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어떻게 진정은 좀 되셨습니까?”
에탄의 물음에 베네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쥐어 잡았다.
후루룩.
이어서 거침없이 입안에 들이키고는 잔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 보다 차의 맛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데이른 공작님이 특별한 재료를 구해와서 만들어낸 차입니다. 무려 공작님이 타 주신 차니까 맛나게 드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푸흡!”
하지만 이어지는 에탄의 말에 베네시슨은 자신도 모르게 차를 뿜어내고 말았다.
평범한 사람이 타준 차도 아니고, 북부에 이름 있는 공작이 만들어준 차라니.
그리고 그걸 자신이 마시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경악한 거였다.
“맛이 없습니까?”
에탄이 차를 뿜은 그녀를 보고는 두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자신의 앞에 있는 차를 들이켰다.
“으음. 맛은 괜찮은 거 같은데.”
달짝지근한 차의 향기가 에탄의 코를 행복하게 해줬다. 거기에 따뜻한 차 덕분에 몸까지 포근해지는 느낌이 들었으니.
에탄은 이 차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했다.
“아니… 맛이 없는 건 아닌데요.”
이런 에탄의 모습에 베네시슨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차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이 차를 만든 사람이 공작이라는 것이다.
“공작님에게 이런 걸 시켜도 되는 거예요?”
“예?”
“그게… 공작님은 작위가 높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차를 만들어서 내주어도 되나 싶어서요.”
“아아.”
에탄이 베네시슨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게 일상이라서요.”
그리고 덤덤하게 뒷말을 붙였다.
“일상….”
물론 듣는 입장인 베네시슨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게 일상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고 여겼다.
‘이 사람은 능력이 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에탄이, 아무런 재주도 없이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잠깐. 그러면 방금전에 들어온 덩치 큰 남자분이 설마.”
“예. 데이른 공작님입니다.”
“…….”
베네시슨이 에탄의 대답에 꿀먹은 벙어리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집사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너무나 다부졌다.
거기다가 상당한 기세까지 느껴졌기에 평범한 집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공작일 줄이야.
“허어.”
하필 공작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고 말았으니. 이번 거래를 거절할 수도 없게 됐다.
“이걸 다 노리신 거죠?”
베네시슨이 에탄을 찌릿하고 쳐다봤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뭐…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에탄이 그녀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은 데이른 공작님의 자택입니다. 왠지 모르고 계실 거 같아서 지금 말해 드립니다.”
그리고 덤덤하게 뒷말을 이었다.
“…….”
하지만 이번에도 베네시슨은 에탄의 말을 그냥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여기가 데이른 공작의 자택이라니.
게다가 자택 주인인 데이른 공작이 자신에게 차를 따라주고 갔다니.
그 모든 사실에 베네시슨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망치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빙빙 돌아가는 건 덤이었다.
“괜찮습니다. 제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요?”
“예. 다만 베네시슨 님을 견제하는 길드가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군요. 그 길드도 베네시슨 님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죠.”
“흐음.”
베네시슨이 에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에탄의 말을 협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협박을 할 작정이었다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쟁 길드한테 팔아넘기겠지.’
지금 같은 경우에는 에탄은 베네시슨이 걱정돼서 지켜주는 거라고 보는 게 맞으리라.
이곳에서 자신을 건들 만큼 상대 길드가 간이 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은 하시겠습니까?”
그때. 에탄이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계약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둔 계약서를 탁자에 올렸다.
쓰윽.
베네시슨이 그걸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선입금으로 50골드.
그리고 경제에 관해서는 5대5의 비율을 가지게 해주겠다는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 계약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뭘 믿고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을 주시는 거죠?”
베네시슨이 그걸 보고는 조심스럽게 에탄에게 물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당연한 거였다.
그녀는 미래에 자신이 상인 길드의 거장으로 거듭나는 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 에탄이 제안하는 것에 영문 모를 만도 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에탄이 그런 베네시슨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미래에서 왔는데 당신은 대박이 나요. 라고 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베네시슨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훤히 보이니 말이다.
“감입니다.”
그래서 에탄은 베네시슨에게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감 때문이라고 말이다.
“…감이요?”
“예.”
“무슨 감이죠?”
“당신에게서 대상인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제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서 말이죠.”
에탄의 말에 베네시슨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 이상의 말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그거입니다. 베네시슨 님에게 지금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는 것.”
에탄이 그런 그녀를 향해서 50골드를 턱. 하고 꺼내버렸기 때문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골드 덩어리가 베네시슨의 눈길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꿀꺽.
베네시슨이 그걸 보고는 침을 삼켰다.
“할게요.”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역시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는 없었다.
* * *
그렇게 베네시슨은 에탄과 공식적인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오늘부터 사용하실 방입니다.”
그리고 데이른 공작가의 저택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도 됐다.
“우아….”
베네시슨이 자신이 지정받은 방의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넓은 침대는 물론이고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는 장식물까지.
어지간한 귀빈이 머무는 장소 못지않는 대접이었다.
“제가 여기서 머문다고요?”
베네시슨은 그 사실이 너무나 믿기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길바닥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사람이었다.
한데. 에탄이 이렇게까지 대접을 해주니 어안이 벙벙할 만도 했다.
“같은 사업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 좋은 대접을 받게 할 수는 없죠. 그러면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 뻔하니까요.”
“으음.”
“원래 사업은 내부부터 잘 보여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탄의 말에 베네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윽.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어서 푹신한 침대를 손으로 만져봤다.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정도로 푹신푹신한 침대가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우아….”
베네시슨이 그런 침대의 감촉을 느끼고는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정말로 내가 살 곳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군요.”
그때. 에탄이 침대를 이리저리 찔러보는 베네시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베네시슨 님을 귀찮게 하던 상대 길드 처리도 조만간 끝날 거 같습니다.”
“…네?”
“제가 입 무겁고 힘 좋은 사람들을 꾸려서 보냈습니다. 보복도 생각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지우라고 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베네시슨에게 예외였던 말이었다.
“벌써요?”
아직 계약을 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상대 길드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고 하니.
베네시슨의 입장에서는 놀랄 만도 했다.
“원래 이런 건 빨리빨리 처리해서 후환을 제거해야 합니다. 베네시슨님도 그 녀석들이 망하는 걸 빨리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로 인해 사업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에탄의 대답에 베네시슨이 덜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탄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 좋던 미소를 짓던 그였다.
하지만 상대 길드를 제거한다고 했을 때 보였던 눈빛은 흡사 맹수의 눈빛과 같았다.
‘무서운 사람이다.’
베네시슨은 그걸 통해서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에탄이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 * *
그렇게 에탄은 베네시슨과의 대화를 끝내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 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데이른 공작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네 녀석의 말대로 놈들은 잘 처리했다.”
“감사합니다.”
데이른 공작의 말에 에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에서 직접 손처리를 해준 덕분에 에탄이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없었다.
에탄은 그저 데이른 공작에게 놈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주라는 부탁을 한 게 끝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저 여자한테 북부의 사업을 믿고 맡겨도 되는 것이냐?”
그때. 데이른 공작이 에탄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걸어왔다. 그의 눈에 베네시슨은 쫄딱 망해버린 상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자에게 북부의 경제권을 맡긴다고 하니, 데이른 공작의 입장에서는 불안함이 들 만도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탄이 그런 데이른 공작의 물음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탁.
그리고 책상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신상 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였다.
“이 여자의 감각은 상당히 뛰어나니까요.”
에탄이 그 서류를 보면서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