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메레린 왕국의 국왕 프라단.
‘이대로 죽을 운명인가.’
한 왕국의 국왕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몰골은 초췌한 상태였다.
“…….”
그 수준이 어느 정도냐면. 침대 옆에 있는 성수를 마시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프라단은 심장이 빨리 멈추기를 바랐다. 그래야 이 고통스러운 시간도 끝이 날 테니까.
꿀꺽.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프라단이 성수를 들이켰다. 신관의 신성력이 잔뜩 들어가 있는 성수였지만.
“…….”
딱히 프라단의 몸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
정적이 프라단의 침실을 집어삼켰다. 옆에서 말을 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항상 주변을 지키던 마법관은 물론이고 시중을 드는 하녀까지.
모두가 프라단의 옆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내뿜는 역병의 기운 때문에 말이다.
“춥군.”
프라단의 몸에서 한기가 흘러나왔다. 중병으로 인해 썩어 가는 육체가 냉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일까.
두꺼운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말아도 프라단은 춥다는 감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하아….”
그래서 입김을 뿜어내면서 추위를 이겨 내려는 찰나.
똑똑.
-폐하. 저희가 폐하의 중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을 가져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마법관이 그를 불렀다.
“마법관.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굳이 날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프라단이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관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실제로 눈물겨운 노력을 해 왔지만.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갈 때라는걸.”
프라단은 희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폐하. 이번에는 희망을 거셔도 될 거 같습니다.
“음?”
-칼라사르 가문의 에탄이란 자가, 폐하를 위해서 여왕 요정의 축복이 깃든 포션을 가져왔습니다.
“그게 무슨….”
하지만 이어지는 마법관의 말에.
프라단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이냐?”
그리고 마법관에게 되묻고.
-예. 진실입니다. 저랑 신관이 몇 번이나 확인해 봤습니다.
“아아….”
돌아오는 대답에 얼굴을 쓸어 만졌다.
“지금 바로 마셔 볼 테니 물러나거라.”
그 후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끼익!
그리고 방문을 있는 힘껏 여는 순간.
“…….”
프라단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반짝였다.
“이것이….”
마법관이 바닥에 놓고 간 포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쓰윽.
프라단이 영롱한 색깔을 띤 유리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뚝.
그 후 병뚜껑을 열고.
꿀꺽.
물약을 거침없이 목구멍 안으로 넘기는 순간.
파아앗!
“!”
프라단의 몸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흐으음….”
“으음.”
마법관과 신관의 앓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걱정되십니까?”
에탄이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질문을 툭 던졌다.
“예.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법관과 신관이 에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얼굴에 근심걱정이 한가득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도 만약 실패한다면….”
“폐하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실 겁니다.”
프라단은 왕국을 이끄는 데 아주 중요한 존재다. 하지만 이번 일로도 중병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그는 왕국을 이끌 수 없으리라.
“걱정하지 마세요! 여왕 요정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흐응!”
때문에. 실패하면 어쩌나 라는 걱정이 들려는 찰나. 아린이와 뇽뇽이가 두 사람을 향해 응원을 건넸다.
“허허.”
“흐음.”
마법관과 신관이 그걸 보고 가볍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있던 근심걱정이 약간 사라졌다. 아린이와 뇽뇽이의 해맑은 미소가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짐을 덜어내 준 거였다.
“정말 훌륭한 따님들을 두셨군요.”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크흠. 제 딸들이 좀 잘 자라기는 했죠.”
에탄이 마법관과 신관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에탄은 아린이와 뇽뇽이를 각별히 여기고 있으니.
두 아이를 향한 칭찬은 언제나 에탄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었다.
비록 피로 이루어진 자식은 아니지만 말이다.
“가볍게 말을 해 드리자면, 아린이 같은 경우에는….”
그래서 아주 조금 아린이와 뇽뇽이에 대해 자랑을 해 보려는 찰나.
끼익!
프라단이 머무는 침실 문이 열렸다.
“……!”
그 소리에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모두의 시선이 프라단의 침실 쪽으로 향했다.
“다들 여기 모여 있었구나.”
그런 이들을 향해 프라단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침실에만 있을 필요가 없을 거 같다.”
이어서 자신을 괴롭히던 중병이 사라졌다는 뒷말을 붙이는 순간.
“…아아!”
“폐하!”
마법관과 신관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에탄은….
‘드디어 내가 원하던 순간이 왔구나!’
자신의 투자가 제대로 성공했다는 걸 깨닫고 쾌재를 불렀다.
* * *
메레린 왕국의 알현실은 프라단이 중병에 걸리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설렁한 곳이었지만.
“폐하께서 정말로 깨어나셨다고 하더군.”
“드디어 중병을 이겨 내신 건가?”
“오히려 상태가 더 좋아졌다는 소리도 있던데….”
지금은 메레린 왕국에 있는 귀족들로 꽉 찬 상태였다.
“폐하께서 정말 우리를 소집한 게 맞습니까?”
프라단이 모두 알현실로 모이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한 귀족의 말에 알현실 안쪽에 서 있는 마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완전히 치료됐습니다. 그러니 다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을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프라단은 이제 멀쩡하다고 말이다.
끼이익!
그 순간 마법관의 대답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알현실 문이 열렸다.
탁!
이어서 힘찬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귀족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향했다.
“폐… 폐하!”
“폐하가 오셨다!”
그리고 자기들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모두 오랜만이군.”
프라단이 두 발로 멀쩡히 서 있었으니까. 그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말이다.
쓰윽.
프라단이 말을 마치고는 귀족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그 후 알현실 안쪽에 있는 왕좌를 향해 거침없이 움직였다.
타탁.
그런 프라단을 따라 에탄, 아린이, 뇽뇽이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이어서 그가 걸어가는 길을 똑같이 따라갔다.
“저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 인물인데.”
“나도 모르겠군.”
알현실에 있는 이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세 사람의 얼굴을 이들은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거였다.
에탄은 왕국에 오자마자 호수로 가서 여왕 요정을 만났다.
그 후 국왕의 중병을 치료하기까지 했으니.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
귀족들이 세 사람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탁!
그래서 모두가 웅성거리는 그때.
“모두 조용히 하거라.”
프라단이 왕좌에 앉았다.
그러면서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자는 나의 중병을 치료해 준 생명의 은인이다.”
“!”
귀족들이 프라단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프라단의 중병은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몇 달을 도전해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한데. 외부인인 에탄이 프라단의 병을 말끔히 치료했으니.
‘보통내기는 아니구나.’
‘유심히 지켜봐야겠어.’
귀족들의 이목이 에탄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폐하. 저는 한 게 없습니다.”
에탄이 프라단의 말에 공손한 말투로 답했다.
“저는 그저 칼라사르 가문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문을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칼라사르 가문?”
“북부에 있는 곳인데….”
“어째서 북부인이 여기까지?”
고요했던 알현실이 다시 목소리들로 가득 찼다. 중부인도 아닌 북부인의 출현은 이들에게 당혹감을 줄 만했다.
이곳은 중부에서도 제법 구석에 있는 왕국이니까.
“조용.”
그래서 귀족들은 의문을 표하려고 했지만. 프라단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칼라사르 가문의 막내아들 에탄입니다.”
“그 옆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제 두 딸인 아린이와 뇽뇽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프라단이 에탄의 말에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느냐?”
그러면서 보상을 말해 보라는 뒷말을 붙였다.
“폐하. 저는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에탄이 그 말에 단호하게 답했다.
자신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움직인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은 거 같은데?’
하지만. 마법관은 에탄의 대답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여왕 포션을 주는 대가로 금고에 있는 돈도 가져가고. 거기에 각종 아티팩트까지 우선 계약하기로 했는데….’
마법관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탄이 자신의 품속에서 필요한 품목들이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내는걸. 심지어 마지막 조항에는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까지 하게 했던 걸 말이다.
“아니다. 이대로 그대를 보내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나. 프라단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에탄이 자신을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거라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원하는 게 없느냐?”
“예.”
그래서 다시 한번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알겠다.”
프라단이 바뀌지 않는 에탄의 태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무언가를 결심한 듯 두 눈을 반짝이고는.
“그럼 내가 원하는 대로 그대에게 보상을 내리겠다.”
자신이 마음 가는 대로 에탄에게 상을 수여하겠다고 말했다.
“폐하?”
“그게 무슨….”
귀족들이 그 말을 듣고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란다가 에탄에게 뭘 줄지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다.
씨익.
프란다가 그런 귀족들을 보면서 지켜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에탄. 아린이. 뇽뇽이를 향해서.
“지금부터 그대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겠다.”
“?”
에탄조차 예상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