습니까?”
백종섭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소 그림이라면 이골이 날 만큼 자주 그렸지만, 벽화로 그리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던 것. 하지만 강태준은 달랐다.
“그래도 황소는 한국 하면 떠오르는 동물일 만큼 민족을 대표하는 동물 아니겠습니까?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면 방문하는 손님들도 힘이 나지 않을까요?”
“흐음. 그런 의미가,”
“게다가 저번 중개업자님께서도 백 화백께서 소 그림을 아주 칭찬하시더군요.”
백종섭을 대표하는 그림이자 트레이드마크라면 아무래도 소 그림이 아니겠는가.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눈을 비빈 강태준이 밖으로 나오자, 주인아주머니가 아는 척을 했다.
“이제 깨셨수까? 피곤했나 보구먼.”
“네. 혹시 제 동생은 어디 갔습니까?”
“명동 쪽에 갔다네. 피곤할 테니 형 깨우지 말라 신신당부하더군. 고등어자반 하나 구웠네. 밥술 뜨고 가시게.”
고춧가루 양념에 자박하게 무친 가지볶음. 그리고 구수한 된장찌개가 식욕을 자극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강태준이 슬슬 길거리로 나오자 벌써 대낮이다.
자전거를 탄 행인이 오가는 명동 일대를 돌며 바람을 쐬던 강태준이 작업장에 돌아가 보니, 잡부들이 일을 하다 말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이야. 대학 물 먹은 사람은 역시 다르구먼. 이게 작품인가?”
“와, 대단하구마. 김홍도도 울고 가겠어.”
뭘 보고 그러는 거지? 웅성거리는 모습이 조금 낯설다.
인파를 뚫고 들어가니 강태준은 진척된 작화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금방이라도 벽을 뚫고 나올 듯한 소 한 마리가 뿔을 곧추세운 채 투레질을 하고 있다. 공격할 태세를 취한 황소의 모습은 그야말로 군계일학.
정면을 겨냥한 뿔이 우람하게 솟아 있고 거친 숨결이 쏟아진다.
회백색 선과 검은색 선이 교차하는 찰나, 울퉁불퉁 거칠게 표현한 질감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에 강태준은 등줄기가 쭈뼛하며 전율을 느꼈다.
투우사를 상대하듯 콧김을 뿜는 황소의 모습에 매료되어 갔던 것.
숨 쉴 사이도 없이 놀리는 붓으로 배경이 완성되어 간다. 마치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처럼 엄숙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화가가 손을 댄 것은 눈이었다. 그림을 주시하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림에 조예라고는 없는 잡부들의 눈에도 예술은 사람의 가슴을 격동시키는 법.
그들도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지금이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역사가 탄생하는 장면을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
완성된 소의 눈동자에 사람들의 탄식이 어렸다. 애환을 담고 있는 눈망울에 슬픔과 기쁨, 분노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마지막 터치를 마치는 순간 붓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혼을 쏟아 냈는지 10년쯤 늙어 보이는 백종섭이 지친 듯이 붓을 떨구었다.
그 큰 벽화를 고작 하룻밤 사이에 완성시킨 것이다.
작품을 끝내고 돌아보는 시선은 시험 발표를 앞에 둔 수험생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사장님이 보시기엔 어떠십니까?”
“최고입니다. 더 붙일 수식어가 없군요.”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이거 작품전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 이런 재주를 썩히고 있었다니. 사람들이 눈이 삐었군요.”
“맞습니다. 사장님.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보기에도 대단하더군요. 이거 보니 예술이란 게 뭔지 대충 알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침 튀기며 칭찬을 거듭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에 백종섭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속으로 환쟁이 따위가 뭘 대단하랴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코앞에서 작품이 완성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어느새 평가가 달라져 있었다.
“다행이군요. 정말로 다행…….”
말을 잇던 화가의 몸이 스르르 기울어졌다. 실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푹 쓰러지는 백종섭에 깜짝 놀란 강태준이 엉겁결에 그를 받았다. 한바탕 난리도 잠시 서둘러 상태를 확인한 정 마담이 맥을 짚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네요. 피곤해서 잠드셨을 뿐이에요.”
“어휴, 선생님도 참, 사람 놀라게 하는 면이 있군요.”
잠을 잔다는 말에 다들 안도감이 섞인 얼굴로 백종섭을 바라보았다. 쌔근쌔근 잠든 모습이 마치 그림에서 나오는 어린아이같이 보였다.
벽화 작업이 끝난 후 깨끗이 단장한 다방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부수고 남은 벽돌은 돌담으로 만들었고 테라스처럼 넓게 꾸민 외부에 각종 나무를 심었다. 의자와 테이블을 갖다 놓고 주차장을 표시하는 청백색 표지판까지 갖다 놓자 꽤 이국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복만이는 뭔가 맘에 들지 않는지 볼멘소리를 했다.
“형님 차도 몇 대 없는데 주차장까지 둡니까? 이건 공간 낭비 아닌가요?”
“임마, 다 나중을 염두에 둔 거야. 지금은 몇 대 없어도 나중에 늘겠지.”
차량 숫자가 인구 10만 명당 5대 정도의 비율밖에 되지 않는 지금으로서는 어이없는 짓일지 모르지만. 향후 확장을 생각하면 이해 가는 부분. 게다가 주차장은 관리도 편한 데다 손님을 접대한다는 과시 효과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경계를 확실히 해 둘 경우 나중에 옆에서 은근슬쩍 확장을 틈타 부지를 넓히는 꼼수를 방지할 수 있었다. 강태준이 정 마담에게 말했다.
“손님으로 온 사람은 주차료 받지 말고, 나머지는 시간당으로 1환씩 계산하세요. 혹여 얌체같이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예.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백종섭의 투혼에 자극을 받았는지 인부들도 밤샘 공사까지 해 가며 끝냈다. 강태준이 작업을 마친 함석공과 미장공들을 불러 일당 및 야근비를 추가로 정산해 주었다.
“수고했어요. 여기 수고비입니다.”
“아니, 이렇게 많이 주시다니,”
작업비를 확인한 백종섭은 크게 놀라며 부담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봉투 안에는 무려 3,000환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을 미래 가치로 환산한다면 거저에 불과한 만큼 강태준에게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더 드리고 싶지만, 저도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서 말이죠.”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돈이면 최소 육 개월은 걱정 없이 버틸 수 있겠습니다.”
백종섭의 얼굴에 생기가 돌자 강태준은 마음이 동했다.
“취직 자리는 아직이죠?”
“예. 아직은.”
“혹시 머물 곳이 없으면 여기 건물 관리를 맡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관리 말입니까?”
“여기서 건물 관리원 하시면서 그림도 그리시고, 바쁠 때 가끔 회계 업무 도우면 좋을 거 같습니다. 정 마담 혼자 이 넓은 공간을 관리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렵잖습니까. 때로는 남자 손이 필요한 부분도 있을 테니까요.”
대졸 출신이라지만 마땅히 취직할 자리가 없던 백종섭에게는 고마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에 얼굴이 환해진 백종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너무 염치가 없는 거 같은데…… 제가 정말 그래도 될까요?”
“하하, 걱정 마십시오. 대놓고 맨밥만 먹을 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관리 일이란 건 은근히 손이 갈 겁니다. 별거 아닌 일이라 경시하시다간 큰코다칠 겁니다.”
“그래요. 긴장하셔야 할 거예요. 제가 아주 많이 부려먹을 테니 말이에요.”
정 마담이 짓궂은 눈으로 윙크했다. 그게 배려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백종섭이 고마운 듯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울에서의 일은 이렇게 대략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명동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강태준이 출발할 즈음, 여인숙 앞에 옹기종기 도착한 아이들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춘삼이와 그 동생들이었다. 그간 제대로 못 먹었는지 키는 작고 행색은 남루했지만, 외관에 신경을 쓴 듯 모두 깔끔한 외양에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제 몸보다 큰 짐 덩이를 멘 배춘삼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간만에 목욕탕에 다녀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인사해라. 우리 사장님이셔.”
“안녕하세요. 최덕배입니다. 이 녀석은 배춘식입니다. 이제 5살입니다.”
덕배라고 부른 아이가 인사를 하자 좀 더 작은 아이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성이 다른 것을 보니 설마 배다른 형제인가?
쭈뼛거리며 인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은근히 미소를 짓는 복만이. 강태준이 물었다.
“애들까지 데려오다니, 좋아. 그럼 결심은 선 거냐?”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가자.”
강태준의 말이 끝나자 형제 두 명의 얼굴이 밝아졌다. 차량에 올라타자 트럭은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있게 움직였다.
다시 도착한 무안에서는 밤새 잡아 온 오징어들을 널고 있는 아낙네들이 보이자 조용히 있던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 바다야!”
“사장님, 여기가 무안인가요?”
“그래. 니들이 같이 머물 장소지.”
축으로 엮은 오징어들이 해풍에 꼬들꼬들 말려지는 모습이 무척 정겹다고나 할까. 저 멀리 통통배가 물결을 가르며 달리고…… 제법 튼튼하게 생긴 배 한 척이 항구에 정박 중. 강태준이 손을 흔들자, 갑판 위에 있던 사람 역시 반가운 듯 마주 손을 흔들었다.
“사장님!!”
그간 정기 운행을 담당했던 황 서방이었다. 턱수염이 거뭇하게 오른 황 서방은 햇볕을 오래 쫴서인지 얼굴이 까맣게 타 있었다.
“아이구, 사장님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에휴,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습니까. 딱히 특기할 일은 없었습니다.”
강태준의 배도 예외는 아닌지 뒤편에는 한 무더기 말린 오징어가 쌓여 있었다.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부두 일을 하는 인부들.
그들을 슬쩍 곁눈질하며 강태준이 물었다.
“오징어가 제철인가 보군요.”
“요사이 근해 수온이 따뜻해서 그런지, 오징어가 풍년입니다.”
“그렇습니까? 홍어잡이는 신통치 않다 들었는데. 그래도 다행이네요.”
“예. 어민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죠. 어디 한번 맛보시겠습니까?”
주섬주섬 봉지 하나를 꺼낸 황 서방이 갓 말린 오징어 다리를 내밀었다. 다리를 씹어 보자 식감이 쫄깃한 것이 아주 그만이었다.
“이거 별미인데요.”
“구워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먼 길 다니는 사람들은 오가면서 입 심심할 때 달래기 그만이죠. 근데 요새는 물량이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그게 또 문제긴 합니다.”
“풍년인데 좋은 거 아닙니까. 그게 왜 문젭니까?”
김복만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자 황 서방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물량이 너무 풀리면 상자당 위판금 가격이 내려가거든요. 출하량이 너무 많으니 어디 소비할 곳이 있어야죠. 어업 조합에서 어떻게든 가격을 통제하고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지요.”
“아, 그러니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목포항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버겁지요.”
“흠. 그러면 딴 데 팔아야겠군요. 서울이라던지 대구라던지.”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생물 상태로는 운송해서 팔기 힘들고, 말린 오징어는 단가가 쌉니다. 최소한 인건비랑 운송비는 건져야 하는데 팔고 나면 남는 게 없지 말입니다.”
중개인들에게 여기저기 떼이고 나면 실제 수고에 비해 팔고 남는 돈은 적다.
게다가 공급이 많이 풀린 만큼 단가 후려치기도 비일비재한 상황.
하지만 어민들로서는 물류비가 비싼 만큼 직거래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강태준의 뇌리에 대안이 떠올랐다.
‘가만 한국에서 수요가 없다면 일본에 수출하면 되지 않나?’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