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0화 (20/361)

20화 명동 시장

얼떨떨해진 눈으로 강태준을 보는 춘삼이.

“제가요?”

“그래, 듣자 하니 이 근방에서 네 평판이 아주 좋더구나. 입이 꽤 무겁다지? 글도 알고 머리도 좀 굴리는 줄 알아서 말이다.”

“…….”

망설임이 역력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신중하게 답이 없다.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혹시 니 동생들 때문에 그러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는 녀석의 말에 강태준이 미소를 띠었다.

“사람 쓸 때 뒷조사도 안 할 만큼 무르지 않아. 다리가 불편한 동생이 있다면서. 그 녀석 땜에 학교도 그만두고 돈 버는 거라던데. 그 정도로는 뒷바라지가 어렵지 않겠니. 다른 건 몰라도 잠자리랑 삼시 세끼는 제대로 줄 수 있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군요. 좀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오래 기다리진 못한다. 생각 있으면 나 떠나기 전에 저기 황학동 시장 저편 동성 여인숙으로 와. 한두 달 정도 더 머물지도 모르니까. 이건 이번 수고비다.”

두둑하게 쥐여 준 지폐에 소년은 액수를 확인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딱히 별다른 표현도 없이 사라지는 춘삼이.

잠시 후 춘삼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김복만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가 버렸네요. 무정한 녀석 같으니.”

“똘똘한 녀석이면 판단이 서겠지. 기다려 보자고.”

“과연 저 녀석이 우릴 따라오겠습니까?”

“사실 저 녀석에겐 이만한 선택지도 없을 거야.”

선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억지로 데리고 간다 한들 오래 머물 수 있겠나.

그가 변덕을 부린 건 어려운 사정에도 삐뚤어지지 않는 인성과 어린애답지 않은 책임감 까닭이었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다음날, 강태준은 오랜만에 명동거리를 다시 찾았다. 명동의 중심인 시공관을 중심으로 주점과 다방이 늘어선 거리는 평일인데도 불구 활기가 넘쳤다.

전통의 강호인 모나리자를 시작으로. 값싼 양주로 사랑을 받았던 ‘포엠’, 악인들의 아지트였던 ‘돌체’까지.

강태준이 찾은 곳은 시공관 자리부터 미도파 백화점이 있던 큰길의 남쪽 지역이었다.

시공관 북쪽은 다행히 폭격을 면해서 전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진고개에 이르는 지역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돼 버렸다.

번화가에 위치한 송옥 양장점 앞을 지나자 재건 중인 거리가 보인다.

다방 밖으로 울리는 축음기 소리에 공사장 잡부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어이 최 마담! 다른 판 좀 틀어 보지 그래. 눈물 젖은 두만강 같은 가요 말고 딴 노래 말이여. 하도 들어서 이젠 귀에 딱지가 앉겠소. 요새 부산 정거장인가 그거 좋던디.”

“퍽이나, 팔자 좋은 소리 하긴. 애초에 판이 그것밖에 없는디 대체 어쩌라는겨.”

“아니, 무슨 다방에 노래가 하나밖에 없소?”

“먹고살 돈도 없는데, 레코드 살 돈이 어디 있나? 대신 사 주기라도 할텨?”

“거 참, 인색하긴. 그러지 말고 좀 내놔 봐.”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새로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건물 앞이었다.

공터에 무너진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꽤 을씨년스럽달까.

중개인이 중심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여깁니다.”

“흠…… 이건 좀 매매용으로는 그런데?”

“하하. 좀 상태가 그렇지요? 재수 없게 포탄이 여기 똑 떨어지는 바람에…… 그래도 지뢰 같은 건 없습니다요. 하하.”

애써 포장하려 했지만, 폭격을 맞아서 반쯤 허물어진 건물의 모습에 강태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파손된 철근이 거죽 밖에 나온 갈비뼈처럼 앙상하다.

폭탄에 그을려 까맣게 변한 외벽이 자못 흉물스럽기까지.

김복만이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죠. 폭격 맞은 데 아닙니까?”

“여기보다 더 좋은 데는 매물은 달리 없어요. 사실 여기 주인장도 급전이 필요하다 하셔서 빨리 내놓는 겁니다. 외관만 이렇지 좀 손보면 아주 쓸 만할 겁니다.”

열심히 썰을 푸는 중개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강태준은 건물 안팎을 두루 살폈다.

벽체 일부가 폭격을 맞기는 했지만, 불에 그슬린 것을 제외하곤 기둥이 상한 곳이 없다.

대지도 넓은 데다 용적률도 높아 층수 올리기는 어렵지 않아 보인달까.

심지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옛날 모습 그대로. 폭격 와중 혼자만 멀쩡한 건물에 김복만이 신기해했다.

“허, 신통하구먼요. 이렇게 요 건물만 이렇게 남을 수도 있나?”

“여기 숨어 있던 사람도 그 말을 했죠. 하늘님이 도우셨다고.”

“이 정도 운이라면 조상님께 고사를 몇 번 지내야겠는데요.”

강태준은 세심하게 안을 살폈다. 오래된 축음기에 낡아서 헤어진 벽지가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는 듯. 천장을 둘러보던 김복만이 불만스럽게 툴툴댔다.

“페인트칠하고, 싹 갈아야 할 거 같은데. 여기 곰팡이 난 거 보십쇼.”

“아이구 사장님, 그거야 락스로 확 닦아 내면 깨끗해집니다요. 게다가 이쪽 상권은 아주 괜찮아요. 시공관 직전 길목에 위치해 유동 인구가 많거든요. 심지어 그 유명한 이봉구 선생님도 이쪽 단골이셨답니다.”

기자 출신인 이봉구는 명동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당시 인텔리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만큼 연예인급의 인지도를 지닌 유명인이었던 셈.

하지만 그 말이 마땅치 않은지 복만이가 툴툴댔다.

“에이, 가난한 문인들 따위가 백날 와 봐야 무슨 돈이 됩니까? 외상값이나 늘겠지.”

“에이, 사장님도 깐깐하시긴. 그렇게 단편적으로 볼 부분이 아닙니다. 설마하니 문인만 오겠습니까? 마중물이 있어야 사람이 모이지요. 그리고 예술가들이 온다 케야 좀 운치도 있고, 멋도 있죠.”

“하루 종일 코피 한 잔 팔아 주면서 다방에 전세 내는 사람들인데 무슨?”

난처한 표정의 중개인이 땀을 흘리자 잠자코 있던 강태준이 물었다.

“등기는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에이 속고만 사셨나? 제가 여기 토박이입니다. 여기서 사기 치다 걸리면 장사 못 해요.”

“그래도 이렇게는 매물 못 받죠. 적어도 폐기물 더미는 다 치워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치열한 네고 끝에 근처 반파된 건물과 땅을 포함해 30만 환에 구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폭격으로 무너진 폐자재를 치워 주는 조건이었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역시 큰돈은 버신 분은 다르네요. 이렇게 제반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목돈이 오가는데 적당히 할 수 있나요. 일단 계약금 10프로하고 중도금은 등기 이전 서류 준비되고 일 끝난 뒤에 납입하는 걸로 하지요.”

계약을 체결한 강태준이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김복만은 그리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꽤 깎긴 했는데 그래두 너무 비싸게 산 건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그 건물은 뭐 손볼 게 한둘이 아니던데요.”

“그래도 새로 짓는 것보다는 싸게 먹히지 않겠어. 일단 용달차라도 불러서 쓰레기부터 정리해야겠네. 인력 소개소 들러서 건물 수리할 목공이랑, 미장일할 사람 알아봐야겠어. 영업할 마담도 고용해야 하고 말이야.”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요.”

권리금까지 얹어 총 42만 환에 달하는 비용이 소요되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사실 매물이 안 나오는 걸 생각하면 싸게 산 편.

애초에 휴전 직후라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거래 자체가 어려운 지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일대는 그야말로 금싸라기가 따로 없게 된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명동이란 동네는 사채업의 성지로 부상하고 동시에 대한민국 패션의 중심지가 된다.

‘무엇보다 최신 경제 정보를 구하기도 유리하고 말이지.’

큰돈이 모이는 데는 정보가 모여들지 않은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투자가 필요한 법. 물론 건물은 구했으니 이제 재개축을 논의할 차례였다.

“그보다 그을린 외벽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밋밋하게 둘 수도 없는 일이고.”

“그냥 싹 페인트로 덮어 버리지요.”

복만이의 말에 듣던 중개업자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올렸다.

“혹시 벽화를 그려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벽화요?”

“예. 사실 제가 동향 사람 중에 꽤 괜찮은 화가가 하나 있습니다. 사실 실력은 보증할 만큼 뛰어난데 전후다 보니 일없이 놀고 있는지라…… 아무래도 이 지역 특성상 마땅한 문화 공간이 없기도 하고. 전시관 같은 느낌으로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지만 꽤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벽화라……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좋습니다. 그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신이 난 중개업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강태준. 지나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넝마주이들이 누군가를 둘러싼 채 발길질을 하고 있었던 것.

허름한 옷차림의 사나이가 몸을 웅크린 채 얻어맞고 있다.

“얌마, 누가 허락받고 여기 뒤지래?”

“늙은이가 상도덕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분이 차는지 사정없이 발길질하는 모습에 감정이 실렸다.

“저, 저러다 죽겠는데요.”

그냥 놔뒀다간 사달이 벌어질 것 같아 강태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쫓았다.

“예끼 이놈들! 뭐 하는 거냐? 어서 치우지 못해?”

성을 내며 달려가자 아이들이 좌우로 흩어진다.

한껏 얻어맞은 남자는 시멘트 바닥에 깔고 널브러진 상태.

흠씬 두들겨 맞은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멍든 얼굴로 반쯤 의식을 잃은 모습에 김복만이 혀를 찼다.

“어이쿠야, 많이도 맞았네. 사람이 무슨 동네 샌드백도 아니고.”

“이거 죽은 거 아냐?”

“숨은 쉬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강태준은 난감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송장을 치우는 취미는 없는데.

그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중개업자가 흠칫 놀란 얼굴로 상대를 붙잡았다.

“아니, 종섭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괜찮아요? 어디 부러진 데는…… 이럴 때가 아니지 병원, 병원으로 갑시다.”

신음을 흘리는 종섭을 둘러업은 중개업자가 급하게 병원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때 쓰러진 남자가 작게 우물거렸다.

“그거 말고…… 이요.”

“예?”

“저기 밥, 좀…… 밥 좀 주세요.”

강태준이 부축해 데려간 곳은 삼오정의 갈비탕 집.

뜨끈뜨끈한 고깃국을 본 백종섭은 침을 삼켰지만, 눈치만 볼 뿐 움직이지 들지 못했다.

딱한 행동에 중개업자가 짠한 얼굴로 손수 수저를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에구, 정말, 자 눈치 보지 말고 드세요.”

“그…… 그래도 됩니까?”

“에휴. 어서 드십쇼. 우리는 다 먹었으니.”

우걱우걱.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걸신들린 사람처럼 우물대는 모습이 며칠은 굶은 모습.

얼마나 급한지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모습에 내심 연민이 든 강태준.

컥컥대는 남자를 보고 김복만이 물컵을 건넸다.

“거참 천천히 드십쇼. 체하십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밥알 하나까지 깨끗이 남긴 그가 한숨을 토했다. 피죽도 못 먹은 사람같이 곯았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좀 괜찮으십니까?”

“이제 살겠습니다.”

배를 두드리는 목소리에 드디어 활기가 돋는다.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여긴 강태준. 중개업자가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이구야, 밥이 없으면 말이라도 하시지요,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게 매번 손 벌리기 미안해서.”

“아이구, 그래도 그렇지. 숨넘어가는 줄 알았잖습니까?”

그 말에 강태준이 물었다.

“아까 보니 뭘 찾고 있으셨던 거 같은데 거기서는 뭐 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 넝마주이 소년들은 대체 뭐고?”

“그게, 사실 은박지를 줍고 있었거든요. 근데 하필 애들이 그걸 보고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 생각했는지 저를 마구 패더라고요.”

복만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은박지요? 그 껌 싸는데 쓰는 거 말입니까? 그건 왜?”

“그게 그림을 그리려고요.”

“은박지에 그림이라니? 물감은 제가 저번에 사 드렸잖습니까?”

“그게…… 아껴 쓰려다가?”

“아이구야 답답도 하십니다.”

중개업자의 타박에 부끄러운지 말끝을 흐리는 남자.

그때 강태준은 문득 은지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럼 혹시 그 은지화란 거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 보여 드릴 만한 실력은 되지 못합니다만.”

몹시 부끄러운 듯 주저하며 주섬주섬 그림을 건네는 순간 그림을 확인한 강태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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