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쓰윽. 쓱.
에탄이 나뭇가지를 이용해 연무장 바닥에 글을 써나갔다.
‘일단 번개 산맥에 있는 던전에서 무기를 얻어 내고. 그걸 이용해서 데이른 공작과의 대련을 무사히 넘긴다.’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데이른 공작에게 아서 왕의 무덤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을 얻어 내고 아서왕의 갑옷을 각성시키면….’
그리고 에탄은 글을 적어가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할 게 더럽게 많네.”
이 모든 걸 스스로 자초했다는 거였다.
‘어쩐지 쉴 틈이 없더라.’
에탄은 회귀를 하고 나서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심지어는 놀자고 모이는 연회장에서도 검을 휘둘렀으니.
‘…이게 맞나?’
아무리 에탄이라고 해도 지친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
“아빠! 조심해요!”
“?”
쉐애애앵!
아린이가 휘두르던 검이 에탄을 향해 날아왔다.
탁!
에탄이 그걸 보고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콰앙!
그러자 아린이가 놓친 검이 벽에 힘차게 꽂혔다. 워낙 잘 만들어져서 그런지 검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에르덴의 실력이 좋기는 하네. 이런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검을 만들 수 있고.”
에탄이 벽에 꽂힌 채 미동도 없는 녀석을 보고 감탄했다. 아직 에르덴의 실력이 정점에 오른 시기도 아니다.
그런데 아린이의 힘을 견디는 물건을 만들어 냈으니.
‘꼭 칼라사르 가문의 전속 대장장이로 영입해야겠어.’
에탄은 에르딘을 자신의 손아귀(?)에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아빠. 괜찮으세요?”
“다친 데. 없음?”
그렇게 에탄이 숨 쉬듯이 일할 거리를 늘리는 순간.
타탁!
수련복을 입은 아린이와 뇽뇽이가 에탄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죄송해요. 뇽뇽이가 마법을 이용해서 제 공격을 튕겨냈어요.”
“미안함. 조심하겠음.”
그리고 에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에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린이와 뇽뇽이를 보고 픽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사과를 하니.
에탄의 마음이 사르륵 녹아 버리는 게 당연했다.
아니. 이건 에탄이 아니라 다른 이가 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나처럼 착하게만 자라 줘라.’
때문에. 에탄은 아린이와 뇽뇽이가 잘 자라주기를 바랬다. 회귀를 하고 정신을 차린 자신처럼 말이다.
참고로 착하다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에탄 스스로에 한해서다.
“그런데 바닥에 뭘 쓰고 계셨어요?”
“아빠가 앞으로 해야 하는 일.”
에탄이 아린이의 물음에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일단 번개 산맥에 있는 던전에서 아빠가 찾는 보물을 얻어야 해.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데이른 공작과의 대련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데이른 공작에게 아서왕의 무덤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하면 끝이야.”
그러면서 아린이와 뇽뇽이에게 자신이 구상한 계획을 말해줬다.
“뭔가 많아요!”
“복잡함!”
아린이와 뇽뇽이가 그 말을 듣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에게 있어 에탄의 계획은 너무 크고 방대했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하지만 아린이와 뇽뇽이는 그 점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 계획의 중심은 에탄이니까.
“하지만 너희 둘의 도움도 필요해. 그러니까 아빠 좀 도와주지 않을래?”
다만. 이 모든 걸 혼자서 하기에는 넘어야 할 관문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에탄은 아린이와 뇽뇽이에게 도움을 청했고.
“좋아요! 대신 설탕 사탕 만들어 주셔야 해요!”
“마찬가지임!”
아린이와 뇽뇽이는 설탕 사탕(?)을 대가로 받겠다고 말했다.
피식.
에탄이 두 사람의 요구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면서.
“아빠 일만 끝나면 설탕 사탕을 한 상자씩 만들어 줄게. 대신 하루에 세 개만 먹어야 해. 이 상하니까.”
아린이와 뇽뇽이에게 답했다.
설탕 사탕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러면 할래요!”
“뇽뇽이도 마찬가지임!”
아린이와 뇽뇽이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아.”
에탄이 거래가 성사됐음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그러면 오랜만에 세 명이서 대련 놀이 해 볼까?”
검집에서 검을 빼 들고는.
“먼저 쓰러지는 사람이 연무장 뒷정리 하는 거다!”
아린이와 뇽뇽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든지 덤비세요!”
“흐응!”
아린이와 뇽뇽이가 그런 에탄을 보고는 두 눈을 반짝였다.
콰아앙!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에탄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연무장 뒷정리를 맡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 *
어느덧 에탄이 칼라사르 가문에서 시간을 보낸 지 2주가 지났다.
“이 정도면 모험가 수준이 아닌가 싶구나.”
그리고 3주째가 됐을 때.
에탄은 다시 한번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번개가 몰아치는 번개 산맥으로 말이다.
“이번에는 아린이와 뇽뇽이만 데려간다고?”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지오반이 그 소식을 듣고 두 눈을 꿈뻑였다.
“예.”
에탄이 지오반의 반문에 단호하게 답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을 거 같아서요.”
그러면서 추가 인원은 없어도 된다고 답했다.
“오히려 이번 일은 사람이 많아질 수록 힘들 거예요.”
이유는 간단했다.
번개 산맥에 있는 던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지오반이 에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러면 이걸 가져가거라.”
드르륵!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문양이 각인되어 있는 원형 패 하나를 꺼냈다.
“이건?”
“칼라사르 가문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증명서다. 일종의 신분증 같은 거지.”
이어서 에탄에게 패를 내밀고는.
“중부에서 활동할 때 도움이 될 거다.”
덤덤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
에탄이 지오반이 내민 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생 때는 죽기 전에야 겨우 받았던 물건이다.
‘인정받고 있구나.’
한데. 이번 생에서는 몇 년은 더 빠르게 저 패를 받게 됐으니.
“감사합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게 당연했다.
“이 정도는 가주로서 당연히 해 줘야 하는 일이다.”
지오반이 에탄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그러면서 에탄을 쓰윽 바라보고는.
“죽어서 오지만 말아라. 너도. 아린이도. 뇽뇽이도. 모두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이건 명령이다.”
뼈가 있는 말을 툭 내뱉었다.
“예.”
에탄이 지오반의 주의에 진중하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빌헬름은 어디 갔습니까? 최근 들어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빌헬름에 행방을 물었다.
에탄이 칼라사르 가문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코빼기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지오반이 에탄의 물음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에탄을 쳐다보고는.
“빌헬름은 수련을 하기 위해 마물의 숲으로 떠났다.”
“……?”
“다시 한번 몸을 달군다고 하더군. 그 이유는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설마. 저 때문입니까.”
“그래.”
빌헬름이 자신의 몸에 기름칠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음.”
에탄이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빌헬름을 보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도망가야겠다.’
그 후 도주 경로를 미리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빌헬름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 * *
그렇게 에탄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고.
덜커덩!
그날부로 번개 산맥을 향해 여정을 떠났다. 칼라사르 가문에 있는 특수 마차를 이용해서 말이다.
“아빠! 마차 운전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거야.”
하나. 이번에는 마차를 이끄는 마부가 없었다. 번개 산맥은 험난한 곳이기 때문이다.
히잉!
그래서 에탄이 직접 말고삐를 쥐어 잡고 마차를 움직였다.
“우아….”
아린이가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에탄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저도 해 보면 안 돼요?”
그리고 자기도 말을 조종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참고로 뇽뇽이는 마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중이기에.
아린이와 에탄만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흐음.”
에탄이 아린이의 말에 난감함을 느꼈다. 말을 조종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마차를 이끄는 여러 마리의 말은 더 어려우니.
‘힘들 거 같은데.’
아린이가 말들을 잘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좋아. 그 대신 아빠가 손을 놓으라고 하면 바로 놔야 돼.”
“네!”
하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려 줄 수 있기에. 에탄은 손에 쥐고 있는 말고삐를 아린이에게 넘겨줬다.
“우아아….”
아린이가 말고삐를 쥐어 잡고는 두 눈을 반짝였다. 두 마리의 말이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진동이 고삐를 통해 전해졌다.
“이랴!”
그때. 아린이가 에탄이 했던 것처럼 말고삐를 위아래로 힘차게 휘둘렀다.
다그닥! 다그닥!
그러자 두 마리의 말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우아아!”
아린이가 그걸 보고는 감탄했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주는 말들의 행동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빠. 제가 계속 운전하면 안 돼요?”
그래서 에탄에게 자신이 마부 역할을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어?”
에탄이 아린이의 물음에 두 눈을 꿈뻑였다. 설마. 저렇게까지 말을 다루는 거에 흥미를 느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아린이를 잘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좋아. 그러면 마을이 나오는 곳까지 조종해 봐.”
때문에. 에탄은 아린이에게 좀더 기회를 줘 보기로 했다.
“네!”
아린이가 에탄의 말에 해맑게 웃으면서 답했다.
“이랴아!”
그 후 다시 한번 말고삐를 힘차게 휘두르면서.
히이잉!
산길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
.
.
그리고 이주 가량이 지나.
국경성 부근에 도달했을 때.
“멈춰라, 이 악마 같은 놈!”
“감히 어린이한테 노동을 시키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
에탄이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레인저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식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언가를 단단히 오해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