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천재 화가의 화상
그건 어린아이 두 명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서로 감싸 안은 두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서로의 온기를 잊지 않으려는 아이는 헤어지기 싫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오, 특이하네요. 어떻게 그린 겁니까?”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힌 은박을 송곳으로 선을 긋고 그 위에 색깔을 칠한 다음 헝겊으로 문지르면 됩니다. 헝겊으로 닦아 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 자국이 남게 되거든요.”
“과연 입체감이 있네요.”
깊게 팬 선으로 이뤄진 드로잉 기법이 범상치 않다.
아까 이름이 종섭이라고 했었나, 강태준이 떠보듯 물었다.
“그보다 통성명을 안 했군요. 저는 강태준입니다. 혹시 성함이?”
“아, 백종섭이라고 합니다.”
미술의 최고봉 중의 하나이자, 고난에 스러져간 비운의 예술가. 그의 대표작인 '소'는 한때 김대근의 빨래터를 누르고 오랜 기간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역작이 아닌가.
‘설마 이 사람이?’
쌍꺼풀 없이 밋밋한 눈매에 갸름한 턱, 홀쭉한 뺨까지. 피골이 상접해 있을 뿐. 과연 모 배우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떨림을 추스른 강태준이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일본에서 수학하셨습니까?”
“어, 어떻게?”
“그림체가 이국적이어서요. 이런 화풍은 처음 보거든요.”
“예. 그림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배웠습니다.”
“그럼 여기 은지화에 그린 사람은 아내와 아들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가족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다들 도쿄에 있습니다. 못난 아비 때문에 올 사정이 못 되어서…….”
옆에서 찌르듯 물꼬를 틔우자 울먹이던 백종섭이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부산에서 막노동하던 일부터 일본으로 갔다 돌아온 일. 전선 구리를 훔친 껌팔이 소년을 때리는 헌병을 말리다가 헌병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생사를 오고 간 일, 학교에 취직한 직후 폭격을 맞아 유야무야된 일 등등.
굴곡진 인생사에 감정이 복받쳐 오른 백종섭이 흐느끼자, 같이 눈물샘이 터진 복만이도 옆에서 함께 훌쩍거렸다.
“흑흑, 그렇게 슬픈 일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런 꼴을 보이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중개업자가 이때다 싶어 다시 끼어들었다.
“사실 이런 재능을 가진 분이 썩는 게 안타까워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사정상 군식구를 오래 둘 수는 없는 입장이라. 혹 괜찮은 독지가가 있으신지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중개업자 역시 길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그가 그린 그림에 반해 데려왔다고 했다.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그림에 백종섭이 어떻게든 작품 활동을 계속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복만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같은 시국에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기는 쉬운 환경이 아니죠.”
“맞습니다. 그래도 돈을 벌어서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요새는 어디 취직하기도 요원한 일이니.”
말투에서부터 짙은 회한이 느껴지는 것이 아쉬움이 역력하다. 그 말에 강태준은 좋은 생각이 들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으시다면 저희 건물에 벽화를 그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벽화요? 제가?”
“예. 제가 사실 건물 하나를 매입했는데, 외벽이 불에 완전히 그슬려서요. 어차피 페인트칠도 해야 할 겸, 어찌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참 좋은 기회 아닙니까?”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맞장구를 치는 중개업자.
눈만 끔뻑끔뻑하던 백종섭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 저 같은 사람한테 그런 중임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허허, 아까 그 은지화도 벽화 밑그림으로 준비한 물건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백 화백님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 주세요. 설마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야 무조건 하고 싶습니다. 다만 부끄럽게도 제가 마땅한 도구가 없는지라.”
“그건 걱정 마십시오. 유성 도료랑 붓, 팔레트 같은 재료들은 이쪽에서 전적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백종섭이 빠르게 덧붙였다.
“아, 제소 준비도 가능하겠습니까? 맨 벽에 벽화를 그리면 지저분해 보여서…… 도색이 잘 올라가지 않거든요.”
“그건 걱정 마십쇼. 말만 하세요. 말씀하시는 대로 대령하지요.”
다음날, 강태준은 인력 사무소에서 구한 인부들과 함께 잔해를 치웠다. 매일 아침 이슬이 맺히기 전부터, 주변 청소를 시작한 것이다.
“일단 밑그림 그리기 전에 밑 작업부터 시작하죠.”
작업 시작 전, 지저분해진 벽을 깨끗이 닦은 다음, 고르지 못한 표면을 퍼티로 보강해 준다. 일단 붓 자국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물과 제소 비중을 4대6 정도의 비율로 희석해 묽게 발라 주는 작업이었다.
갈라진 틈이 메꿔져 바탕이 깨끗해지자 백종섭은 미리 준비한 도안을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을 등 뒤에서 지켜보던 강태준이 한마디 했다.
“이야, 이렇게 벽화로 보니 느낌이 다르구먼요.”
“아 벌써 오셨습니까?”
“여기 준비한 도료들이 도착해서 말이죠.”
작업을 계속하던 백종섭은 강태준이 준비한 물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형 트럭째로 가져온 물건에는 팔레트와 붓, 페인트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오, 이건?”
“아크릴 페인트입니다. 유화 물감으로 그리면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혹 종종 써 보신 적은 있지요?”
“물론입니다.”
아크릴 페인트는 첫 등장에는 인기가 저조한 물건이었지만 피카소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에게 사용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빨리 건조가 되며 마르면 단단한 피막을 형성해 반영구적인 데다. 농도를 조절해 쓸 수 있다는 것이 상당한 강점이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채화에 필요한 도구들도 준비했습니다. 작품이 좋아지려면 좋은 장비도 필수 요소죠. 표현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의욕이 솟는군요.”
백종섭의 눈이 흥분으로 번뜩였다. 아크릴 물감을 베이스로 하면 수채화에서는 나올 수 없는 다양한 기법을 구사할 수 있다. 가난과 재정 문제로 제대로 된 실력을 펼치지 못했던 그로서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백종섭이 벽화에 열중하는 사이 강태준은 추가로 주방을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고용인으로 영입할 정 마담이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다방도 괜찮지만, 간단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경양식당 같은.”
“그게 통하겠습니까. 근처에 요리 잘하는 집이야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장사를 하려면 커피나 차만 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끼워서 팔아야죠. 간단한 요기할 빵을 굽거나, 경양식 정도는 만들 수 있으면 어떨까요. 적어도 돈가스나 함박 스테이크 정도는 제공할 수 있어야지요.”
음식점을 운영해 본 정 마담은 솜씨에 꽤 자신 있어 했다.
부산에 있을 때 쏠쏠하게 먹거리 판매로 재미 봤던 경험이 있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리용 철판을 파는 곳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정 마담이 원하는 수준의 주방을 구현하려면 함석공은 물론이고 전기공과 목수를 따로 써야 했다.
“그러려면 추가 자금이 들 텐데요. 어느 정도까지 필요합니까?”
“그렇게 본격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화덕 하나 정도 조리가 가능한 공간이면 됩니다. 장사를 제대로 하려면 차별화가 필요하니까요.”
생각보다 큰 공사가 될 법하지만, 예산 범위 내. 강태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해 보죠. 어차피 고칠 거 제대로 설비를 제대로 만드는 게 맞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사장님.”
다방 운영보다는 땅값 상승에 관심이 많은 강태준이었지만 현상 유지보다야 수익이 나는 편이 좋지 않은가. 결국 근처에서 이름난 목수, 미장공, 함석공을 불러 전면 인테리어 교체 작업에 들어갔다.
강태준은 틈틈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공사가 진행되는 상황은 어떤지 확인했다.
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한 사람들의 모습에 복만이가 불만을 표했다.
“이거 무늬만 보수 공사지 완전히 전면 개조 수준인데? 이 정도면 차라리 새로 짓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하하. 그게 뜯어 보니 벽면이 다 썩어서, 교체할 부분이 생각보다 많더이다. 그래도 골조 자체는 아주 튼튼합니다요.”
“어이 복만이 니는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자 음료수 좀 들고 하십쇼.”
차갑게 얼린 콜라를 나눠 주자 모두 반색했다. 강태준이 미군 부대에서 공수해 온 물건이었다. 뽕 하는 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청량함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목수들이었다.
“크으. 감사합니다.”
“추가로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벽체 교체랑 창고 설치 공사는 대략 2주일이면 완료할 것 같습니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요?”
“벽지랑 전등 공사까지 포함하면 대략 1달 정도 소요될 듯합니다.”
“흠 그건 좀 늦는데요 가능하면 개장을 좀 빨리하고 싶은데. 근처 백화점에서 세일 기간이 시작이니 다음 달 초까지는 서둘러 주십시오.”
“일정을 맞추려면 철야 없인 힘듭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좀…….”
말끝을 흐리는 것이 자신 없어 하는 모습에 강태준이 추가 제의를 했다.
“좋습니다. 일주일만 앞당겨 주시면 수당을 2할 더 얹어 드리죠.”
“2할 진심입니까?”
“2주를 앞당겨 주신다면 1할을 더 추가하죠.”
“허허. 말씀대로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다만 장담은 못 드립니다.”
결국 강태준의 꼬임에 넘어간 인부들은 어떻게든 일정을 맞춰 보겠다고 했다. 그 사이 외벽에 그려진 벽화는 제법 그 모양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작업장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 혼자 그리는 건데 벽화 진행이 아주 빠르군요.”
“그러게요. 저거 아주 독한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그림만 그립니다요. 예술가란 다 저런 건지 참.”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목수의 말대로 백종섭은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간 창작활동을 하지 못했던 설움을 쏟아 내기라도 하듯 더없이 열정적인 모습.
날이 더워지면서 시멘트 건물에서 후텁지근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그림에 미친 백종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태준이 장국밥 하나를 받아 들고 그에게 다가가 수저를 내밀었다.
“백 화백님, 잠시 쉬면서 뭐라도 드시고 하십시오.”
“두고 가시죠. 도료가 마르기 전에 추가 작업을 해야 해서요.”
“어제부터 밥은 한 술도 안 뜨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이 먹으면서 해야지. 이러면 제가 완전 악덕 업주 같지 않습니까?”
강태준의 부탁에 잠시 작업을 멈춘 백종섭이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장국밥을 한술 뜬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이거 맛있군요.”
“한일관에서 부탁해서 받아 왔죠. 근데 아까부터 뭐 막히는 게 있으십니까?”
“간판으로 그릴 그림은 뭐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거나 그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뭔가 쌈빡한 게 있을까 생각하는 중인데, 명동에 맞는 이미지가 영 안 떠오르는군요.”
과연 다른 곳은 진척이 상당한데 벽면 한가운데만 완전히 공백이었다.
텅 빈 벽면을 바라보던 강태준이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럼 소 그림은 어떻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