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에탄은 산맥을 떠나 칼라사르 가문으로 향했다.
‘역시.’
그리고 칼라사르 가문에 가까워질수록 마차에 짐이 늘어났다. 모두 아린이와 뇽뇽이를 보고 호의를 베푼 사람들의 ‘선물’이었다.
‘아린이와 뇽뇽이가 최고다.’
에탄은 그걸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먼 길을 떠날 때는 무조건 두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 말이다.
“…이번에도 뭔가를 한가득 가져왔구나.”
지오반이 마차가 터질 정도로 꽉 찬 짐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마차가 본가 입구에 들어올 때부터 저기에 에탄이 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저 정도로 큰 짐을 가지고 올 사람이 녀석밖에 없으니까.
탁!
에탄이 지오반의 말에 픽 웃었다. 동시에 마부석에서 내리고는.
“집에 왔는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요.”
지오반에게 가볍게 웃으면서 답했다.
“아린아. 뇽뇽아. 마차에서 내려.”
그 후 마차에 앉아 있는 아린이와 뇽뇽이에게 하차하라고 하자.
끼익!
아린이와 뇽뇽이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
지오반이 그걸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아린이와 뇽뇽이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몇 년만에 만나는 건가?”
그래서 지오반은 에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확 지나가 버렸는지 말이다.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굳이 기간을 따지자면 두 달에서 세 달만에 돌아오는 거겠군요.”
“흐음…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설마 제가 없는 사이에 가문이 폭삭 망한 건 아니겠죠.”
“네 녀석도 버틴 게 우리 가문이다.”
“…….”
에탄이 지오반의 대답에 꿀 먹은 벙어리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나온 저 답변이 자신의 뼈를 때렸으니까.
‘날이 갈수록 말솜씨가 느시는군.’
이제는 쉽게 당해주지 않는 지오반이었으니. 에탄은 앞으로는 전략(?)을 바꾸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지오반이 그런 에탄을 향해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만큼 아린이와 뇽뇽이의 변화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단 가주실로 가시죠. 거기서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에탄이 잔뜩 궁금해 하는 지오반을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
“…이렇게 해서 아린이와 뇽뇽이가 성장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가주실에서 번개 산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는 순간.
“그러니까 아린이와 뇽뇽이가 죽을뻔했다?”
“예?”
“번개 산맥을 올라갈 거면 혼자 가지. 굳이 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던전에 들어가서 이 사단을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군… 그래. 그렇단 말이지.”
드르륵!
지오반이 의자를 바짝 땡겨 앉았다.
에탄의 얼굴에 닿을 기세로 말이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내 입에서 많은 말들이 튀어 나올 거 같구나.”
그리고 아주 살벌한 미소를 지은 채.
“이 자식이 애 아빠가 됐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아악! 귀. 귀 찢어집니다! 아버지!”
폭풍 같은 잔소리를 시작했다.
* * *
에탄은 지오반에게 한 시간 가까이 훈계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수십 번 하고 나서야 가주실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도련님. 귀가 많이 빨개지셨습니다.”
그렇게 가주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바스찬이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혼났어.”
“그래도 뚜드려 맞지는 않으셨군요.”
세바스찬이 에탄의 말에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이야기는 아린님과 뇽뇽님에게 들었습니다. 제법 무모한 일을 해내셨더군요.”
그러면서 덤덤하게 뒷말을 붙였다.
하지만 에탄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2차 폭풍 잔소리가 시작될 걸 말이다.
“반성하고 있으니까 너마저 그러지는 말아줄래?”
그래서 미리 선수를 쳤다.
자신의 반대쪽 귀마저 빨개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허허.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혼내겠습니까?”
세바스찬이 에탄의 방어에 털털하게 웃었다. 그리고 두 눈을 그윽하게 뜨고는.
“다만… 집사로서 위험한 행동을 계속 하실까 우려가 됐을 뿐입니다. 하지만 도련님도 충분히 깨달으신 거 같으니 이 일은 넘어가겠습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래. 두 번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믿어도 좋아.”
에탄이 그런 세바스찬을 보고 오싹함을 느꼈다.
‘어째 전생 때보다 더 무서워진 거 같은데.’
그러면서 한 가지를 다짐했다.
‘앞으로는 몰래 사고 쳐야지.’
이제부터는 진실을 그대로 얘기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린이랑 뇽뇽이는 뭐 하고 있어?”
“3급 기사 연무장에서 훈련하고 계십니다.”
“…응?”
에탄이 세바스찬의 대답에 몸을 멈칫했다. 어째서 아린이랑 뇽뇽이가 3급 기사들과 함께 있는지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모헨 님의 실력을 보고 싶다면서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래?”
하지만 세바스찬의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는.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오랜만에 모헨의 실력 좀 보고 싶네.”
에탄도 모헨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의 검술을 못 본 지 꽤 오래됐으니까.
“3급 기사 연무장으로 가야겠어.”
그래서 오랜만에 모헨과 한판 붙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3급 기사들이 있는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움직였지만…
“끄으읅….”
“살. 살려줘.”
“팔. 팔이 안 움직인다….”
그곳은 이미.
“…벌써 죽었네.”
아린이와 뇽뇽이의 힘으로 인해 모헨을 제외한 전원이 멸망한 상태였다.
* * *
에탄이 아린이와 뇽뇽이를 데리고 번개 산맥으로 향할 때.
-도련님이 돌아왔을 때 깜짝 놀래킬 만한 수준은 되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나 얻어 맞을수는 없지.-
-이번에는 도련님한테 우리도 할수 있다는 걸 보여 주자고!
칼라사르 가문의 3급 기사들은 한가지 목표를 세웠다. 에탄이 복귀했을 때 자신들을 보고 놀라게 하는 거였다.
‘그거 쉽지 않을 텐데….
하지만 모헨은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에탄을 놀라게 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우린 할 수 있어.
-이번에야말로 도련님에게 보여주자!
-좋아. 어디 한번 가보자고!
그래서 3기사들이 가지는 헛된 희망을 없애야 하나 싶었지만.
‘직접 느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알아듣지 않을 게 뻔하니까.
-내가 너희를 도와줄게. 대신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해.
그 대신. 에탄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들을 최대한의 강도로 굴렸다.
적어도 아린이와 뇽뇽이의 검을 몇 번 받아 칠 수는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 분명 그렇게 이 악물고 수련했는데.’
하지만 이런 모헨도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도련님.”
“어.”
이들이 죽을 만큼 구를 때 에탄과 아린이 뇽뇽이는 실제로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린님과 뇽뇽이님이 저렇게 괴물같이 성장하신 겁니까?”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과거 회상을 끝낸 모헨이 에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에탄이 모헨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답했다. 설명 할 수 는 있지만 여기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자세한 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너는 용케 살아남았네?”
대신. 이번에는 에탄이 모헨에게 질문했다.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저는 아직 아린 님과 대련을 안 한 상태입니다.”
모헨이 에탄의 물음에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을 지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모헨은 3기사들을 최대한의 강도로 굴렸다.
저들의 입에서 온갖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아린 님의 검을 그 누구도 10초 이상 버티지 못하다니.’
한데. 자신을 제외한 모든 3기사가 허무하게 패배했다.
심지어 누가 봐도 압도적인 수준의 패배였다. 그 누구도 아린이의 머리카락 하나조차 베지 못했으니.
“면목이 없군요.”
모헨의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게 당연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에탄이 그런 모헨의 모습을 보고는 측은함을 느꼈다. 아린이가 번개 산맥에서 각성했을 때.
자신도 모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모헨. 넌 오랜만에 나랑 붙어보자.”
그래서 모헨을 직접 상대해주기로 했다. 녀석이 더 빨리 성장 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으니까.
“저번처럼 저를 패-”
“이번에 많이 배워둬. 너한테 어울리는 검술을 이용해서 상대할 테니까.”
“!”
모헨이 에탄의 말에 두눈을 크게 떴다. 이전처럼 일반적인 뚜드려패기가 아닌.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겁니까?”
자신을 알려주는 대련을 하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련했는데 얻어가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아….”
“싫어? 그러면 아린이랑 대련하던가. 내가 보기엔 5초 버티면 잘 버티는 거다.”
“아닙니다. 도련님과 하겠습니다.”
모헨이 에탄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린이랑 검을 맞붙어봤자 얻어갈 수 있는 게 없으리라.
아니. 애당초 검을 대기도 전에 패배를 할 게 뻔했다.
아린이는 이기기 위한 대련을 하는 거니까.
‘하지만 도련님은 다르다. 특히 맨 처음 대련을 했을 때는… 더더욱 달랐어.’
모헨은 아직도 에탄과 처음 대련을 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떠올리는 걸 넘어서 그때의 느낌을 이정표로 삼았다.
그때 에탄이 보여준 검술이 자신의 가야 하는 길이라는 걸 톡톡히 느꼈기 때문이다.
쓰릉!
“선공은 양보해줄게. 먼저 들어와.”
그때. 에탄이 검집에서 검을 빼들면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모헨이 그 말을 듣고는 자신의 검을 제대로 쥐어 잡았다.
“후우….”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는.
탁!
에탄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드는 순간.
“그런데… 많이 아플 거야. 절대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아버지한테 귀를 뜯길 뻔해서 분풀이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모헨은 보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짓는 에탄의 모습을.
‘아.’
그리고 깨달았다.
‘여기가 내 인생의 끝이구나.’
이번 대련이 끝나면 자신은 저승에 있을 거라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