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9화 (9/361)

9화 귀향

눈덩이를 맞고 쓰러진 박진환. 멱살을 잡아 일으킨 강태준이 다시 뺨을 갈겼다.

몇 대를 연거푸 얻어맞은 박진환이 엉덩방아를 찧자 다급해진 그가 손을 내저었다.

“그…… 그만! 그만하게.”

“왜요. 맷값 내긴 아깝고 내기로 돈 날리는 건 괜찮나? 갚아 준 돈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반인 거 같은데.”

“미…… 미안하이…….”

코피가 난 박진환이 사정하자 강태준이 주먹을 쥔 손을 풀고 노려보았다.

“기력도 안 되는 사람이 내기 바둑이라니 창피한 줄 아시구려. 이번엔 그쪽 마누라 때문에 살려 준 거니까.”

“마누라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사장님이 시키셔서 집까지 직접 찾아갔었소. 상태가 좋지 않던데 아픈 여자를 두고 헛짓거리라. 남자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임질 사람까지 있는 양반이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강태준의 훈계에 상대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인다.

한쪽 눈이 멍들고 코피가 터진 박진환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는 모습.

강태준이 손을 털며 훈계했다.

“암튼 내일부터 출근은 제대로 하시구려. 일이 밀렸는데 개인적인 감정으로 회사에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거.”

“이건…….”

아까 내기에서 딴 돈 가운데 빳빳한 지폐 몇 장이었다.

“보아하니 개털 된 거 같은데, 밥이라도 사 먹으소.”

“난 받을 자격이 없네.”

“댁한테 쓰라고 주는 게 아니요. 식대랑 남은 건 아픈 마누라한테 줄 과일이라도 사가라고. 쓸데없는 데 봉급 꼬라박지 말고.”

멍하니 뒷모습을 보는 박진환을 버려두고 강태준이 여인숙으로 향했다.

함께 가던 김복만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야. 아까는 좀 멋있었습니다. 형님.”

“그걸 이제 알았냐?”

“뭐 굼벵이도 나름 재주가 있네요. 형님. 공부보다는 잡기 쪽에 능…… 아아아아아!!”

귓바퀴를 잡은 강태준이 볼따구를 쭈욱 늘렸다.

“오냐. 아주 볼따구가 찹쌀떡 같은데 그래. 얼마나 처먹었으면 잡히는 게 다 살이네.”

“형. 그만…… 귀 뜯어져요. 귀!!”

다음날 복귀한 박진환은 판다처럼 변한 눈이었다. 그 꼴을 본 일부는 소리 나게 웃었지만, 최 사장이 눈을 부라리자 곧 입을 다물었다.

한심하다는 양 그를 돌아본 최 사장이 엄하게 물었다.

“무단결근이라. 이봐 진환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나?”

“아닙니다.”

“배려는 이번 한 번뿐일세. 이걸로 눈덩이나 문질러.”

날계란을 쥐여 주는 모습에 박진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최 사장은 그러면서도 달리 언질을 붙이지 않았다.

크게 혼쭐이 난 탓일까. 이후로 박진환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미친 듯이 일에만 집중했다.

버스사업 역시 순항했다. 출고 예약이 3개월 이상 밀릴 만큼 성황이었다. 강태준을 비롯한 정비공들은 밤낮없이 일했지만, 돈 버는 맛에 모두 힘든 줄 몰랐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고대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남북 간 휴전이 타결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남북한, 정전협정 타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드슨 중장과 북한 측 수석대표인 석일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협정 체결에는 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3년 1개월, 1129일 만의 일이다.

양측의 피해는 군인만 총 322만, 민간인 피해 249만, 이재민 수는 천만 명에 이르는 혈투였지만 끝나는 순간 남는 것은 종잇장 한 조각이었다.

몇 주 후, 유엔군 기지 내 문산극장에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브리스코 16개국 참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전협정 확인 서명을 했다.

“호외요. 호외!”

“휴전이랍니다. 이제 전쟁 끝났어요.”

사람들의 마음에도 안도감이 깃들었다.

모두 기나긴 전쟁에 지쳐있는 즈음 드디어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와 함께 강태준 쪽에서도 희소식이 당도했다.

“넙치 녀석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선박용 엔진이 준비되었답니다.”

“오, 정말?”

말한 곳으로 나가 보자 과연 선박용 엔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왔나? 저번에 말했던 70마력짜리 선외기일세. 4스트로크로 연비와 유지비용이 좋아.”

“연식은 얼마나 됩니까?”

“고작 3년밖에 안 쓴 물건이지. 마침 싸게 나왔어. 이거 구하느라 아주 X빠지는 줄 알았구먼.”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었지만 정성택은 약속을 지켰다.

20톤 이하의 작은 배에서는 엔진과 스크류를 한 몸체로 해 배 밖에 거는 것은 선외기 방식이 자주 쓰인다. 엔진을 살펴보던 강태준이 유심히 외관을 살폈다.

“보기엔 그럴듯한데 제대로 동작하는 거요?”

“날 뭘로 보고 분해, 정비까지 제대로 마친 거야. 뭣하면 시험해 봐도 좋고.”

“선박용 프로펠러는요?”

“여기 있어. 비행기용이야. 이번에 미군 쪽에서 폐기된 물건에서 쌔벼 왔지.”

강태준이 신중하게 엔진을 돌려 보자, 부릉 하며 엔진음이 났다.

기분 좋은 소리에 안심한 그가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기대 이상이군요.”

“근데 진짜 귀가하려는 건가?”

“네, 돈을 벌면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가족들이 걱정하실 거 같아 일단 귀환해야 할 거 같습니다.”

몇 번이나 대국하며 친분이 생긴 정성택은 그 말에 은근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자네가 가다니, 이제 부산 쪽 바둑 세계는 내 적수가 없겠구먼.”

“하하, 너무 뻔뻔하신 거 아닙니까?”

“근데 이제 나는 무슨 낙으로 살지? 맞수도 없이 심심한데 말이야.”

“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원래 하던 거 하시면 되지요.”

“그게 계속 바둑판을 키워야 하나 고민 중일세. 전쟁도 끝났으니 이렇게 노름판만 운영하며 살 수는 없지. 근데 딱히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니. 내가 잘하는 거라곤 고작해야 협잡질이랑 바둑밖에 없는데 말이야.”

“자신을 너무 비하하시는군요. 형님만큼 능력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강태준은 진심이었다.

바둑이 사업 수단으로 삼아 이렇게 벌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이제 양아치 짓은 좀 질렸다네. 하수들 상대로 싸우는 것도 시시하고. 뭔가 건설적인 일을 하고 싶더라고.”

묘하게 시무룩한 목소리. 강태준은 그 눈빛에서 갈망과 열정을 읽었다.

“차라리 바둑을 업 삼아 제대로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아마 따위가 아니라 진짜 프로에게 사사받는 것도 방법이고요.”

“프로라니, 그런 사람이 있나?”

“최근에 부산 동래에 조 선생께서 기원을 시작하셨다는데요. 일본서 단까지 따서 오신 분이니 그분께 직접 배워 보던가요.”

조 국수는 일본에서 귀국한 프로기사로 귀국 후 대성기원을 설립한 후, 국내 바둑 보급에 힘쓰고 있었다. 그 말에 정성택이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설마 나 같은 노름꾼 따위를 받아 주시겠나?”

“하하, 제가 누구한테 들은 말인데, 인생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기에도 짧은 법이랍니다. 후회할 때가 길을 바꾸기 가장 빠른 시기인 거죠.”

“명언이군. 그거.”

정성택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깨달은 듯 생기가 돌아온 눈동자에 열의가 엿보인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쇼. 형님. 어떻게 살지는 형님 선택입니다.”

화두를 던진 채 돌아오는 강태준. 사실 한국기원과 같이 협회 같은 조직을 운영하는 데는 정성택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세상에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조직을 운영하려면 정성택 같은 사람도 필요한 곳이 있지 않겠나? 무엇보다 바둑에 대한 열의는 진심인 만큼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전쟁도 끝났겠다. 이제 돌아가야지.’

대충 이곳 근처에서 필요한 자금도 구한 만큼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강태준이 사직서를 제출하자 최 사장이 그를 붙잡았다.

“아니, 사직이라니 이게 뭔 소린가?”

“하하. 전란도 끝났으니 돌아가야죠.”

“이대로 보내기는 아쉬운데, 허…… 돈이 적어서 그런가? 이참에 봉급도 두 배로 올려 줌세. 그래 직급은 주임이 어떻겠나?”

고작 몇 달 일한 사람치곤 꽤 파격적인 조건이다. 나무랄 데 없는 실력에 인성까지 탐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은 정중히 사양했다.

“높이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전쟁도 끝났으니 어머님은 제가 모셔야지요.”

“정말 가야 하는가? 여기로 모시고 오는 건.”

“어머니에겐 그곳이 고향이시니, 설득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최 사장의 눈빛은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쩔 수 없지. 혹시 나중에라도 여의치 않게 되면 다시 찾아오게. 자네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게 최 사장과 인사를 마친 후 강태준은 정비소에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동료들은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간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정이 많이 들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선 박진환이 쑥스러운 듯 무언가를 건넸다.

“이거…….”

“뭡니까?

“마누라가 챙겨 주더군. 고맙다고 말일세.”

손수 만든 장갑과 목도리다.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 눈을 마주 보지 못하던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곧 추워질 테니까. 마누라가 열심히 만든 거니 잘 쓰라고. 자네 덕분인가 요새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

“감사합니다. 박형도 몸조심하고 건강히 지내십시오.”

훈훈하게 인사를 마친 강태준이 밖으로 나서자, 륙색을 가득 채운 복만이 트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태준이 차량에 올라타자 복만이가 툴툴거렸다.

“형님, 솔직히 좀 아쉽군요. 그냥 거기서 계속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왜. 좀 아쉽냐.”

“좀 좋은 회사 같아서요. 사장님도 괜찮고, 저도 나름 기술 배울 기회도 있었는데 말이죠.”

“임마, 노가다로 차 몇 대 만들어 봐야 얼마나 된다고. 게다가 돈 벌어도 그게 다 내 돈인가? 사장 돈이지. 남 밑에서 시다질 해 봐야 답 없어.”

‘무엇보다 자동차 쪽은 정치권이 중간에 개입할 여지가 너무 커.’

실제로 카발은 이후 10년 동안 고작 3,000대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다는 데서 한계가 너무 명확한 기업이었다. 이런 부분을 커버하려면 결국 자기가 직접 영업을 뛰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사업을 일으켜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리스크를 지기엔 주저해지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미래 지식을 잘 아는 그로서는 고작 정비공 정도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자 전쟁이 끝났으니 운송업이 뜰 거야. 앞으로 필요한 건 인프라 확충이지. 도로를 놓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당분간은 뱃길을 대체할 물건은 없어. 게다가 목포와 무안 쪽은 수요가 많지 않겠나. 그래도 전남에서 물류의 중심지로 통하는 동네니 말이야.”

“하긴 그렇긴 하구만요. 일단 엔진값은 벌었느니 빨리 사업부터 벌이는 것이 더 낫겠네요.”

“그래. 대신 바둑으로 노름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라.”

신신당부를 마친 강태준은 다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여수로 귀가했다.

당시 교통으로 여수에서 무안까지 만 이틀 거리.

무안에 도착한 직후, 일행은 마침내 외삼촌 댁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무안은 예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미리 편지를 부쳐서일까. 이미 마당 앞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뾰로통한 표정의 외숙모 옆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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