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내기 바둑
“자넨 누군가?”
“회사 동료입니다. 그거 합의된 사안입니까? 저쪽은 아닌 것 같은데.”
“이번 한 번 문제가 아니야. 저 인간 여기서 진 빚이 한두 푼이 아니거든. 외상도 한 바가지지.”
“그럼 그 돈은 나중에 받아 내시죠.”
“뭐라고?”
김빠진 소리를 내는 상대에 강태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돈을 갚으려면 일을 해야지 않습니까? 무단결근을 3일이나 했으니, 그쪽도 돈 받으려면 이 사람을 보내 줘야 할 게 아닙니까?”
“허 이거 보게 맹랑한 소릴.”
돌을 만지작거리던 정성택이 흥미가 생겼다는 듯 강태준을 바라보았다.
강태준이 눈을 피하지 않자, 너털웃음을 한번 터트린 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좋아.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그냥 보내 드릴 수야 없지, 여긴 특별 대국실이라 들어올 때 입장료를 내야 하는 법이거든.”
“들어올 때, 그런 말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내 맘일세. 여긴 내 나와바리야. 게다가 대국을 봤으면 관람료는 내고 가야 할 것 아닌가?”
“허…… 기적의 논리로군. 그래서 얼마요?”
“일천 환만 내시게.”
“하수들끼리 나눈 대국치곤 관람료가 너무 비싼데? 본인이 프로급인 줄 아시나?”
“뭐라고?”
정성택이 확 인상을 쓰자, 부하들 역시 인상이 험악해진다.
김복만이 슬슬 뒷걸음질 치며 다급히 속삭였다.
“형님, 이 숫자는 저도 힘든데요.”
“누가 너보고 싸우라고 했나? 일단 인상만 쓰고 있어.”
하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차분함을 유지했다.
선상에서 칼부림까지 경험해 봤던 그 입장에서 이런 사소한 위협은 웃기지도 않을 수준이었다.
“지금 당신들 날 협박하는 건가?”
“설마, 나는 그 정도 양아치는 아닐세. 다만 여기 들어온 이상 대국을 하는 게 원칙이지. 그리고 나는 원칙을 어겨 본 적이 없어.”
“걸 만한 돈이 없다면?”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면 되지 않나. 뭐 나한테 지면 내 밑에서 3달 정도만 일하면 되네. 어떤가? 아주 합리적인 조건 아닌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투가 온화했지만, 행동부터 강압적이기 짝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빠져나갈 구멍이 달리 없다.
“머리 굴리지 말게. 아무래도 경찰 같은 건 죽어도 안 올 테니 기대하지도 말고. 그렇게 실력이 대단하면 한 수 가르쳐 주고 가지 그래?”
강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피곤하게시리.
결국 실력을 보이는 게 답인가. 분위기가 일변한 강태준이 눈을 치켜떴다.
“좋소. 그럼 한 판만 두면 되나?”
“물론. 한 번은 그냥 두는 걸로 하지. 자네가 이기면 그냥 보내 주겠네.”
“점당 일천 환 맞나?”
“그래. 겁나나?”
“아니, 그럼 쓸데없이 변죽 치지 말고 바로 시작하지. 그래.”
강태준은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사실 강태준은 사실 바둑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다.
한때는 바둑에 미쳐 기원 연구생까지 해 봤을 정도니까.
뱃놈이 망망대해에서 딱히 즐길 게 뭐 있겠는가.
바둑 고수라고 불릴 만큼 꽤 잔뼈가 굵은 몸.
돌을 잡는 모습에 넙치의 눈빛에 흥미가 돌았다.
“호오, 이거 초보는 아니구만.”
“접바둑 정도는 심심풀이로 두곤 했지요. 상대는 누굽니까 난 아무라도 상관없지만.”
그러자 정성택의 오른편에 있던 턱수염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굳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이유 있겠습니까?”
빼빼 마른 몸에 머리에 기름을 바른 것이 느끼해 보인다.
먼저 백을 쥔 강태준이 선수를 양보했다.
“자신 있나 보군. 선수 양보라.”
“뭐 대충 보면 견적이 나오거든. 그쪽이 내 상대는 안 될 거 같아서.”
“허, 그 여유가 얼마나 갈지는 두고 봅시다.”
자존심이 상한 상대는 꼭 이기겠다는 표정이다.
첫수는 우상귀 소목에 좌상귀 화점.
‘날일 자 받음이군.’
화점정석 가운데 제일 기초적인 걸침 방식.
설마 우변으로 협공하려는 건가.
정석대로 계속되는 공방이 계속되던 중 상대가 흑을 붙여 세웠다.
전형적인 공격에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호구로 보는군.’
상변 화점으로 벌릴 것인가? 날일 자를 달릴 것인가.
아니다. 싸움을 피하면 재미없지 않나?
삼삼에 뛰어들어 응수하자 상대의 눈빛이 이내 달라졌다.
강태준은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집을 확보하며 우위를 확보해 나갔다. 맞보기가 되기 전 백으로 보강으로 하자 우하귀에서 반격을 가하는 상대.
한때는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강태준이 중앙에서 굳건하게 버티자 밀리는 흑. 중반 확실히 우세를 잡았다.
좌충우돌하던 흑은 금세 백의 기력에 봉쇄되어 버렸다.
화점 선착을 했음에도 백의 세력이 더 커져 버린 것이다.
채 90수도 되지 않아 분위기는 완전히 일변했다.
완패한 상대가 돌을 손에 쥐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입장료는 낸 거요.”
“좋아. 멋진 경기였네. 입만 산 병신은 아니군.”
“그럼 한 번 더 하지, 설마 그냥 갈 셈인가?”
다음 상대가 지폐 한 뭉치를 내보이며 도발하자 강태준은 피식 웃으며 다시 앉았다.
그러나 그다음 상대도 5집 반 차로 깨 버리자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누가 봐도 갖고 논 것 같은 포석.
아마 최강이었던 그와 동네 고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던 것이다.
“잘 놀았소. 이건 목욕비로 쓰시고.”
쌈짓돈을 챙긴 강태준이 일어서자, 정성택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 이제 보니 기력이 보통 분이 아니셨구먼.”
“내가 기력이 높은 게 아니라. 이쪽 실력이 비루한 게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럼 마지막으로 한 판 더 두지. 이대로 가기엔 좀 아쉽지 않나? 인질도 있고 말이야.”
슬슬 꼬시는 정성택의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소. 난 도박은 길게 안 하는 성미라서.”
“호오, 그럼 저 인간을 그냥 버려두고 갈 건가? 자네가 이기면 저놈이 진 빚을 탕감해 주지.”
“그건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요. 아닌 말로 내가 책임질 사안은 아니지…… 박진환 저 사람은 나랑은 단지 직장 동료일 뿐이니까?”
“냉정하구만. 아까는 오지랖 좀 부리는 것 같더니.”
“멱살 잡히니 수지맞는 장사는 아닌 거 같아서.”
“그럼 수지가 맞을 경우엔 생각이 달라지겠군. 뭘 원하나? 원하는 걸 들어 주지.”
강태준은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내친 김이니 솔직해지는 것도 좋겠지.
“난 선박용으로 쓸 디젤 엔진이 필요하네. 애초에 그걸 구하러 왔고.”
“선박용 엔진?”
“미쓰비시에서 만든 엔진을 구해 준다면 대국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최소 70마력짜리.”
“허, 특이한 걸 원하는군. 이유가 뭔가.”
“사업상 필요해서.”
“무슨 사업?”
“그 이상은 비밀이요. 그쪽에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야 없지 않소이까?”
정성택은 잠시 망설였다. 일제 선박용 엔진이라면 가격이 상당한 물건 과연 이 대국료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호기를 부리는 상대의 기력이 어디 까진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이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원래 신중한 정성택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그래. 이런 애송이쯤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자네가 지면 자넨 1년간 내 졸개하는 걸세.”
“1년? 그건 너무 긴데.”
“맞아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괜히 쓸데없이 욕보지 말고 형님 이만 가십시다.”
“아니 기다려 봐.”
복만이마저 말도 안 된다며 물러나자 종용했다. 그러나 강태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기력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덤비는 건 조금 문제지만 아까 본 대국 수준으로 보건대 아마 중에서 꽤 잘 두는 편이긴 해도 절대 프로급은 아니라는 계산이 섰다,
실제로 강태준은 아마 전적에서 거의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 볼 만도 하지 않을까?
“좋아. 대신 한 가지 더 요구하겠소.”
“무슨 요구인가?”
“덤으로 저 인간 빚도 탕감해 주시지. 이왕 크게 걸 거 화끈하게 쏘라는 말이요. 나도 나름 그쪽 머슴될 각오 정도는 하는 셈이니.”
“좋아 그렇게 하지. 방식은?”
“호선으로 합시다.”
강태준이 백, 넙치가 흑을 잡았다.
상대는 시작부터 양 소목 포석을 펼치며 실리 작전을 구사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는 동안, 사람들이 경기를 관전했다.
어느새 관심에서 벗어난 박진환은 불안한 모습으로 바둑판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잘못하면 망신당하겠는데…….’
강태준은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미래의 정석을 꿰고 있는 강태준이었지만 상대의 기력이 생각 이상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치열한 대치가 80수가 넘게 이어졌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덜그럭거리는 소리밖에 들지 않을 지경.
초조해진 강태준이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거슬리는 소리에 옆을 흘깃 보자, 사촌 동생인 복만이가 주먹을 꼭 쥔 채 땀까지 흘리며 바둑판을 주시하는 중이 아닌가.
‘아니,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놈이…… 뭐 하는 짓거리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제 일도 아닌데 저렇게 조마조마한 꼴이라니.
저승 문턱까지 가 봤던 강태준은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바둑 한판 정도에 마음 졸이는 것이 너무 우습게 여겨졌다.
‘그래, 까짓것 지면 어때?’
피식. 욕심을 내려놓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기보가 펼쳐지는 듯 바둑을 두는 손이 빨라졌다.
그 순간, 멈칫하던 상대의 손이 생각지도 못한 곳을 향했다.
좌상귀에 가일수를 하지 않고 하변으로 돌린 것이다.
수에 의문점을 느끼기도 잠시 강태준은 깨달았다.
애써 당혹감을 감추려 애썼지만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명백한 패착이었다.
본인도 뒤늦게야 그걸 깨달았는지 부르르 떨리는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건, 기회다.’
강태준은 곧바로 공세로 전환했다.
한 칸 벌린 백으로 흑을 연이어 하변의 흑대마를 잡아 버린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성택도 분전했지만 기울어진 형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계가 결과, 반면 4집 차이로 백의 승리였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의외의 결과를 본 모인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넙치 형님이 이렇게 지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정성택이 패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깨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정성택은 내기 바둑에 있어서는 상대를 찾기 힘든 고수였던 것이다.
처참한 패배에 망연자실한 상대를 두고 강태준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더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승복하십니까?”
“그래 내가 졌소.”
홍시처럼 시뻘겋게 변한 것이 자존심이 상한 모습. 양쪽 뺨 위로 슬며시 홍조가 번지자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좋소. 남자답게 거래했으니, 난 이만 가겠소. 물건이 준비되면 말씀하시구려.”
강태준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시선을 내리깐 상대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바둑판만 주시하는 정성택.
문을 지키던 떡대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패배한 그가 쉰 듯한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임마, 구질구질하게, 어서 열어 드려라.”
나가려는 순간, 넙치가 강태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한 가지만 여쭤보겠소. 그 바둑은 어디서 배운 거요?”
“뭐 별거 있겠나. 일본 기성전과 명인들 기보를 보면서 독학했소.”
기원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긴 했지만 입단까진 못 갔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말에 멍 때리고 있는 상대를 내버려 두고, 짤막한 답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탁 트인 밤하늘에 공기가 아주 맑았다.
“정말 고맙네. 면목 없어.”
면목 없는 듯 고개를 숙이는 박진환.
꼴에 부끄러움은 아는지 얼굴빛이 새빨개져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태준은 박진환에게 대답 대신 가타부타 안면 한복판에 주먹을 한 대 꽂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