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칠흑 같은 어둠이 에탄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철퍽… 철퍽.
그리고 바닥에는 발목까지 올 정도로 물이 고여 있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에탄은 물이 차갑거나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꼭 자신의 몸에 있는 모든 감각이 사라진 것과 같았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힘도 사용되지 않고.’
혹시 싶어 검을 빼 들고 달빛의 힘을 이용해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 까지는 무리가 없지만, 힘은 모두 빼앗긴 상태였기에.
탁… 탁.
에탄은 앞으로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 에탄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으니까.
탁.
그렇게 정처 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다 보니.
“…빛?”
어느 순간 에탄의 시야에 작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그런데 그 빛은 뜨거움이 아닌 따듯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에탄이 그걸 느끼고는 천천히 빛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근원지에 도달하는 순간.
-우우웅!
에탄이 입고 있는 아서왕의 갑옷에서 힘찬 울림이 울려 퍼졌다.
파파팍!
동시에 갑옷이 완전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하나. 에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갑옷과 저 빛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흐음…….”
그래서 갑옷이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았다. 대신 갑옷을 흡수하는 빛을 빤히 쳐다봤다.
[그대는…처음 보는 얼굴이군.]
그리고 아서왕의 갑옷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순간, 빛에서 근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후손이 아닌 것인가?]
그리고 에탄은 남자가 하는 말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금방 유추해낼 수 있었다.
“기사들의 왕 아서 님을 뵙습니다.”
터억!
에탄이 아서왕의 말에 예의를 다하며 답했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는.
“저는 북부에 있는 칼라사르 가문의 막내아들 에탄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
[북부? 그 먼 곳에 있는 외방인이 어떻게 내 갑옷을 손에 얻을 수 있었던 거지?]
아서왕이 그 말을 듣고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빛의 현상을 하고 있기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에탄은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꽤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짧게 이야기를 하자면 아서왕 님의 갑옷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내 유품을 몰라보는 때가 왔다고?]
“예. 하지만 저는 아서왕 님의 갑옷을 알아보는 게 가능했기에. 어느 가문에 있는 창고에서 갑옷을 빼내왔습니다.”
[흐음…]
아서왕이 에탄의 말에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 자신의 갑옷이 그런 식으로 방치되는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서왕 님의 무덤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러지 못했다면 그대와 내가 이렇게 만나지도 못했겠지.]
-파앗…
에탄의 말에 아서왕이 빛을 일렁거리면서 답했다.
[그래. 나를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고작 대화를 하려고 죽은 나를 보는 건 아닐 테고.]
그리고 에탄에게 목적을 물었다.
“아서왕 님의 갑옷. 그 안에 있는 숨겨져 있는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 힘을?]
“예. 미리 말씀드리자면 단순히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지?]
“다가오는 마족의 침공…놈들을 죽이고 대륙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
에탄의 대답에 아서왕이 움찔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에탄은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일렁거리는 빛을 빤히 바라보는 순간.
-파아앗…
아서왕의 영혼이 담겨있는 황금빛이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래도 우리는 진솔하게 대화를 할 필요가 있을 거 같군.”
빛으로만 존재했던 아서왕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에탄의 눈앞에 나타났다.
* * *
사람이 없는 한적한 술집.
후루룩.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에 소이테르가 자리를 잡았다.
“이 집은 녹차가 영 별로구만.”
그리고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직접 제조하는 녹차보다 맛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게가 술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맛이 없는 게 당연한 거였지만.
“쯧쯧.”
소이테르는 그런 점을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 자신또한 술집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자기를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주인의 시선도 무시했다.
여차해서 싸운다고 해도 자기가 이길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탁…탁.
“오랜만이야. 소이테르.”
그래서 주인장에게 녹차나 다시 타오라고 시키려는 찰나. 한 남자가 소이테르를 향해 다가왔다.
“리든 도련님.”
칼라사르 가문의 둘째 형인 리든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소이테르가 리든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90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런 격식을 차려. 편하게 해. 편하게.”
리든이 그런 소이테르를 보고 낄낄 웃었다. 동시에 빡빡하게 예의를 갖추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닙니다. 전 이게 편합니다.”
소이테르는 알고 있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자신의 월급이 감봉될 거라는 걸 말이다.
실제로 한번 당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고.”
리든이 소이테르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탁.
그 후 그의 맞은편에 앉고는.
“그래서… 우리 착한 동생은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알아냈나?”
두눈을 번뜩이면서 소이테르에게 에탄의 행방을 물었다.
“예.”
소이테르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 착석한 뒤 자신의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에탄 도련님의 행동 요약본입니다.”
거기에는 에탄이 리든과 헤어지고 나서 어떤 움직임을 취했는지가 전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굳이 에탄 도련님을 조사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어차피 같은 가문인데.”
소이테르가 자신이 조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리든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는 하지.”
“그러면…….”
“하지만 궁금하잖아. 우리 망나니 같았던 동생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처럼 변했는지.”
리든이 질문을 한 소이테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면서 재밌다는 듯이 싱긋 입꼬리를 올리고는.
“게다가 나한테 보여준 힘도 믿기지가 않거든.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기간에 이룰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어.”
“그렇다는 건.”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지. 그게 좋은 쪽이든 아니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에탄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어째서 자신이 에탄에게 관심을 보이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굉장히 의외군.’
소이테르가 이런 리든의 대답에 속으로 감탄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게 리든이다.
한데. 에탄과 헤어지자마자 자신에게 에탄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심지어는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보고를 받기까지 하니.
‘확실히… 셋째 도련님이 많이 변하시기는 하셨지.’
소이테르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과거의 에탄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말이다.
“흐음. 가장 마지막 확인이 데이른 공작의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거구만.”
“예. 그 이후부터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적지는…….”
“알아. 이미 어디로 갈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리든이 소이테르의 설명에 손을 휘저었다. 에탄이 무엇을 가지고 어딘가로 향하는지 다른 사람보다 리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서왕의 갑옷…….”
에탄에게 아서왕의 갑옷을 각성 시킬수 있는 단서를 준 게 바로 리든이었으니까.
그러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흥미롭군.”
때문에. 리든은 에탄이 칼라사르 가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를 기대하게 됐다.
“얼마나 더 강해질까…….”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운 성장을 보이는 인물이 바로 에탄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리든이 원하는 경지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한판 붙어봐야겠지.”
리든은 에탄과 제대로 붙어보리라 다짐했다. 그때는 꺼내지 않았던 비장의 수를 이용해서 말이다.
* * *
“으으음…….”
“흐음.”
아린이와 뇽뇽이가 자리에 주저 앉은 채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아서왕의 무덤을 지키는 문을 빤히 쳐다보면서.
“데이른 공작님.”
“왜 그러느냐?”
“이거 부수면 안돼요?”
저 문을 박살내면 안되냐고 물었다.
“허락할수 없다.”
데이른 공작이 그 말을 듣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혹여나 아린이와 뇽뇽이가 문을 부수기 위한 시도를 할까 싶어.
등에 매고 있는 대검을 조용히 꺼냈다. 이상한 짓은 시도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하지만. 아빠가 아직 안나타났는걸요.”
“한 시간이 지났음!”
아린이와 뇽뇽이가 그걸 보고는 데이른 공작에게 항의했다. 에탄이 아서왕의 갑옷과 함께 사라진 지 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아린이와 뇽뇽이가 에탄을 걱정할만도 했다.
“안 되겠음! 박살 내겠음!”
그리고 결국은 인내심이 짧은 뇽뇽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터벅! 터벅!
문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는 순간.
쿠쿠쿵…
그동안 미동도 없었던 문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
데이른 공작. 아린이. 뇽뇽이가 그걸 보고는 두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문을 빤히 쳐다봤다.
쿠쿵!
그때. 위아래로 흔들리던 문에 금이 가더니.
쩌적!
이내 반으로 갈라지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서왕의 무덤 안에는.
“…아빠?”
에탄이 황금빛을 뿜어내는 아서왕의 갑옷과 함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