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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5화 (15/361)

15화 골동품 거리

떠나기 전 강태준이 신신당부했다.

“황 서방,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함세. 날이 궂으면 유도리 있게 챙기고. 안전운행이 최우선이야.”

“걱정 마십시오. 사장님. 제가 눈 부릅뜨고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강태준과 김복만은 서울행 트럭을 빌려 타기로 정했다. 해산물과 지역 특산물을 가득 실은 제무시 트럭이었다. 청자가 담긴 나무함을 소중히 품에 안은 강태준은 잠을 청하는 동안.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밤새 달린 차는 꼬박 18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다 왔습니다. 형님.”

“오 벌써?”

곤히 자던 강태준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김복만. 얼굴이 반쯤 푸석푸석해진 녀석이 피곤한 듯 보였다.

“빨리 왔는데. 여기가 어디냐?”

“예, 창신동입니다. 우선 며칠 묵을 여인숙 좀 알아봐야겠네요.”

창신동은 도성으로 진입하는 흥인지문과 바로 인접해 있다.

한양 도성 벽을 따라 걸어가니 개미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무허가 주택들이 널려 있다. 전봇대랑 도로변 담벼락에 여인숙 소개용 쪽지들이 더덕더덕 붙었다.

때마침 뽀글머리를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모습에 강태준이 길을 물었다.

“아주머니, 이 근방에 여인숙 쓸 만한 곳 있습니까?”

“거, 어디서 왔는가?”

“무안에서 왔습니다.”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살가워졌다.

“그래서 며칠 묵을 건가?

“아, 사나흘 이상은 묵으려고요. 자리 있습니까?”

“그럼 우리 집으로 오시는 건 어때? 저기 빨간색 담벼락, 옆 건물인데. 나름 쓸 만한 곳이요.”

“하루 숙박료는 얼맙니까?”

“오십 환.”

“그건 넘 비싼데, 딴 데 알아봐야겠네.”

미련 없이 걸음을 돌리려 하니, 아주머니가 서둘러 붙잡았다.

“거참,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십 프로 할인해서 사십 환만 주소. 우리 집은 방 뜨시고, 우물물도 좋소.”

“30환. 추가 지출은 어렵습니다.”

“알았네. 알았소. 거 참 인정머리 하긴.”

아주머니가 안내한 집은 생각보다 멀쑥한 한옥이었다. 외관이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내부는 꽤 깨끗했다. 강태준이 강조하듯 물었다.

“벼룩은 없지요?”

“우리 집은 그런 거 안 키우니, 안심하고 주무시게. 밤에 연탄불 필요하면 말하이.”

아주머니가 저녁밥 대신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왔다. 밥술이 연료처럼 들어가자 구겨졌던 복만이의 표정도 조금 펴졌다.

“이 정도면 며칠 더 머물러도 괜찮겠네요.”

“일단 오늘은 이만 쉬자고. 좀 씻고, 낼 부터 황학동에 가 보자고.”

둘은 이부자리를 펴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준은 김복만과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시장으로 향했다.

“여기인가?”

종로구, 황학동. 청계천의 복개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는 한때 1백30여 개의 골동품상이 밀집하여 골동품 거리였다. 한때 대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던 이곳은 노점상들은 서울 시내와 미군 부대 등에서 흘러나온 중고 생활 물품을 내다 팔며 거대한 장터를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도로 한복판에 깔린 궤도를 따라 경적을 울리는 노면 전차들.

철로 옆으로는 시내버스와 자전거가 다니고 있었고, 우마차와 손수레들까지 눈에 띈다.

“이야. 겁나게 바쁘구먼요. 이게 수도라는 건가?”

“놀라기는. 지도는 확인해 봤어?”

“네. 근데 이 정도 혼잡도면 길 찾기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목포에서부터 지도를 받아 오긴 했지만 이미 옛날 물건이라는 게 문제.

물건을 팔러 온 상인들과 개미 떼처럼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외딴 섬에 떨어진 기분이 들 정도다. 복만이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어떡할깝쇼? 아무래도 길잡이가 필요할 거 같은데?”

“조금 기다려 보자고.”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노점 사이에 숨어 있던 양복 하나가 접근해 왔다.

푹 모자를 눌러쓴 그가 정중한 자세로 말을 걸었다.

“도움이 필요하실 거 같은데. 혹시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골동품 거리를 찾는 중입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겠소?”

“10환입니다.”

강태준이 돈을 쥐여 주자, 남자가 이내 모자를 고쳐 썼다.

“자 저를 따라오십시오.”

등을 따라 꼬불꼬불한 거리를 따라가다 보니 반쯤 짓다 만 건물 앞에서 패랭이를 쓴 각설이들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진짜 거지가 아니라 타령을 하는 풍물패들이었다.

사람들이 명창으로 보이는 남자가 부채를 든 채 목소리를 높이자, 기다리던 각설이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들 한 곡조 뽑아 보실려우?”

“얼씨구, 시구 시구 들어간다. 절씨구 시구 들어간다!”

각설이 분장을 한 남자가 품바 품바 하며 타령을 신명 나게 불자 옆에 있던 입 방귀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러자 한쪽 가랑이를 걷어 올린 녀석이 하시기를 쓴 채 발장단과 함께 덩실거리며 흥을 돋우고, 손을 문둥이처럼 오그라뜨리거나 다리를 흔들었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어서 못 먹고, 술은 수리수리 넘어간다. 저리시고 이리시고 잘이한다. 품바품바 잘이한다.~~ 한 발 가진 깍귀, 두 발 가진 까마귀, 세 발 가진 통노귀에 네 발 가진 당나귀, 저리시구 이리시구 잘이한다, 품바 품바 잘이한다.”

목청을 높여 신명 나게 외치는 명창들. 장단에 맞춰 한바탕 어깨춤을 추자, 아이들이 박수를 친다. 강태준과 그 일행도 잠시 멈춘 채 그 가닥을 구경했다.

잠시 후, 공연을 마친 단원들에게 동전을 하나씩 던져 주었다.

“이야, 공연이라니 귀한 구경했네요.”

“소리가 찰지군요.”

“이쪽 방면이 이름난 판소리꾼이 많지요. 광무 극장 덕분에 꽤 성황이지요.”

70년대까지 황학동은 예술가들의 집성촌으로 유명했다. 해방 이후 TV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황학동과 그 인근 지역은 판소리꾼과 희극인들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휴전 뒤에는 주로 악극 공연이 많았는데 당시로써 유동 인구가 많은 황학동은 재담이나 창가를 연습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특히 왕십리 광무 극장과 사대문 밖에서 흥행한 공연들은 을지로 계림 극장, 제일 극장 등에서 다시 연출되며 악극의 1번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간 문화생활이 아쉬웠던지 복만이가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지방에도 좀 공연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지역 풍물패들도 순회공연을 준비 중이랍니다. 올해부터는 지역 대도시에도 모습을 보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거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

중구, 광희문을 거쳐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사람들. 번화가답게 넓은 공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며 강태준이 의문점을 물었다.

“보아하니 넝마주이들이 꽤 되는군요.”

“재활용이 가능한 헌 옷이나 헌 종이, 박스, 폐품 등을 주워 모아다가 고물상에 파는 사람들이 많지요.”

“제일 인기 있는 품목은 뭡니까?”

“옷이랑 고철이죠. 아무래도 고물값이 비싸니까요. 요새 덕분에 양아치들이 장난 아니죠.”

큰 광주리나 망태기를 짊어지고 다니는 넝마주이들이 많았다.

‘확실히 철값이 비쌀 만하긴 하군.’

1918년 이포 제철소에서 시작한 국내 철강산업은 한국전쟁으로 기반이 거의 상실되었다. 중화학 공업의 기반은 북쪽에 주로 있었고 원조 경제에 의존하는 현실.

철강이 산업의 쌀인 것을 생각한다면 고철수급 문제는 산업화 단계에서 풀어야 할 숙제다.

고철 장사라…… 꽤 할 만하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골동품점에 들어간 복만이는 촌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예품 상점을 둘러본 그는 은은하게 반짝이는 자개가 붙은 작은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뚱뚱한 차림에 돈 많은 중국 상인처럼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손을 비비며 웃는 낯을 했다.

“아이구 손님 뭘 도와드릴깝쇼.”

“지방에서 왔소이다. 물건 좀 팔러 왔는데요.”

“오, 물건은 어째 가져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강태준은 미리 가져온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가져온 청자 중에서도 가장 밋밋해 보이는 막사발이었다. 잠시 안경을 쓴 채 물건을 들여다본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이거 대체 어디서 구하셨소?”

“제 선친께서 가지고 계시던 물건입니다. 생신 때 동무분께 선물로 받았다지요.”

“쯧쯧. 진퉁인 줄 알고 오셨구만. 근데 어쩌나 이거 일본에서 만든 가품이라. 만든 지 백 년도 안 된 거요.”

“그럼 얼맙니까?”

“그게, 잘 쳐 봐야, 한 3,000환 정도랄까. 많이 치면 5,000환 정도지.”

선심을 쓰는 듯 수염을 쓰다듬는 남자의 말에 강태준은 내심 미심쩍음을 느꼈다.

“다른데 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뭐 둘러봐도 비슷할 테니, 헛걸음할 필요는 없을 텐데. 나중에 또 찾아오시구려.”

몇 군데를 돌아보았지만 매겨진 가격은 대동소이했다.

김복만이 다리가 아픈 듯이 주저앉았다.

“에휴, 다들 말이 똑같네요. 이거 정말로 짜가 아닙니까?”

“그럴 리가. 그런 거였으면 여기까지 올라올 일이 없었지.”

강하게 부정하는 강태준이었지만 좀처럼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로 가짜란 말인가.

고민이 깊어지는 그때, 저 구석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골동품 판매차 발품 파시는 거 같은데 그쪽 나다녀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사람들 다 한패예요. 거기서 눈탱이나 처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누구?”

슬며시 외곽에서 나타난 것은 꾀죄죄한 차림의 소년이었다. 다 찢어지고, 헌 옷에 거지처럼 행색이 남루한 것이 잘 먹지 못해 깡말랐지만, 소년의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그쪽 점주들은 애초에 제값 주고 물건 사는 인간들이 아니에요. 제대로 된 물건은 담합으로 후려치려고 일부러 가격을 형편없이 매기는 건데, 태반이 짜고 치는 고스톱에 놀아나죠. 그쪽 사람들 전형적으로 치는 수법입니다.”

“그럼 넌, 제대로 가격을 받을 만한 장소를 안다 이 말이냐?”

“물론이죠. 제가 이 시장에서 먹은 짬밥이 얼만데. 애초에 여기 있는 놈들은 죄다 사기꾼들입니다.”

“그럼 안내해 줄 수 있겠느냐?”

대답 대신 손바닥을 쭉 벌리는 소년에 강태준이 동전 하나를 던져 주었다.

액수를 확인한 소년이 고개를 찡그렸다.

“좀 적은데요.”

“나도 보험은 있어야지. 나머지 반은 제대로 안내하면 그때 주지.”

“흐음…….”

그 말에 강태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소년. 몇 초쯤 지났을까.

먼지 묻은 바지를 털던 소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약속한 겁니다. 아저씨. 저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에요.”

“남아일언 중천금. 애들 돈 떼먹을 정도로 못돼먹지 않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몸을 일으킨 소년이 향한 곳은 굽이굽이 진 골목길을 지나 미꾸라지처럼 움직였다.

점점 외진 곳으로 향하는 소년의 등을 보며 김복만이 불안한 듯 속삭였다.

“형님.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거 수상한데 저 자식 공사 치려는 거 아닐까요.”

“걱정 마라, 삐끼나 주먹패 따까리는 아닌 것 같다.”

애초에 그런 녀석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어렵게 접근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일행은 어둡고 칙칙했던 골목길로 들어갔다. 비좁고 삭막한 벽을 지나자 오래되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고택 하나가 나타났다.

“여깁니다.”

“보진당?”

“이 안부터는 둘이서 들어가시죠. 주인께서 절 별로 안 좋아하셔서요.”

나무판에 대충 휘갈긴 보진당이라는 간판이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어 있다. 앞을 지키는 관우상이 눈을 부릅뜬 채 창을 들고 있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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