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에탄의 상대는 테이벤이었다.
그리고 순서 또한 맨 앞이었다.
데이른 공작이 에탄과 테이벤의 도련을 가장 빨리 보고 싶어서 했기 때문이다.
“각오는 되어있겠지? 중간에 기권하면 재미없을 거야.”
“그럴 일은 없다.”
때문에. 에탄과 테이벤은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손에는 사람을 벨 수 있는 진검을 든 채로 말이다.
“최선을 다해서 싸워주기를 바란다. 어차피 위험한 순간이 오면….”
데이른 공작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나나. 마탑주가 개입을 할 테니까.”
이어서 자신의 왼편에 있는 화염의 지배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연회장에 온 손님을 이렇게 부려먹어도 되는 거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화염의 지배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곳에 일하러 온 게 아니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마탑으로 돌아가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적어도 챙겨가는 음식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북부인도 아닌데 참석을 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지.”
“…흥.”
하지만 데이른 공작의 지적에 혀를 차고는.
“하여간. 능글맞은 노인 같으니.”
휙휙.
허공에서 오른손을 두 번 움직였다.
파앗!
그러자 에탄과 테이벤의 머리 위에 빨간색 원형 구슬이 나타났다.
“승리하는 방법은 간단해. 상대방의 머리 위에 있는 빨간색 구슬을 먼저 박살 내는 쪽이 이기는 거야.”
그녀의 설명에 에탄과 테이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구슬로 향했다.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크기.
평범한 방법으로는 배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오밀조밀한 녀석이었다.
“저걸 검으로 베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테이벤이 그 사실을 깨닫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눈으로도 유심히 봐야 보일 만큼 작은 크기였다.
한데. 저걸 부수기까지 해야 하니 부담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과정은 자유야. 네가 상대를 무력화시켜서 부수든, 아니면 처음부터 구슬만 노리고 공격하든.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봐. 어렵기는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크기를 키워주는 배려는 없었다. 대련은 원래 어렵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나중에 가면 손가락으로도 부술 수 있을 만큼 쉬워진다. 그러니 이참에 도전 해 보거라.”
그 판단은 데이른 공작도 화염의 지배자와 똑같았다.
“알겠습니다.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그래. 그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테이벤의 대답에 데이른 공작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터억!
그리고 작은 모래시계 하나를 품속에서 꺼내고는.
“시간이 지나도 승부가 안 나면 둘다 패배 처리다.”
이 대련에는 시간제한이 있다는 추가 설명을 붙였다.
‘시간제한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에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최단 기록을 세우려면 얼마나 빨리 끝내야 하려나?’
그리고 그 궁금증은 에탄이 테이벤을 어떻게 상대할지로 이어졌다.
“그럼.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해라. 서로를 죽일 기세로 물어뜯어야 할 거다.”
그때. 데이른 공작이 에탄과 테이벤을 향해 얼른 한판 붙으라고(?) 재촉하는 순간.
…파앙!
에탄은 대포알이 튀어 나가듯 테이벤에게 달려들었다.
* * *
테이벤은 생각했다.
‘적어도 1분은 버티겠지.’
자신이 에탄을 상대로 이기는 건 불가능해도,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나도 그동안 발전했다.’
페르메를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연무장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손에 굳은살이 배로 배겼어.’
손에서 피가 나는 건 물론이고.
너무 검을 휘두른 나머지 기절을 한 적도 많았다.
그 정도로 테이벤은 자신을 갈고닦았다. 에탄과 다시 맞붙었을 때 변화된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자. 덤벼라!’
그래서 있는 힘을 다 하리라 마음 먹은 순간.
…파앙!
공기가 찢겨 발겨지는 소리가 테이벤의 귓가에 들려왔다.
“?”
동시에 눈앞에 있던 에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그래서 몸을 뒤로 트는 순간.
콰직!
테이벤은 들어버리고 말았다.
머리 위에 있는 빨간색 구슬이 박살나는 소리를.
“내가 이겼다.”
그리고 에탄의 덤덤한 승리 선언을.
* * *
“호오….”
데이른 공작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어지간한 움직임에는 감흥을 못 느끼는 그였지만.
“이거 재밌는 녀석이군.”
에탄이 보여준 흐름은 예외였다.
메말라 있던 그의 흥미에 물을 줄 정도로 말이다.
“3초라.”
3초. 에탄이 테이벤의 머리 위에 있는 구슬을 부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아직은 오래 걸리는구만.”
하지만 데이른 공작은 그걸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자신이었다면 1초만에 구슬을 박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른. 넌 눈이 너무 높아서 문제야.”
화염의 지배자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데이른 공작에게 핀잔을 줬다.
“재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녀석이야. 그걸 감안 해서 봐야지.”
“싸움에 나이 같은 건 상관없다.”
“…이런 면에서 융통성이 쥐뿔만큼도 없는 건 여전하구나.”
데이른 공작은 제법 유한 사람이다.
하나. 힘을 판단하는 기준은 돌과 같았다.
“자신을 과시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에. 화염의 지배자는 그걸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터벅. 터벅.
탁!
“제가 이겼습니다.”
그때. 에탄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이 승리했다고 입을 열었다.
“그래. 축하한다.”
데이른 공작이 에탄의 말에 미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이제 뒤로 가거라. 다른 녀석들 대련을 진행해야 하니까.”
그리고 에탄에게 물러나라는 뒷말을 붙였다.
“예. 알겠습니다.”
에탄이 데이른 공작의 말에 덤덤히 답했다. 칭찬 한마디 없었지만 그걸로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 또한 데이른 공작이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탁!
그래서 더 이상의 말을 붙이지 않고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타타탁!
아린이가 에탄을 향해 달려왔다.
“아빠! 완전 최고였어요!”
“진짜?”
“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빨랐거든요!”
그리고 품에 안겨 꺄르르 웃었다. 아빠가 승리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모습이 제법 보기 좋았다.
‘아린이라…’
데이른 공작이 그런 아린이를 빤히 쳐다봤다.
‘과연 아빠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러면서 아린이의 잠재력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 * *
대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만. 모래가 완전히 바닥났다. 둘 다 패배다.”
“…크윽.”
“젠장.”
하지만 그중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작은 구슬을 깨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북부의 후계자들이 이렇게 까지 나약할 줄이야.’
데이른 공작이 그 사실을 상기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야만인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군.’
북부 너머에 있는 야만족과 마물들.
놈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많아야 한다.
하나. 데이른 공작의 눈에 만족스러운 후계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에탄.’
칼라사르 가문의 막내 후계자이자.
이번 대련에서 유일하게 구슬을 깬 에탄이었다.
“이번 대련의 우승자는 칼라사르 가문의 에탄이다.”
데이른 공작이 뒤에서 쉬고 있는 에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에탄에게 집중됐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에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이건 조금 아닌 거 같습니다!”
“맞습니다. 고작 구슬 깨기로 우승자를 뽑다니 부당합니다!”
그 순간 다른 가문의 후계자 두 명이 손을 들고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래?”
에탄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누구 한명 기절할 때까지 붙어볼까?”
“크흠….”
“으으음.”
그리고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노려봤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거 같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에탄의 살벌한 기세에 두 사람이 손을 내렸다. 에탄이 테이벤을 상대할 때 보였던 움직임.
그걸 뛰어 넘는건 불가능하다고 그들의 본능이 말했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말을 하기 전에 세 번 생각을 하도록.”
데이른 공작이 두 후계자에 의견 철회에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원래 저 나이의 아이들은 일단 지르고 보는 성향이 있으니까.
“좋아. 그럼 바로 상을 내려야겠구나.”
우드득!
데이른 공작이 기지개를 폈다.
그 후 바닥에 꽂은 대검을 들고는.
탁… 탁… 탁!
에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어서 눈앞에서 에탄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는.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보거라. 말이 안 되는 수준만 아니라면 들어주마.”
“진짜입니까?”
“그래.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자신을 걸고 맹세했다.
에탄이 원하는 걸 최대한 해주겠다고 말이다.
씨익.
에탄이 데이른 공작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녀석도 저 자식의 계산에 걸려들었군.’
화염의 지배자가 그걸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마탑에서 에탄과 거래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저 자식에게 이름 걸면 큰일 난다.’
적어도 에탄에게만큼은 명예를 걸면 안 된다는 거였다. 특히 무언가를 상으로 주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공작님. 잠시 귀 좀 빌리겠습니다.”
속닥. 속닥.
화염의 지배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에탄이 데이른 공작을 향해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 후 데이른 공작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고는.
싱긋.
고개를 다시 원위치 하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너.”
그리고 에탄의 귓속말을 들은 데이른 공작은.
“혹시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냐?”
에탄에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