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8화 (18/361)

18화 토끼몰이

용산 기지.

용산은 한강 상륙 시 서울의 가시권에 있는 곳이다. 남산에 가까이 있어 퇴로를 확보하기 용이한 군사 요충지인 용산은 당시 새로 짓는 미군기지 공사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강태준이 여기를 찾은 것은 운송사업과 관련하여 군용트럭 불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보다 스튜어트 중위 같은 사람이 우릴 만나 주긴 할까요?”

“그 양반은 호인이니 기대해도 좋지 않나.”

“군인이잖습니까. 경제활동 같은 데 개입하는 건 안 되지 않습니까?”

“임마,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줄 아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 그리고 확실한 건 하나 있지.”

“뭐예요 그게?”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

강태준이 찾아간 스튜어트 중위는 처음 카발 수리소에 취직했을 때 처음 수리를 맡긴 차주로 그의 단골손님으로 유명했다. 과연 강태준의 말대로 접객실에 등장한 스튜어트가 반가운 듯 악수를 하였다.

“오, 미스터 강, 이게 얼마 만입니까?”

“중위님, 이제 대위시군요. 일전에 수리한 차는 아직 잘 굴러갑니까?”

“물론이죠. 손봐 주신 덕에 지금도 쌩쌩합니다. 그보다 서울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강태준이 갖고 있던 사업 구상을 설명하자, 다리를 꼰 채 이야기를 듣던 스튜어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군용트럭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싶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한 10여 대쯤 확보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외자청에서 지프나, 트럭을 민간에 추가로 불하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우리 스튜어트 대위님께서 이런 부분에 힘 좀 쓰신다고 들어서 말이죠.”

강태준은 무안으로 떠난 뒤에도 여전히 부산 쪽 사정에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카발 수리소와 부산 일대에 심어 놓은 인맥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개중 강태준의 관심에 포착된 내용은 외자청에서 신규 모터풀 직원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였다.

전시에 외자청에서는 ECA계획에 의해 구호 물품과 원조 물자를 수송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쓸모없어진 군수 물자 운반용 트럭들을 민간에 불하하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기존에 진행했던 외자청의 일을 대신하는 조건이었지만, 불하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이권사업이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흠. 제 소관으로 가능한 부분은 극히 일부지요. 일단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나 가능하겠지만 불하 차량을 입찰하려면 매입자금이 있어야 할 텐데요.”

“자금 걱정은 더셔도 됩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 생겨 말입니다. 적어도 오천 불 이상의 여유 자금은 있습니다.”

“오, 원더풀. 그렇다면야 좋은 일이군요. 하지만 허가 요건을 갖추거나 법인으로 교통부 운수업 면허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미군 군용물자 불하를 받는 것이 처음이라 절차를 잘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네. 일단 자금 동원 계획을 짜고, 주요 은행 잔고 증명서를 발급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미군 물자 불하를 받기 위해선 수송과 배차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필수니. 일을 맡길 외자청 쪽 사정도 잘 아는 전문가를 찾아야 하고요. 주둔군 사령부 내, 모터풀을 설치해 운영 중에 있으니 그쪽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스튜어트 대위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정보과 참모 출신 장교인 그의 조언은 꽤 구체적이었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커서, 현금보다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내는 편이 훨씬 유리하거든요. 요사이 서울 쪽 지가가 오르는 추세를 생각하면 그편이 유리하지요.”

“흠. 그건 생각 못 했는데. 참고하겠습니다.”

“네. 가능하면 서울 쪽에 본사를 설치하고 지사를 두는 게 좋습니다. 서울에 본사를 두는 것이 영업하기 편할 겁니다. 추후 거래를 서울권으로 확장하기도 용이하고요. 은행권 대출 실적에 따라 거래량이 많으면 아무래도 면허 발급에서 우선순위가 높아질 테니까요. 혹시나 면허 발급에 어려움이 생기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구, 이런 귀한 정보를,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사람이 돕고 사는 거지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문의해 주십쇼. 상담료는 차 정비로 갈음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언제든지 최상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강태준 역시 같은 의견이었기에 내친김에 서울 쪽에 매입할 땅을 물색하기로 했다. 하지만 강태준은 미리 개발된 도심지보다는 앞으로 개발 가능성 있는 부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먼저 찾은 지역은 다름 아닌 남산 아래 퇴계로였다.

일제강점기 혼마치라고 불리던 퇴계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미군의 공습을 대비해 정비한 도로였다. 서울역부터 회현역에 이르는 이곳은 당시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미래 서울역에서 종점인 도로 교통 공단 사거리를 따라 왕십리로와 직결되고, 난계로와 만난다.

미래의 기억을 더듬던 강태준은 추가로 한강대교 일대를 둘러보았다. 여의도 영등포는 60년대 유일하게 개발이 진행된 곳이기도 했다.

‘이쪽은 지대가 낮지만, 개발 가능한 부지가 넓지. 꼭 체크해 두어야겠군.’

기억을 더듬던 강태준이 가물가물한 내용을 메모해 두었다.

영등포에서부터 서울교 남단까지 투자할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하숙집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서울 왔으면 근처 구경이라고 하지, 뭘 그렇게 바쁜가?”

“하하. 취직자리 알아보느라고요. 정비소에 어디 적당한 자리가 있나 해서.”

“오, 기술자셨구먼. 그보다 꼬마 하나가 왔다 갔는데. 이런 쪽지를 두고 가더라고. 난 까막눈이라 일단 받기만 했어.”

강태준이 받아 보니, 휘갈기는 글씨로 짤막하게 일정이 적혀 있었다.

-내일 오후, 10시. 예정지에서 보세.

내용을 확인한 강태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쪽지를 구겼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약속 시간이 되자 강태준은 미리 보관했던 목함을 들고 다시 시장으로 갔다. 긴 목도리를 두른 것이 평소와 다르게 말쑥해 보이는 차림의 춘삼이가 그를 반가이 맞았다.

“오셨습니까?”

“평소보다 멀쑥한데.”

“날도 추워졌고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서요. 대충 헌 옷 하나 주웠습니다.”

굳이 10시를 택한 것은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 사람이 줄어드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통금은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보통이었는데 사이렌 소리와 함께 통행금지가 시작되면 경찰들이 번을 돌았다. 이때 잡히면 내일 오전까지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인적이 빠진 시장 골목은 한적했다.

춘삼이를 따라 골목골목을 들어가자 백 영감의 골동품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태준이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영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져왔나?”

“예. 여기.”

보자기에 꽁꽁 싸맨 물건을 꺼내자 사진으로만 보았던 청자가 위용을 드러냈다. 백 영감의 눈빛이 달라졌다. 곡선미가 일품인 청자의 비췻빛에 운학무늬가 불빛에 비추어 우아한 맛을 자아냈다.

도자기의 유려한 자태를 보자 냉담했던 영감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오! 이거 대물이로군.”

골동품 사이에 비교하듯 놓아 보니, 새삼 이 청자가 얼마나 값어치 있는 물건인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청자를 돌려 보던 백 영감이 감탄을 연발했다.

“다시 확인하지만 어디서 훔친 물건은 아니겠지?”

“거 영감님도 참, 속고만 살았나. 물건 확인했음 빨리 거래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아, 알았네.”

정신을 차린 백 영감이 청자를 조심스럽게 다시 싼 다음 금고에 넣고 문을 잠갔다.

탱크가 밟아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금고.

진품임을 확인한 백 영감이 준비한 돈과 통장을 내밀었다.

“자. 약속했던 대금일세, 달러는 1,000불, 50달러로 10장, 10불짜리는 50장일세. 나머지 금액은 부산은행 계좌로 넣었어. 사이 종이에 비밀번호가 적혀 있으니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말게.”

계좌 액수를 확인해 본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행운을 비네. 뒷문은 저기일세.”

백 영감의 안내에 따라 뒷문으로 향했다.

복만이가 흥분한 듯 지껄였다.

“이제 우리 부자군요.”

“부자는 무슨. 자, 가자. 혹 꼬리가 붙었을지 모르니.”

강태준이 밖으로 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춘삼이가 바삐 발을 놀렸다.

“자자, 빨리 갑시다. 곧 통금입니다. 차 끊기기 전에 서둘러요.”

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 다 쓰러져 가는 폐건물에서 일단의 무리가 진을 치고 보진당 일대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시팔 고작 돈거래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나와.”

“몇 푼이 아니니까. 그렇겠지요.”

“그래두 그렇지. 더럽게 오래 걸리네.”

검은 복면을 입은 엄석호가 시린 손을 비비며 투덜댄다. 이번 거사를 위해 무려 열흘이 넘게 잠복하고 있었던 녀석들인 만큼 더는 기다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지루하게 망을 보던 멸치 녀석이 흥분한 듯 소리를 질렀다.

“나왔다. 나왔어!”

“이 씹새가, 호들갑 떨지 말고 일 망칠 일 있어?”

“죄, 죄송합니다.”

“그보다 저놈들이 맞나? 면상들이 영 안 보이는데.”

“네. 확실합니다. 어? 근데 돈 가방이 없는뎁쇼?”

“이 무식한 넘아. 은행 계좌나 수표로 받았겠지. 자 빨리 움직이자고.”

이들은 애초부터 백 영감으로부터 받은 돈을 가로챌 요량으로 잠복해 있던 인원들이었다. 망을 보던 녀석이 신호하자 복면을 바로 쓴 건달들이 시장을 한꺼번에 포위해 나갔다.

이상을 알아차린 춘삼이가 짧게 속삭였다.

“뒤에 꼬리가 붙었습니다.”

“알고 있어. 일단은 모르는 척하게.”

공기가 달라짐을 눈치챈 강태준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드문드문한 가로등을 피해 모자를 푹 눌러 쓴 녀석 몇 명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저번에 본 건달패들인 거 같습니다.”

“형님, 이제 어떡하죠?”

불안한 듯 몸을 떠는 복만이에 강태준이 속삭였다.

“임마, 침착해라. 도망갈 곳은 많아.”

“방법이 있습니까?”

“여길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신호하면 그때부터 뛰어.”

강태준과 일행은 태연하게 길을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일행이 바싹 따라오는 사이, 꺾이는 길목이 나타났다.

그때 타이밍을 재던 강태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뛰어!”

강태준의 말을 들은 일행이 사방으로 찢어지며 달리기 시작했다. 부리나케 빠져나가는 일행을 보고 건달들도 허겁지겁 뒤를 쫓았다.

“들켰다. 잡아!”

불쑥 튀어나온 건달에 문답무용으로 주먹을 날린 강태준. 체중을 실어 턱을 올려친 일격에 턱이 돌아간 건달이 뻑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진다.

서둘러 빠져나온 춘삼이가 소리쳤다.

“여깁니다!”

강태준 일행은 미꾸라지처럼 골목을 빠져나갔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길 십여 분.

하지만 이들의 도주는 얼마 가지 못했다.

도망치던 일행이 도착한 곳은 막다른 골목. 쓰레기봉투가 널브러진 벽면에 돌아보는 강태준.

토끼몰이하듯 일행을 몰아넣은 건달들은 준비운동을 하듯 손을 털었다.

눈을 뒤룩거리던 복만이가 무안한 듯 씨익 웃었다.

“시팔, X됐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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