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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7화 (17/361)

17화 황학동 건달패

보다 못한 강태준이 깨진 옹기를 주워 들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 심하구먼. 사람이 이래서 쓰겄소.”

“아니, 닌 또 뭐야?”

“지나가는 사람이요. 거 아줌니가 나중에 주겠다지 않소? 이래서야 겁나서 시장 다니겠소?”

인상을 쓴 건달이 강태준을 흘겨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이내 목청을 높였다.

“이런 시발럼이. 야 임마, 니 몇 살인가? 니가 이 년 친자식이라도 돼?”

“그러는 그쪽은 몇 살이신데요. 싸가지가 바가진데, 나이는 똥구멍으로 처먹으신 게요?”

그 말에 상인들의 입에서 피식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못 통쾌한 듯 지켜보던 행인들도 관심을 보았다. 보고 있던 건달이 눈을 부라리며 상인들을 노려보았다.

“누가 웃었어? 누가? 누가 웃음소리를 내었어?”

순식간에 잦아드는 웃음소리. 하지만 강태준은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예의 따지는 양반이. 어른 대하는 법도 가지가지구먼. 자기가 유리할 때만 나잇살 먹은 걸로 자랑이니 고거 아주 편리한 방법일세.”

“뭐 이 미친놈이 간이 배 밖에 나왔나? 싹퉁머리 없는 시키가?”

뿔난 남자가 뺨을 후려치려 했지만 그건 유형의 힘에 가로막혔다.

복만이의 손이 상대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던 것이다.

“아따, 손찌검을 함부로 해서 되나, 신사답게 말로 합시다. 말로.”

건달이 용을 쓰며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원래 용력 자체가 타고난 약력이 강하기도 했지만 몇 달간 꾸준히 운동하며 노가다로 몸을 키워 왔던 만큼 악력이 장난 아니었다.

꿈쩍 않는 팔뚝에 당황한 녀석에 버럭 성을 냈다.

“야, 이거 못 놔? 넌 또 뭐냐?”

“동생이지. 굳이 깽값을 받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소만. 보는 눈이 많소이다. 굳이 여기서 일 크게 벌여서 좋을 건 없지 않소? 싸우다 지면 개망신일 텐데.”

김복만이 눈을 부라리자 정신을 차린 녀석도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팔짱을 낀 행인들의 눈빛이 차갑다.

이쯤에서는 물러서야 할 때, 손목을 부여잡은 녀석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쳇, 운 좋은 줄 알아라. 아줌마. 그쪽 남은 돈은 다음 주까지야.”

건달들이 어슬렁거리며 사라지자 눈치를 보던 상인들이 옹기집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울음을 터트리는 여인의 모습에 시전 상인들이 그녀를 위로했다.

“욕봤소. 수원댁. 얼른 털고 일어나시게.”

“저저, 똥물에 튀겨 죽일 것들 같으니라고. 저런 깡패들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암, 사탄도 저놈들보다는 훨 낫제.”

여인을 부축하는 모습에 아까까지 뒤로 물러나 있던 배춘삼이 강태준을 타박하듯 말했다.

“목숨이 몇 개라도 되십니까?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저 물 빠진 쥐새끼처럼 생긴 놈이 뭐라도 되나?”

“시장 상인 연합회 회장의 친동생인 엄석호란 놈입니다. 상인회 총무를 맡고 있죠.”

“저런 불한당이 상인회 총무라?”

“회장인 엄석대가 동대문파 행동대장인 유재광 따가리 거든요. 원래는 오야붕 밑에서 가방 모찌하던 녀석인데 사업 수완이 좋아서, 한자리 꿰찼죠.”

전쟁 직후 혼란의 도가니던 서울 시내는 건달들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은 종로 연합파 남쪽은 명동파가 치열하게 대립했다. 정치권과 결탁해 50년대를 풍미했던 정치 깡패 이한재가 동대문파의 대표였다. 이들은 야쿠자의 사업 방식을 따라 시장 상인들에게 보호세 명목으로 삥을 뜯었는데 이것이 이들의 주요 자금원이 되었다. 듣고 있던 김복만이 혀를 찼다.

“왈패 자식이 감투를 쓰다니. 이거 말세로군 말세야.”

“암튼 해코지당하지 않으신 것만도 천만다행입니다.”

“흠. 이 일대 시장을 잡고 있다면 설마 골동품점도?”

“맞습니다. 거기 황학동 시장은 동대문파 놈들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저놈들의 대표적인 자금줄이지요.”

“등잔 밑이 어두웠군. 그럼 백 영감은 대체 어떻게 멀쩡하게 영업하는 건가?”

“아, 그 영감은 아무도 못 건드려요. 빽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정, 재계에 깔린 고객분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서. 오성그룹 이 회장이 단골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선 경찰서장 정도야 손끝으로 부릴지도 모르지요.”

하긴 몇만 달러나 되는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래하려면 그만한 끈 정도는 있어야겠지. 그 말에 김복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런 대단한 양반이 왜 저런 왈패들을 방치하는 거지?”

“자기랑 상관없는 일이니깐요. 자기 일이 아닌 바에야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죠.”

“허어. 거 참. 노친네 인색하긴. 몹쓸 양반일세.”

사실 골동품 사업은 소문 안 나는 게 중요하니, 몸을 사릴 법도 하다.

눈먼 장물을 취급하는 일도 많을 테니 구린 소문이 나면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막상 깡패들이 상인들을 괴롭히는 꼴을 보니 강태준으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강태준이 혼잣말을 지껄였다.

“신경을 안 쓴다라. 그렇다면 관련이 있으면 신경을 쓰시겠군.”

“아니, 불안하게 또…… 형님 뭘 어쩌시려고요.”

배춘삼도 걱정이 되는 듯 그를 말렸다.

“저, 사장님, 백 영감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 두시는 게…….”

“내가 뭘 한다고 그래? 그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두는 게 좋겠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러게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시장 탐방을 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이번 일로 해코지할지도 모르니까요.”

“당분간, 그렇게 하지. 이쯤이면 대충 이 지역 공부는 충분하니. 그럼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둘러보자고.”

혹시나 놈들에게 찍히면 골치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강태준은 마지막으로 시장을 돌며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다음, 꼼꼼히 유통할 시 상품성이 있을 만한 물건을 체크했다.

며칠 후, 동대문의 시장상인 연합회 건물.

서울시 동대문 경찰서 쪽 골목과 정반대에 위치한 건물은 전후답지 않게 신축이다.

동대문파의 아지트에 모인 건달들이 각자 구역에서 착취한 수금액을 들고 모이는 날.

지폐와 동전을 수북이 쌓아 놓은 가운데 상납금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손들. 총액수를 확인해 본 엄석호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다.

“고작 이것뿐인가. 요사이 영 수금이 시원찮네.”

“헤헤. 죄송합니다. 인천서 물건이 떠야 거래량이 늘 텐데, 아시다시피 요새 단속이 심해져서요.”

사치품으로 간주하던 양복지나 시계 등이 경찰과 세관의 집중 단속 대상이 되면서 황학동 건달패들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상인들은 단속반이 나타나면 빠르게 물건을 숨기거나 셔터를 내리고 잠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 그 말에 엄석대가 혀를 찼다.

“뭘 뜯어먹을 게 있다고 지랄들인지. 짭새 놈들한테 뽀찌 안 줬어?”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시위인 것 같습니다.”

“임마, 기름칠 좀 잘해야지. 달란다고 다 주면 우린 뭘 막고 살아.”

“죄송합니다. 형님.”

“정신 똑바로 못 차려? 명동파 놈들이 지금 세력을 확장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판인데 이렇게 집안 단속 못 해서야 뭐 제대로 되겠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종로 연합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급속도로 조직원을 늘리는 중이라더군.”

“젠장. 또 전쟁입니까.”

“그래. 우리 역할이 막중하다. 칼받이로 쓸 꼬붕을 구하려는 거지. 위에서 상납금을 늘려야 한다고 쪼더라고.”

“골치 아프군요.”

조직을 운영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시장바닥에서야 큰소리치는 인간이지만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엄석대의 입지는 그렇게 확고하지 않았다. 주먹보다는 잔머리를 써서 올라선 몸인 만큼 고깝게 보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기랄, 상납금 내면 쥐뿔도 없겠구먼 그래. 어디 돈 나올 구멍 없나?”

투덜대는 엄석호가 담배를 찾자 눈치를 보던 멸치가 잽싸게 성냥을 당겨 불을 붙였다. 스읍 하고 연기를 들이마신 엄석호가 도넛 모양의 입김을 뿜어내었다.

“듣자 하니 백 영감이 며칠간 자리를 비웠다 합니다.”

“그 영감이 움직였다고? 어디로?”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며칠 셔터 내린 걸 보니, 뭔가 일이 있어서가 아닌가요.”

“백 영감이 움직일 정도면 그거 보통이 아닌데?”

“영감탱이가 움직일 정도면 큰 거래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대물이 걸린 것 같습니다. 적어도 몇천 불은 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거 관심이 가는구먼.”

생각 이상으로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실제로 지방에서 가끔 그물배 낚시를 하다 보면 물고기 대신 월척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자 듣고 있던 뚱뚱이가 아는 척을 했다.

“그러고 보니 지방에서 온 촌놈들 두 명이 저희가 관리하는 상점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송나라 시대 쓰던 사발을 한 점을 갖고 왔는데 몇 번 간만 보더니 그냥 가더라고요.”

“그래? 혹시 인상착의는 기억하나?”

“물론입죠. 대충은 기억합니다. 허여멀게 생긴 놈이었는데, 옆에 덩치 큰 떡대 하나가 호위처럼 붙어 있더군요. 씨름선수같이 퉁퉁하게 불은 녀석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럼 어디 그려 봐.”

별별 인간들이 다 흘러드는 시장답게 왈패 중에도 재주 있는 녀석이 종종 있기 마련. 사람 하나를 불러와 구술에 따라 슥슥 얼굴을 그려 나가자 잠시 후, 몽타주 하나가 완성되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오, 진짜로 이렇게 생긴 놈인가. 키랑 덩치도 기억하나?”

“예. 평균보다 한 뼘 정도 컸던 것 같습니다. 이 덩치에 이목구비가 꽤 진한 놈이 얼굴이 앳돼 보이더라고요.”

그림을 돌려 보던 중 심복 중 하나가 뭔가 깨달은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앗 석호 형님! 이거, 이놈들, 저번에 시장에서 본 놈들 아입니까?”

“어 진짜잖아.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직접 본 적 있나?”

“옹기점 근처에서 봤던 놈입니다. 나대길래 한 대 쥐어박으려다,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습니다.”

자기가 유리하게 말을 바꾸는 녀석이었지만 엄석대의 관심은 이미 잿밥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십중팔구 이놈들이겠군. 그 골동품 거래를 하려는 놈들 말이야.”

“그놈들이 말입니까?”

“그래, 일단 여러 군데를 찾아다닌 걸 보면 분명 뭔가 큰 건수를 물은 게 틀림없어. 물건이 아마 하나가 아닐 가능성이 크고. 대충 시세만 파악하러 온 거야.”

“오, 그럴듯한 추론이네요.”

엄석대가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럼 이놈들 당장 찾아봐라.”

“예? 어쩌시려구요?”

“백 영감은 못 건들어도 이런 잡것들은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강태준 일행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강태준이 나타나지 않자 도리어 초조해진 엄석호였다.

“안 나오는데요? 이미 딴 곳에 간 것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그 정도 고가의 물건이라면 여기 말곤 처분할 곳도 마땅치 않아.”

“그러면 어쩌지요?”

“나타날 곳이야 뻔하지 않나, 일단 잠복하자고.”

어차피 팔 때면 나타나지 않겠는가.

백 영감이 물건값을 주고 나면 그 뒤에 가로채도 늦지 않다.

‘그렇게 되면 일단 나도 건수 하나 올리는 거지.’

그렇게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던 엄석대. 머릿속은 이미 꽃밭을 걷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강태준은 용산의 미군 캠프를 찾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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