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에탄은 전생 때 여왕 요정을 보지 못했다.
‘그럴 만한 계기가 없었지.’
여왕 요정을 볼 만큼 단단한 징검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청나다.’
그래서 지금 여왕 요정을 처음으로 봄과 동시에 한 가지 확신도 하게 됐다.
‘적어도 이 공간 내에서는 여왕 요정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겠어.’
여기서는 여왕 요정이 드래곤보다 위라는 거였다.
[그렇게 겁먹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 순간 여왕 요정이 에탄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저는 여러분을 해칠 생각이 없어요. 먼저 저를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파앗.
그러면서 등에 달린 날개를 양옆으로 펼쳤다.
“우와아….”
“아름다움.”
아린이와 뇽뇽이가 여왕 요정의 날개를 보고 감탄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게 여왕 요정의 상징이구나.’
에탄 또한 그녀의 날개를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본 요정의 날개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이제 슬슬 장소를 바꿔 보죠. 여기서 계속 대화를 나누기에는 주위가 너무 트여 있으니까요.]
그 상태에서 여왕 요정이 나긋한 말투로 뒷말을 붙였다.
펄럭!
동시에 날개를 움직이면서.
[바뀌어라.]
주문을 외웠다.
웅!
그 순간 거대한 피리 소리가 요정계에 울려 퍼졌다.
“……!”
동시에 에탄. 아린이. 뇽뇽이가 디딛고 있는 바닥이 바뀌었다. 황금색 땅에서 빨간색 카펫로 말이다.
‘여기는 알현실인가?’
한데. 변화가 생긴 건 바닥만이 아니었다.
뻥 뚫려 있던 공간이 이제는 방이 되었다.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처럼 말이다.
‘인지하지도 못했다?’
더 놀라운 건 에탄이 그걸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거였다. 어지간한 변화에는 민감하게 반응을 하던 그조차도, 여왕 요정의 공간 이동을 미리 간파하지 못했다.
“엄청남.”
“대단해요….”
그건 뇽뇽이와 아린이도 마찬가지였기에. 세 사람은 여왕 요정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명색이 여왕 요정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왕 요정이 놀라는 모습들을 보고 씩 웃었다.
휙.
그 후 손가락을 허공에 까딱이자.
툭!
[소파에 앉으세요.]
소파가 나타났다.
정말 말 그대로 ‘뿅’ 하고 등장한 거였다.
“….”
에탄. 아린이. 뇽뇽이.
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소파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런 식으로 가구가 등장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 마실 것도 내어 드리죠.]
탁!
하지만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파에 이어서 탁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도 있었으니.
‘장난 아니군.’
에탄은 감탄을 넘어서 경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린아. 뇽뇽아. 소파에 앉자.”
“네.”
“흐응!”
에탄의 말에 아린이와 뇽뇽이가 활기차게 답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조심스럽게 소파에 다가가.
툭!
몸을 소파에 밀착시켰다.
우웅!
그러자 소파가 아린이와 뇽뇽이의 몸에 맞춰서 변형됐다. 그 모습을 본 에탄이 침을 삼켰다.
툭.
그 후 아린이와 뇽뇽이처럼 소파에 앉자.
웅….
에탄의 몸에 맞춰서 소파가 변형됐다.
‘이런 소파가 대륙에 있었다면 불티나게 팔렸을 텐데.’
편안함을 넘어서 잠이 절로 올 정도였다. 하나. 에탄은 몽롱한 감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잠을 자면 큰일 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겠군요.]
그때. 여왕 요정이 에탄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예.”
에탄이 그녀의 말에 즉각 답했다.
“후우….”
그리고 숨을 고르고는.
“메레린 왕국의 국왕. 그가 걸린 중병을 요정님이 치료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 *
까앙! 깡!
연금술사 데프리안의 공방에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와른! 그쪽은 아직이냐!”
“거의 다 끝나가요!”
이어서 헤와른의 목소리가 소음을 집어삼키고.
“흐음!”
깡!
이번에는 그녀가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방을 채웠다.
‘짜증나!’
다만. 그녀의 망치질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까앙!
‘망할 도련님! 처음 가게에 왔을 때부터 본질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에탄이었으니까. 자신을 꼬드겨서 데프리안 스승에게 데려온 것도.
이 공방에서 스승을 도와 연금술 작업을 하는 것도 말이다.
“후아아!”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헤와른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까아앙!
이어서 마지막 망치질 소리가 공방을 흔들었다.
“다 끝났어요!”
헤와른이 완성된 도구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퇴근이다!’
이제야 데프리안에게 해방되겠구나! 라는 희망을 가졌기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그래? 드디어 밀린 작업들이 끝났구먼!”
“스승님. 그러면 저는 이제 그만 물러-”
“이제 에탄 님이 부탁하신 번개 저항 아티팩트만 제작하면 끝이군.”“….”
하지만.
“근데 무슨 소리 했느냐? 설마 이 작업에서 빠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네 도움이 꼭 필요한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물론이죠!”
그녀의 행복 회로는 3초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타 버렸다.
‘언젠가는 복수하겠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 에탄을 향한 순수한 분노가 빈자리를 대체했다.
* * *
그렇게 헤와른이 공방에서 망치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국왕을 치료해 달라니. 그게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부탁입니까?]
에탄은 여왕 요정과 거래를 이어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설득하는 과정에 들어간 거였다.
“제 부탁이 아닙니다. 아린이와 뇽뇽이까지 총 세 명의 청입니다.”
“맞아요!”
“흐응!”
에탄의 대답에 아린이와 뇽뇽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흐음. 이상하네요. 저를 만나서 하는 부탁이 국왕을 치료해 달라는 거라니.]
하지만 여왕 요정은 여전히 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에탄의 심리를 납득하지 못했다.
[분명 이걸 기회로 더 큰 걸 요구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거죠?]
여왕 요정을 만나서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다.
그녀는 에탄이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의 기호가 깃든 축복이든, 아니면 보구를 요구하든 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인 이득을 포기하고 국왕을 치료해 달라니….]
그런데 남의 병을 고쳐달라는 게 끝이라고 하니.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했다.
“제가 원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에탄의 입장에서는 고민해 볼 가치조차 없는 물음이었다.
‘나한테는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까.’
여왕 요정조차 모르는 에탄의 무기.
어찌 보면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검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여왕 요정에게 국왕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말하는 거였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없으니까.
[단순한 객기가 아니군요.]
여왕 요정 또한 그 부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에탄이 단순히 허풍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럴 자신이 있다는 걸 말이다.
[원하는 건 취할 수 있다라….]
“하지만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은 제게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아 호수에 있던 아가한테 부탁을 한 거겠군요.]
“예.”
에탄이 여왕 요정의 말에 긍정했다.
쓰윽.
그걸 본 여왕 요정이 에탄, 아린이, 뇽뇽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아.]
그리고 못 말리는 개구쟁이들을 보듯 한숨을 내쉬고는.
[좋아요. 그 부탁 들어주도록 하겠습니다.]
국왕의 중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말했다.
“와아….!”
“흐응!”
아린이와 뇽뇽이가 여왕 요정의 대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감사합니다!”
“흐응! 고마움!”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아이들이 인사성이 참 좋군요.]
여왕 요정이 그걸 보고는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저 순수한 마음들이 너무 기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에탄이 여왕 요정의 말에 고개를 꾸벅였다. 그 또한 부탁을 들어주는 거에 고마운 감정을 가졌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고마움은 당황스러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거 내가 많이 하던 발언인데.’
평소에 에탄이 무언가를 요구할 때(?) 쓰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한테 뭘 원하십니까?”
하지만 여왕 요정이 저 말을 하는 의미를 에탄은 알지 못했다. 솔직히 그녀가 원하는 건 요정들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여왕 요정의 힘은 절대적이니까.
[지금 당장은 말해 줄 수 없어요.]
“?”
[언젠가 때가 된다면 이야기를 들려 드리죠.]
“으음….”
에탄이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할 일이 아니다라….’
그녀의 말에 꽤 큰 의미가 담겨 있는거 같았다. 여왕 요정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거라면.
절대 평범한 건 아니리라.
“알겠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이 커져 나갔지만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자신 또한 여왕 요정과 모두에게 숨기는 사실이 있으니 말이다.
[좋아요. 그러면 거래 성립이네요.]
여왕 요정이 에탄의 대답에 입꼬리를 올렸다.
탁!
그 후 허공에 손가락을 팅기자.
투욱.
에탄의 무릎 위에 작은 포션 하나가 떨어졌다. 붉은색을 띠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 포션을 국왕에게 먹이세요. 그러면 중병이 치료 될 겁니다.]
“이 포션 하나만으로요?”
[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안에는 제 축복이 깃들어 있는 상태예요. 그러니까 효과는 확실할 거예요.]
“허어….”
에탄이 여왕 요정의 말에 감탄했다.
이 작은 병 안에 들어있는 포션으로 중병을 치료할 수 있다니.
‘교단에 있는 사제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겁하겠네’
이런 게 대륙에 나왔다면 사제들은 굶어 죽었으리라. 그들을 찾는 것 대신 포션을 마실 테니까.
-우웅….
그래서 몇 개만 더 달라고 말할까? 라는 고민을 하려는 순간.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네요. 다음 만남을 기대하도록 하죠.]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왕 요정이 에탄, 아린이, 뇽뇽이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었고.
파앗!
새하얀 빛이 이들을 집어삼켰다.
그 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뇽뇽이가 메테오를 날린 호수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남은 건 국왕을 만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에탄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포션.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닌데. 아니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물론. 맨입으로 줄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