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6화 (16/361)

16화 보진당

짙은 대춧빛 얼굴에 탐스러운 수염. 그리고 갈건까지.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지는 상이었다.

“이거 삼국지에 나오는 양반인가. 잘 만들었네.”

“꼭, 사천왕상 세워 둔 것 같네요. 서낭당에 세워 두는 거.”

골동품을 겹겹이 쌓아 놓은 상점 내부로 들어가지 먼지가 치솟는다.

안은 어두침침했고 마치 도깨비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래된 서까래와 향로 위에 은은한 빛이 번지고. 옛 시간을 옮겨 놓은 듯, 옛것의 느낌이 가득하다.

분위기에 김복만이 무척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군요.”

“그러게 말이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건가?”

마치 바깥의 시간과는 격리된 듯한 공간. 삐걱거리는 바닥재를 피해 자리를 조심스럽게 옮기는 강태준. 때마침 정체불명의 인영이 스쳐 지나가자 김복만이 기겁하며 펄쩍 물러났다.

“에그머니나!”

늙수그레한 얼굴에 강시처럼 창백한 얼굴의 노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상대가 인간임을 확인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요. 인기척 좀 내고 다니십쇼…….”

“허허, 내가 이 집 주인인데 무슨 소리를. 거 춘삼이가 들여보냈나?”

“춘삼이요? 그게 무슨.”

“그 벙거지 쓴 소년 말일세. 시키지도 않은 심부름을 하는.”

“아. 예 맞습니다.”

“또 쓸데없는 짓은. 역시 그놈이었구먼. 점심에 오수 좀 들려고 했더니만. 성가시게 말이야. 그보다 자넨 다 큰 어른이 왜 그렇게 겁이 많아.”

“제가 겁이 많기보다 분위기가 좀 그렇잖습니까. 청소라도 잘하시던지요. 무슨 귀신 나올 분위기 같습니다.”

혐오스럽다는 듯 질색하는 복만이에 노인이 킬킬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닐세. 원래 여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묘한 기분이 들지 하지만 청소를 안 한 게 아니야. 일부러 손대지 않는 거지.”

“그게 뭔 궤변입니까?”

“오래된 물건에는 혼이 깃든다는 말이 있지. 헌데 그 혼이란 놈이 선한 놈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 그래서 잘못 만지면 횡액을 당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최대한 그 상태 그대로 놔두는 게 좋다 이걸세.”

“에이 무슨. 헛소리를 저 놀리려고 지어낸 말씀이죠?”

“믿거나 말거나.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 아니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슬슬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꽤 무서운 듯하다.

꺼림칙한 눈을 하는 김복만을 뒤로하고 강태준이 조용히 물었다.

“여기 주인이시다면 뭐라 부르면 됩니까?”

“아무렇게나 부르게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보통은 백 영감이라고 부르지. 그보다 젊은 사람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뭐 골동품점에 올 이유가 달리 뭐 있겠습니까. 물건을 팔러 왔지요.”

“어디 봄세.”

가져온 목함을 연 강태준이 조심스레 가져온 자기를 꺼냈다.

장갑을 낀 백 영감이 조심스럽게 루뻬를 들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호오, 이건 송나라 때 물건이군. 이 용천요에서 만든 거야.”

“그럼 이게 뭔지 아십니까?”

“알다마다. 이건 완이라는 건데 우리나라 말로 사발을 뜻하네. 서해에서 구했나? 모양을 보니 전남 쪽이겠구먼. 여수? 아니면 무안인가.”

“무안 쪽 물건입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뻔하지. 주로 그물배로 낚았을 때 종종 건져 올리는 거야.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어디 보자, 3만 환 정도는 될 듯하이.”

“3만 환!”

아까 부른 것과 10배가 넘는 가격에 눈이 튀어나온 김복만이었다. 백 영감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뭘, 용천요에서 나온 물건이면 알아준다네. 팔 물건은 이게 전부인가?”

“좀 더 있습니다.”

강태준은 미리 가져온 사진을 꺼냈다. 혹시나 싶어 현상해 온 사진이었다.

컬러로 현상한 사진을 두루 보던 그가 처음 강태준이 건져 올렸던 항아리를 유심히 보더니 침음성을 토했다.

“이건 고려청자로군. 이거 확실한 건가?”

“예. 어떻습니까?”

“이 사진이 사실이면 최상급이야. 상감에 운학무늬라니 귀한 물건이군. 색감도 아주 좋아.”

연신 감탄하는 백 영감의 태도에 강태준이 물었다.

“그럼 가격은 얼마 정도 나갈 것 같습니까?”

“적어도 삼천은 나갈 것 같네.”

“에이, 삼천이요? 에이 그럼 아까 그 물건 가격보다 싸다는 말인데…….”

투덜거리는 김복만의 행동에 백 영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3,000환이 아니라. 적어도 삼천 불 가치가 있다는 말일세.”

“예에?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고말고. 물건이 진짜라면 그 정도 가치가 있지.”

“경매에 올릴 수 없습니까?”

“가능은 하다만 적어도 6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걸세. 뭐 그러면 10프로 정도는 더 받을 수 있겠지만 일정은 장담할 수 없네.”

강태준은 머리를 굴렸다. 3,000달러라. 1950년대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가 15센트였으니, 현대적인 가치로 환산하면 1달러에 2만 원, 2020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거의 6천만 원 정도 되는 큰돈이다.

수수료가 갈등되기는 하지만 환전에만 6개월이 넘게 걸린다면 시간상으로 너무 오래 소요된다.

‘차라리 현찰을 받고 다른 사업을 벌이는 게 나아. 혹 소문이 나기 전에 팔아 치우는 게 낫겠지.’

게다가 보물을 보관할 데도 마땅하지 않는 데다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시간을 지체할수록 돈 가치가 떨어지니 불리한 점이 많았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강태준이 말했다.

“그냥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탁월한 선택일세. 일곱 점 한꺼번에 다 처리할 건가?”

“예. 그러면 총 얼맙니까?”

안경을 고쳐 쓴 백 영감이 주판알을 굴리며 계산에 들어갔다.

“어디 보자. 500환에 1달러니, 9천 불이면 총 450만 환이로군. 물론 수수료는 20프로. 돈세탁과 제반 경비를 제하면 350만 환 정도 되겠군.”

“달러로 환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액 달러로 말인가? 그건 좀 어려운데, 그러면 수수료가 10프로 더 붙지.”

“그럼 현금은 일천 달러 정도, 나머지는 은행 계좌로 입금 가능합니까?”

“차명 계좌를 만들어 달라 이건가?”

“예. 가능하겠습니까.”

“그 정도야. 2주 정도 소요될 테니, 기다리게. 생각보다 큰 건이라, 돈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이. 물건과 교환은 준비되면 말해 주지. 물론 달러에 대해서는 따로 수수료가 붙네.”

“그럼 환율은 어느 정도 됩니까?”

“매일 환율이 달라서 당일 환율이 다르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거 먼저 처리부터 해 주시죠.”

강태준은 미리 가져온 사발을 제값에 처분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택 밖으로 나오자, 아까 본 소년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강태준을 본 소년이 반가운 듯 물었다.

“용무는 끝나신 겁니까?”

“덕분에. 자, 수고비다. 받아라.”

엉겁결에 돈을 받아든 소년이 2천 환 지폐를 만지작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이건 너무 많은데요?”

“심부름 값으로 미리 주는 거야. 앞으로 몇 주간 여기 시장 구경 좀 할 텐데. 안내 좀 맡겨도 될까?”

“물론입니다.”

불현듯 의지를 불태우는 소년의 모습에 강태준이 씨익 웃었다.

“그럼, 근데 너 이름 뭐냐? 안내원을 하려면 서로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니?”

“아, 예. 전 배춘삼입니다.”

소년은 이제 16살이라고 했다. 김복만이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생각보다 더 어리구먼. 뭐하다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어?”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을 아끼는 것이 뭔가 사연이 있는 듯. 불편한 낌새를 알아차린 강태준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뭐 나이가 뭐가 중요한가,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강태준은 춘삼이를 앞세워 시장 바닥을 돌며 시장에 무슨 물건이 주로 팔리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배춘삼은 꽤 시장 바닥을 굴러먹었는지, 주워들은 것이 많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요사이 광목보다는 나일론이 인기라 이 말이지?”

“예. 비싸도 품질이 좋으니까요. 물건이 없어서 못 팔죠.”

시장을 둘러본 강태준은 전란 이후의 경제 상황을 피부로 느꼈다. 산업시설이 다 파괴된 국내는 극심한 물자 부족과 전비 조달로 인한 통화 증발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생활필수품의 수요는 폭증했다.

‘삼백 산업을 하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장치 산업이라 쉽지 않겠지.’

탐이 나기는 하지만 면화나 설탕 같은 삼백 산업은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해외에서 관련 기계과 기술자를 도입하고 이런 이권 사업에 필요한 차관을 배정받기 위해서는 넓은 인맥과 막강한 자금, 경무대 로비력은 필수였다.

그 배경은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에 기인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는 UN 원조로 받은 대충자금의 비중이 높았는데 당시 그 규모는 정부와 재정투자 융자액의 재원 중 43.5~ 9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모인 자금은 한미 합동 경제 위원회의 감독하에 집행되었기에 정부 고위직을 맡은 관료의 입김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직접 제조회사를 차리기가 무리라면 남은 방편은 결국 무역업이다. 수입 업자가 배정받은 원조 달러가 시장 환율보다 훨씬 낮은 공정 환율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무역업으로 원조 달러를 배정받으면 큰 이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일단 운송 쪽으로 발을 넓히면서 오퍼상을 노려야겠군.”

강태준의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사업에 대한 차곡차곡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한쪽 골목 구석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깨진 옹기가 사방으로 비산하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옹기를 파는 상점 앞, 깍두기 머리에 검은 정장을 걸친 건달들 몇 명이 불량하다는 표시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

개중 포마드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녀석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진열대를 툭툭 찼다.

금목걸이에 검은 와이셔츠를 입은 것이 딱 보기에도 불량한 차림이다.

오돌오돌 떨던 상인이 우는 얼굴로 애원했다.

“아니 갑자기, 와들 이러십니까? 말로 하십시다.”

“아니, 장사를 하려면 보호세를 내야지. 우들은 땅 파서 장사하나? 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지켜 주니 맘 놓고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시간을 좀만 더 주이소. 지도 영업을 해야 돈을 드릴 게 아니겠습니까?”

사정사정하는 상인의 태도가 불쌍해 보였지만 남자는 그 말이 우스웠는지 풋 하고 웃어 재꼈다.

“뭐, 장사는 하는데 돈은 없다니, 나랑 장난해 아줌마. 내가 그렇게 우습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럼 뭐? 내 미안하면 재깍 돈을 갖다 바쳐야지. 아니들 그래?”

“네. 형님.”

“야들아!”

“예. 형님!”

“말로 안 되긋다. 다 뒤집어 버려라.”

“아이고, 아이고 이러지들 마시오. 내 준다지 않소?”

패악질을 부리는 모습에 옹기점 주인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주변에 모인 상인들 역시 모두 눈치를 볼 뿐 끼어드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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