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6화 (6/361)

6화 폐차 개조

땅땅땅!

출근한 지 몇 주 뒤 아침부터 망치 소리가 경쾌하다.

카발 정비소에는 낮과 밤의 구별이 없었다.

전시다 보니 일감은 넘쳐나는 중.

1.4 후퇴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었고 정비소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전쟁이란 룰이 정해진 스포츠가 아닌 만큼, 정부에서 일감을 따려면 어떻게든 새벽부터 나와 하루 종일 현장 일을 보고 교대해서 작업장을 지켜야 했던 것.

덕분에 회사는 상시 전시동원령 상태나 마찬가지.

영업직인 최대길 이사가 일거리를 한 아름 가져오면 실무를 맡은 최창렬 사장과 오기윤 공장장은 종업원들과 함께 기한을 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그렇게 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쌓이기 시작하자 사장은 아예 공장 한편에 잠자리를 마련해 두고 숙식을 해결했다.

시다가 녹슨 부속품을 휘발유로 닦는 동안. 일선 정비공들은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드리며 드럼통을 일자로 편다. 어지간한 체력 없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막일이었지만 이런 비상시에 일감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만도 행복하다,

그래서 카발의 직원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온몸이 근육통으로 난리도 아니었지만 일이란 건 할수록 익숙해지는 법. 강태준이 쳇바퀴 같은 일상에 익숙해질 즈음, 큰 손님이 정비소를 방문했다.

멋들어진 양장을 차려입은 귀부인이 크라이슬러 차량에서 사뿐사뿐 내렸다.

챙 넓은 모자에, 벨벳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낸 그녀에 영업을 맡은 김 부장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이구, 사모님 또 오셨어요.”

박원숙이라 불리는 여인은 미군 소령의 후처로 들어온 사람으로 요정 일을 하다 운수대통한 케이스였다. 입신출세한 박원숙은 그간의 인맥을 이용해 군수 쪽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수완이 좋아서 유통업 쪽으로도 알음알음 관여하고 있었다.

당연히 군용트럭 수리를 주업으로 삼는 업자 입장에서는 큰 손.

하지만 그녀가 찾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강 기사 어딨어요?”

“예, 여기 있습니다.”

땀투성이에 기름밥이 묻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외모를 가릴 수 없다. 도리어 그런 점이 퇴폐미를 자극했는지, 강태준을 본 귀부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오, 강 기사. 여전히 훤칠하네.”

“사모님, 간만에 뵙는군요. 이번에는 뭐가 망가졌습니까?”

“이놈이 가다 자꾸 퍼지지 뭐겠어. 아주 속상해 죽겠어.”

“어디 한번 볼까요?”

박 여사가 응접실에서 한가로이 차를 대접받는 동안, 엔진을 손보던 강태준이 손을 털고 나왔다.

“벌써 끝났어?”

“엔진오일이 교환한 지 오래되어 말랐더군요. 플러그랑 전선도 교체했고 부동액도 꽉 채웠습니다. 혹시 같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오십쇼. 제가 공짜로 봐 드리겠습니다.”

강태준이 눈을 찡긋하자 사모님의 얼굴에 홍조가 띠었다.

새색시처럼 발그레해진 얼굴의 박 여사가 100환짜리 지폐를 꺼냈다.

“고마워. 강 기사, 여기는 팁이야.”

“괜찮습니다. 이런 것까진.”

“받아 둬.”

억지로 떠넘기듯 용돈을 안긴 사모님이 윙크를 하고 떠나가자, 정비공들이 수군거렸다.

“저, 요망한 것. 남자 홀리는 재주가 있다니까.”

“사모님들이 태준이 녀석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구먼. 무슨 매력이 있나 원.”

“그러게. 뺀질나게 들이미는 게 저놈 얼굴 보러 오는 건지. 차 보러 오는 건지 모르겠군.”

“암튼 복덩이가 들어왔어. 박진환이 임자 만났지.”

“거참. 사람들 하고는, 사람이 천박하게 얼굴로 일하나, 손으로 일하지.”

퉁명스럽게 말을 하는 박진환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시비야. 싹퉁머리 없이.”

“저, 저 또 삐졌구먼. 저 인간.”

그 말에 복만이가 물었다.

“삐지다니 갑자기 왜요? 딱히 형님이 잘못한 게 없지 않습니까?”

“왜긴 왜야. 자기가 접대할 양색시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니, 그게 열 받는 거지.”

취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강태준은 정비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뛰어난 정비 실력에 수려한 외모, 화려한 말빨까지.

부산의 사모님들로부터 인기가 폭발이었던 것.

그전까지 양색시 접대를 독식했던 박진환으로서는 무척이나 떨떠름할 수밖에 없는 것.

무엇보다 부수입이라고 할 수 있는 팁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뼈아픈 일이었다.

그걸 아는 동료들이 놀려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은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

“하이구야. 제가 어딜 감히. 박 주임님께 비비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어. 자네 실력이야 인정이니. 진환이 저 녀석도 정신 차려야지.”

“맞아. 삐지도록 냅 둬, 또 한바탕 가서 바둑이나 두고 오겠지.”

평소 팁과 보너스를 독식하면서도 동료들에게 영 인색하던 녀석이라서인지 깨소금이라는 반응이 대다수.

덕분에 수리소에서 강태준을 싫어하기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한참을 작업하던 중, 머리에 수건을 두른 복만이가 한가득 간식 한 상을 내왔다.

“자자! 다들 새참 하시죠. 시장하실 텐데.”

“오, 그래? 오늘 메뉴는 뭔가?”

“꼼장어입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바로 갖고 온 싱싱한 놈입니다요.”

석쇠 위에 놓인 꼼장어가 다닥다닥 익어가는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까닥 넘어갔다.

벌겋게 양념한 꼼장어를 화덕 위에 구운 것은 별미 중의 별미. 사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꼼장어는 주로 가죽을 얻기 위한 용도 외에 식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껍질을 벗긴 나머지가 구이 재료로 선택된 것.

값싸고 감칠맛 나는 꼼장어는 부산 사람들에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안줏거리였다.

안주 삼아 들이켠 소주 한 잔에 행복해하는 정비공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크아. 이 맛이지. 역시 우리 복만이가 요리를 잘해. 어디서 배웠나?”

“저기 자갈치 시장에서 배웠지요. 거기서 살구치기 아줌마가 가르쳐 주신 팁이에요.”

“진짜, 그 아줌니 겁나 깐깐한데, 능력도 좋구먼. 물건이 실해서 그런가?”

“하이구야. 무슨 망측한 말씀을…….”

“암튼 복만이 자넨 장사해도 잘하겠구먼. 태준이 자네도 한잔할 텐가?”

“사양하지 않지요.”

강태준은 고민 없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알콜 도수가 높아 더 쓰게 느껴졌다.

“남자답게 잘 받는구먼. 나도 자네만 한 동생이 있었는데, 컸으면 자네 또래쯤 됐겠군. 가끔 동생 생각이 나네.”

“동생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몰라, 원산에서 헤어지고 거의 3년이니, 살아있다면 어딘가에 잘살고 있겠지. 아니면 죽었을지도.”

판금부 오반장의 눈빛에 짙은 그리움이 스쳤다. 그 말에 동조하듯 약간 침울해진 사람들. 다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참화로 이산가족이 된 경우가 많아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숙연해진 사람들을 앞에 두고 강태준이 중얼거렸다.

“전쟁이란 게 참 야속하네요. 휴전 협상은 거의 끝난 걸로 아는데 대체 전쟁이 언제 끝나는 건지 모르겠군요.”

“땅 한 뼘 얻자고 치열하게 싸우는 꼴이라니. 애꿎은 젊은이들 목숨만 아깝지.”

“거 빨갱이들도 계속 버티지는 못할 테니, 곧 끝나지 않겠나? 지금 중공이랑 협상 중이라는데.”

이미 주요 전선에서는 주도권 쟁탈을 위한 국지전이 반복되고 있는 중. 피의 능선 고지부터 고양대 백마고지에 이르기까지, 고지 쟁탈전이 반복되는 동안 수많은 청년이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 속에서 엄청난 인명과 비용의 손실이 초래되는 상황. 가장 안전하다는 부산이었지만 모두가 그런 치열함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지금 양측이 협정 발표일을 조율 중이라는데.”

“전쟁이 끝나면 이 호황은 어떻게 될는지. 지금이야 물량이 많이 나오지만 평시에도 그럴깝쇼?”

“걱정 말게. 지금보단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겠나? 전시처럼 물가가 춤을 추진 않을 것 아냐.”

“그래도 걱정이 되네요. 전쟁이 끝나면 군수 지프나 트럭이 무한정 나오지는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 자작하던 최 이사가 강태준에 물었다.

“그건 그렇겠군. 태준이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앞으로 전쟁이 끝나면?”

“산업 기반이 모두 파괴되었으니 산업시설이랑 주택 재건이 우선이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재나 승객 운반이 필수일 테니, 운송업 분야가 급성장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버스 수요가 크게 늘지 않을까 하네요.”

최 이사가 꺼끌한 턱을 쓰다듬었다.

“버스라…… 버스 제작이 수요가 있을까?”

“예. 저는 외지 출신이라 여기 오면서도 사실 불편했거든요. 아무래도 배는 멀미도 심한 데다 운항이 자유롭지 못하죠. 12시간씩 타고 올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하긴 그건 그래. 그렇다면 답은 운수용 버스인가?”

“운수용으로 쓸 것보다는 아무래도 여객용이 좋겠죠. 30인승 버스 같은 걸 만들면 잘 팔릴 거 같은데요”

“30인용이라. 규모가 있군. 자재 수급은 제작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자재라 버스를 만들 프레임은 기차 레일을 잘라 용접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펴서 만들면 되지요. 대형 버스회사를 차리면 수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엔진은 미군이 불하한 GMC 트럭으로 쓰면 되죠.”

“GMC말인가?”

“네. 출력 60마력에 2,200CC L-헤드 4기통 아닙니까. 이 정도면 버스 운행용으로는 씹어 먹고도 남는 성능이죠. 더욱이 지프 차량은 애초부터 뼈대가 되는 프레임 위에 차체가 올라가 있는 구조라 차고가 높아 버스로 쓰기는 안성맞춤이고요. 좌석을 양 벽면에 쭈욱 설치하면 입식 버스가 되는데 적어도 3주에 한 대씩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솔깃한데?”

당시까지 한국 내에 모든 차를 합치더라고도 15,000대 수준이 전부. 수작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긴 할 테지만, 노가다할 인력이야 사방에 널렸으니 사업성은 충분하다. 결국 해 볼 만하다 생각한 최창렬 사장이 결심을 굳혔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럼 한번 만들어 보지 뭐.”

결정을 내렸으면 행동은 신속할수록 좋다. 카발에서는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군용 고물 트럭을 재활용해 버스 개조 작업을 시작한 것.

일단 첫 단계로 김복만을 비롯해 허드렛일을 하는 잡역부들은 폐차에서 분해한 부품을 휘발유에 세척하는 작업을 하거나 폐드럼통 세척작업을 맡았다.

“자 조심해. 안에 이물질 없이 깨끗하게 비우라고, 잘못되면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인화성 물질들이 담겼던 드럼통이라면 절단 과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한다. 기름을 다 빼냈다고 하더라도 드럼통 내부에는 폭발성이 높은 유증기가 차 있는 만큼. 산소절단기나 그라인더를 댔다가는 드럼통 내의 유증기가 열기를 받아 폭발하는 참사를 초래하기 때문.

깡깡!!

정비공들이 드럼통을 두드려 펴는 가운데, 강태준은 이음부를 깎고 용접해 마감하는 일을 했다. 그사이 남은 정비공들은 폐기되어 나온 지프나 트럭의 부품들을 재생하는 작업을 도왔다.

이들이 하는 일은 드럼통을 일일이 두드려 펴서 차체를 만든 다음 뒷 화물칸을 승객실로 변형하는 작업.

그 뒤에 철판에 퍼티를 도포 후 건조한 다음 페이퍼로 표면을 다듬고 도료를 발라 외관을 칠하니 그럴싸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각자 파트 별로 진행되는 일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정신없이 일을 하던 강태준은 어느덧 눈에 거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지막 점검차 도어 단차를 맞추는 과정에서 박진환이 승합 문을 사정없이 걷어차는 장면을 본 것.

단차를 맞추기 위해 차를 발로 찬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노릇.

처음에는 애써 무시했지만 신경이 거슬리는 소음이 계속되자 강태준은 참을 수 없었다

“박 주임님, 뭔 일을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안 보여? 단차 맞추는 중이잖아.”

“굳이 그걸 발로 찰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 도어 캐처를 보면 발로 찬 쪽 부분에 스크레치가 나 있어요. 단차는 힌지를 조정해 맞추는 거지 발로 차서 맞추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뭘 그리 까다롭게 굴고 그래, 수작업이라 단차를 잡을 때는 원래 꺾고 밟고 하는 게 기본 아닌가.”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는 듯 당당한 반응에 기가 찬 강태준이 곧바로 반박했다.

“잘못 조립이 된 걸 발로 차면 문에 추가적인 변형이 생깁니다. 정 뭣하면 여기 프레스기도 있는데 그걸 쓰면 되지 않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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