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전설의 명검 아린은 에탄이 발견하기 전까지 얼음 계곡에 잠들어 있었다.
후우우웅…
혹독한 겨울을 뛰어넘는 눈 폭풍과 365일 휘몰아치는 칼바람.
아린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 에탄을 기다렸었다.
[눈보라?]
포레스튼이 눈을 찌푸렸다.
번개 산맥에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곳은 얼음 계곡이 아닌 번개가 몰아치는 번개 산맥이니까.
그러니 눈이 내리지 않는 게 정상이지만.
[…얼음 계곡.]
포레스튼은 이 기이한 현상이 당연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차가운 기운은 그곳에서밖에 느낄 수 없었지.]
포레스튼 또한 얼음 계곡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이 서린 이 기운의 근원지가.
[그렇구나. 네 녀석은 얼음 계곡 출신이구나.]
눈앞에 있는 아린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
아린이가 포레스튼의 말에 눈을 감았다.
-우웅…
그리고 닿기만 해도 얼어버릴 거 같은 한기를 몸에서 뿜어내면서.
팟!
자신과 거리를 벌린 포레스튼에게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
포레스튼이 그걸 보고는 몸을 흠칫했다. 눈보라를 뚫고 달려오는.
아니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아린이의 모습을 보고.
[내가 공포를 느낀다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본능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말도 안 된다!]
포레스튼이 그 사실을 깨닫고는 소리를 내질렀다.
우드드득!
그러면서 커다란 가시벽을 만들어 냈다. 자신에게 돌진하는 아린이를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
아린이가 갑자기 나타난 벽을 아무 변화도 없이 바라봤다.
“후우.”
동시에 숨을 깊게 내쉬자.
휘이잉!
거세게 내리던 눈보라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췄다.
“…꿰뚫어라.”
그로 인해 생긴 정적 속에서 아린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쉐에엣!
이어서 아린이가 벽을 향해 찌르기 자세를 취하는 순간.
웅.
공기가 일그러지는 소리가 산맥에 울려 퍼졌다.
후우웅!
그리고 아린이의 검에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고.
쩌적!
그 빛들이 포레스튼이 만든 벽을 얼려버렸다.
[…!]
포레스튼이 그걸 보고 경악했다.
자신의 마기를 담아서 만들어 낸 저 방어벽이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지지직!
그렇기에 다시 한번 힘을 쓰려는 순간.
“얼어붙어라.”
아린이의 섬뜩한 목소리가 산맥에 울려 퍼졌다.
쩌억!
동시에 포레스튼의 양발이 빙결됐다. 마기를 이용해도 녹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빙결이었다.
그 순간 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는다는 것이었다.
‘영혼을 분리 시켜야 한다!’
그래서 재빨리 강림을 해제하는 작업에 들어가자.
“꿰뚫어라.”
아린이의 얼음같은 목소리가 포레스튼의 귀에 들려왔다.
후우웅!
그와 동시에.
반짝.
눈보라 사이에서 아린이의 눈동자가 빛을 뿜어내자.
… 쿠쿵… 쿠쿠쿵!
산맥 전체가 흔들렸다.
* * *
“…….”
에탄의 두 눈이 떠졌다.
그러자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으윽!”
그걸 인식하는 순간 극심한 통증이 에탄을 엄습했다.
온몸의 근육들이 갈가리 찢긴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픈 강도였다.
“정신이 드나?”
그런 에탄을 향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마법사님.”
에탄은 예전에도 이 남자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래서 인사를 건네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온갖 마법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서재 한가운데에는 저번에도 봤던 검은색 로브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랑 변한 게 없군요.”
에탄이 변하지 않은 방의 모습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네.”
그러자 남자가 에탄의 말에 씨익 웃었다.
딱!
그 후 손가락을 허공에서 튕기자.
툭.
책상과 찻잔 두 개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마시게. 방금 만든 거라서 맛이 좋을 거야.”
남자가 그 찻잔 중 하나를 들고는 에탄에게 내밀었다.
“저 누워 있….”
에탄이 그걸 보고는 무어라 말을 하다가 입을 멈췄다.
“지금은 소파에 앉아 있지.”
남자의 말대로 자신의 몸이 소파에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네요.”
에탄이 그걸 깨닫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만. 놀라지는 않았다.
이 남자라면 이런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놀리는 맛이 없어졌군.”
“원래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니까요.”
“다음에는 그런 말 못 하도록 단단히 준비해야겠어.”
남자가 에탄의 대답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루룩.
그 후 차를 마시고는.
탁!
책상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무리를 제법 했던데.”
“예.”
에탄이 남자의 말에 침을 삼켰다.
그러면서 팔짱을 낀 그를 쳐다보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뒷말을 붙였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그건 나도 알고 있다네.”
남자가 에탄의 말에 픽 웃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에탄이 그런 남자의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거니까.
“자네가 반지를 잘 끼고 있는 덕분에 파악할 수 있었네. 뭐… 그게 아니었다면 애당초 만나지도 못했겠지만 말이지.”
이런 에탄의 물음에 남자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리고 아직 에탄이 손대지 않은 찻잔을 쳐다보면서.
“얼른 마시게. 몸에 좋은 거야.”
에탄에게 차를 마시라고 재촉했다.
“…….”
“독이나 이상한 거 안 탔으니까 괜한 의심하지 말게. 애당초 그런 걸로 사람 죽이는 취향도 없어.”
“알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에탄이 픽 웃었다.
애당초 그런 의심을 하지도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후룩!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들이켜는 순간.
“우욱….”
“원래 몸에 좋 은건 쓴 법이지.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전부 마시도록.”
에탄은 자신도 모르게 차를 뱉을 뻔 했다. 그냥 마시기에는 맛이 ‘더럽게’ 없었기 때문이다.
“흘리면 다시 마시게 할 테니까 그리 알고 있게.”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봤으니까.
후룩… 후루룩.
때문에. 에탄은 이를 악물고 차를 모두 들이켰다.
“끄으….”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훌륭한 자세야.”
남자가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에탄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이 고통받는 걸 즐기는 성격인가?’
에탄이 그걸 보고는 진지하게 남자의 성격에 대해서 고민했다. 물론 속으로만 그랬다.
저걸 질문으로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안 잡혔으니까.
“자네는 두 아이를 조금 더 믿을 필요가 있네.”
그때. 남자가 에탄을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넸다.
“굳이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그러면서 미묘한 눈빛으로 에탄을 쳐다봤다.
“…….”
에탄이 그 말에 몸을 멈칫했다.
“마법사님은-”
그러면서 남자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려는 순간.
“이런. 시간이 다 됐군. 다음에는 좀 더 멀쩡한 상태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네.”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후 에탄을 쳐다보면서 싱긋 웃고는.
“다음에 보세.”
작별 인사를 건넸다.
팟!
그 순간 에탄의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쓰르륵.
그리고 다시 눈이 떠졌을 때는.
“아빠?”
눈물 자국이 잔뜩 번져있는 아린이가 에탄을 맞이했다.
“…….”
에탄 또한 자신을 쳐다보는 아린이를 보고 반가움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됐다.
‘아린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아린이의 모습이.
‘원래 이렇게 컸나?’
생각보다 길쭉(?)했기 때문이다.
“흐윽. 흑!”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을 가질때가 아니었다. 에탄이 깨어난 걸 확인한 아린이의 눈에서 눈물샘이 폭발했으니까.
“…….”
에탄이 눈물을 흘리는 아린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쓰윽.
그러다가 이내 두팔을 뻗어 아린이를 껴안고는.
“아빠 때문에 고생했네.”
아린이를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 * *
“…그래서 삼 일 동안 기절해 있었어요.”
그렇게 아린이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에탄은 자신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살아 있는 게 용하군.’
그리고 눈을 떴다는 거 자체가 기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계 대공중 한 명인 포레스튼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거니 말이다.
“온몸에 마기가 번져 있었다라….”
포레스튼의 공격으로 인해 에탄의 몸은 마기로 침식되고 있었다. 심지어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팔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으니.
‘잘못했으면 외팔이가 됐겠지.’
에탄은 영원히 오른쪽 팔을 쓰지 못할 가능성도 다분했었다.
“뇽뇽이가 큰 도움을 줬어요. 만약 뇽뇽이의 마력이 없었다면… 팔을 살릴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에탄의 오른팔은 멀쩡히 살아 남았다. 뇽뇽이가 자신의 마력을 모두 퍼부었기 때문이다.
“지금 뇽뇽이는 뭐 하고 있어?”
“다른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아마도 금방 올 거 에요.”
에탄이 아린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쓰윽.
그 후 주변을 둘러봤다.
에탄이 있는 이곳은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집이었다.
“여기는 탐험가 베이덴프 씨가 생활하는 집이에요.”
“베이덴프라면. 그 드워프 탐험가?”
“네.”
그리고 아린이를 통해 이곳이 베이덴프의 거주 공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베이덴프 씨도 녀석의 공격을 받아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래요.”
“그렇구나.”
아린이의 설명에 에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러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녀석의 존재를 일찍 파악했다면.
‘진작에 제거할 수 있었을 텐데.’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무마 할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에탄은 자신이 잘못한 거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빠 탓이 아니에요.”
그때. 아린이가 에탄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에탄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아린아….”
에탄이 그 말을 듣고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린이의 입에서 저런 말들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조금 더 믿을 필요가 있다라….
그래서일까. 기절에서 깨기 전 만났던 마법사 남자의 말이 에탄의 머릿속에 문뜩 떠올랐다.
‘이제는 그래도 되겠네.’
그리고 에탄은 자신이 아린이와 뇽뇽이를 대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은 상당한 성장을 거뒀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에탄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의문이 떠올랐다.
“아린아.”
“네?”
“키가 원래 이렇게 컸었니?”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아린이의 갑작스러운 성장이었다.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린이는 5살과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못해도 8살은 되는거 같은데.’
그때보다 키가 두 뼘 이상은 커졌으니. 에탄이 위화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게….”
에탄의 물음에 아린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후 에탄을 향해.
“저만 큰게 아니에요.”
“응?”
“뇽뇽이도 컸어요.”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 순간.
쾅!
에탄과 아린이가 머무고 있는 방문을 거칠게 열려졌다.
“흐응!”
“…뇽뇽이?”
그리고 아린이처럼 키가 훌쩍 자란 뇽뇽이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는.
“혼나야 함!”
-우우웅!
“어어… 어! 뇽뇽아 멈춰! 나 환자야!”
“뇽뇽아. 진정해!”
화끈하게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